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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성장의 7가지 걸림돌 여섯 번째 : 고집 (행 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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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고집, 우리의 고집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늘 수제자 노릇을 했던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언제나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 주님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자 역시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서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큰소리치고 다른 제자들도 동조합니다(마 26:35).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는 생명이 아까워서 주님의 예언처럼 닭 울기 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마 26:75).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 실망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명을 주시고(요 21장) 이때부터 베드로는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때론 주님을 배신하기도 하고 엉뚱한 짓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불러 위로하고 힘주시고 사명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렇게 정신 차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 복음 전하던 베드로에게 또 한 번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이름을 가진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이 고넬료는 이방인인 로마 사람이지만 온 가족이 다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 구시(오후 3시)쯤 되어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이 고넬료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으니 빨리 사람을 보내서 욥바의 피장이(가죽기술자) 시몬 집에 있는 베드로라는 사도를 불러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하인 둘과 병사 하나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 때 욥바에 있던 베드로는 참 희한한 경험을 합니다. 베드로가 여느 때처럼 제 육시(정오)에 지붕에 올라가 기도 하다가 너무 열심히 기도했는지 상당히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그 배고플 때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이 생긴 그릇이 네 귀퉁이가 매어 땅까지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그런데 이 때 베드로의 반응이 참 이상합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알았는데도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거부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의 명령도 아닌, 하늘에서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인데도 베드로는 거부합니다. 물론 근거는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긴 율법의 정결규정입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짐승과 물고기, 새와 곤충 중에 반드시 정결한 것이 있고 부정한 것이 있습니다. 정결한 것은 먹어도 되지만 부정한 것을 먹으면 큰 죄가 됩니다. 이를테면 짐승은 굽이 갈라져 쪽발이어야 하고 되새김질을 해야 정결한 짐승이고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정결규정을 너무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절대로 범하지 않았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그릇 속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다 한 데 섞어 놓고는 잡아먹으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안 되지요. 지금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제가 한 번도 부정한 것을 먹은 적이 없다."며 그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또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참 이상한 명령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이렇게 율법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상한 명령을 내리시니 베드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하늘에서 들려온 명령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또 세 번입니다. 베드로는 유난히 세 번과 인연이 많은 사람이지요? 주님을 세 번 부인했고,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부탁하시고, 오늘은 또다시 "잡아먹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세 번이나 거부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인생을 보면 참 베드로의 성격이 우직하고 고집 센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별명의 뜻이 '반석' 즉 큰 바위덩이라는 뜻인 것처럼 베드로는 바위처럼 우직한 사람입니다. 고집도 세고 줏대가 강해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성품 때문에 순교 당하면서까지 복음 전했겠습니다만 적어도 오늘 본문에 나온 장면에서만은 어지간히도 고집 센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내 확신 때문에, 율법에 대한 그의 신념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 번이나 명하시는데도 "율법에 분명히 안 된다고 나와 있고, 저도 한 번도 어겨본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세 번이나 거부합니다. 정말 돌처럼 단단하고 경직된 고집 센 사람입니다.




물 같은 교회, 물 같은 성품

최근 '트랜스 지방'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각 식품회사들이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과자에는 트랜스 지방 함유율이 0%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데 도대체 이 '트랜스 지방'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도 안 들어있다고 자랑하는 것일까요? 트랜스 지방이란 한 마디로 액체 상태의 식물성 기름을 고체 상태로 만들 때 인체에 치명적인 독성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동안 포화지방산인 동물성 기름은 심장병이나 비만 같은 혈관질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몸에 안 좋지만, 불포화지방산인 식물성 기름은 건강에 좋으니 많이 먹으라고 권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식물성 기름도 액체 상태에서는 괜찮다가도 이것을 마가린이나 쇼트닝 같이 고체, 반고체 상태로 가공할 때 산패(酸敗, 기름을 공기 중에 오래 두면 산화되어 색깔이 변하고, 이상한 맛이나 냄새가 나는 현상)를 억제하려고 수소를 첨가하는데 이 때 바로 트랜스 지방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트랜스 지방을 많이 섭취하면 동물성 기름처럼 체중이 늘어나고, 해로운 콜레스테롤이 많아져 심장병, 동맥경화증이 생길 뿐 아니라 각종 암이나 당뇨병까지 유발시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체화 된 기름을 어디에 많이 넣습니까? 우리가 매일 먹는 마가린, 쇼트닝, 빵, 과자, 수프, 유제품 등에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 트랜스 지방이 들어간 식품을 규제해 왔는데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재작년 우리 교회 항존직 선출자들이 교회탐방을 하면서 다녀온 광양 대광교회에 '아쿠아 센터'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아쿠아'(aqua)란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물' 또는 '액체'라는 뜻입니다. 광양 대광교회 담임목사님이 저와 비슷한 시기에 목회학박사과정을 공부했는데 그 수업 중에서 레너드 스위트(Leonard Sweet) 교수라는 분이 쓴 <아쿠아 처치>(Aqua Church)라는 책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아쿠아 처치>란 교회가 물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 혹은 액체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고집이 없습니다. 정해진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습니다. 그저 우묵한 그릇에 담기면 우묵한 모양이 되고, 긴 모양의 그릇에 담기면 긴 모양이 됩니다. 어디든지 흘러들어가 그 모양에 맞춰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통이나 고집에 매어있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지만 물처럼 고집을 버리고 어디든지 흘러들어가 변화되는 특징을 가지면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또 어디든지 흘러들어가는 물의 특징처럼 교회도 담을 높이 쌓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곳이 구원의 방주이니 살고 싶은 사람은 들어오시오."라는 식이 아니라 담을 허물고 문을 열고 지역사회 속에서 어디든지 흘러들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이 흘러 들어올 때 소리도 없이 언제 들어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옵니다. 그래서 '물 흐르듯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광양 대광교회도 이런 뜻을 살려 '아쿠아 센터'라는 건물을 짓고 지역 사람들이 누구나 와서 차도 마시고, 공연도 감상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프로그램도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참 좋은 발상입니다. 모든 교회가 전통과 관습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역 속으로 물처럼 소리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개인의 성격도 물 같은 사람이 있고, 단단한 고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물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줏대도 없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흐물흐물한 사람을 뜻하는 나쁜 말로 이해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물 같은 사람은 참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집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누구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주장 내 생각도 분명히 있지만 남을 잘 받아들이고 인정해주는 물처럼 '유연한'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늘 요란하게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사람과 달리 물 같은 사람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합니다. 그러면서도 물 흐르듯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남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목회도 꽤나 요란하게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물 흐르듯이 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임하자마자 교회를 단번에 변화시켜 보겠다고 아주 의욕적으로, 요란하게 다 바꿉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교회가 빨리 변화되겠지만 여기저기서 반발하는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부임하고도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얼음장 밑에서 물이 졸졸 흐르듯 조용히 교회를 변화시키는데 몇 년 지나고 보면 모든 성도들이 "어, 어느새 우리 교회가 이렇게 많이 변했지?" 하고 놀랄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하면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반발이나 삐걱거리는 소리 없이 정말 물 흐르듯 교회가 변화됩니다. 유연한 목회입니다. 이것이 훨씬 지혜로운 목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성품이 물 같을 때는 괜찮은데 이 성품이 고체화가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물이 얼음으로 굳어지면 그 유연성을 잃고 차가와 지듯이 우리 성품이 단단하게 굳어지고, 차갑고 냉정해 집니다. 식물성 기름이 액체상태일 때는 몸에 좋다가도 고체화 될 때 몸에 해로운 트랜스 지방이 생기듯이 우리 성품에 독성이 생깁니다. 자기주장과 고집이 너무 강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드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베드로처럼 하나님 말도 안 듣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트랜스지방 같은 독성입니다. 내 성품에 이 독성이 생기면 반드시 남을 죽이거나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집을 꺾으신 하나님

다시 베드로의 고집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진 신념 때문에 고집을 부립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직접 명령이라도 안 된다고 부인합니다. 그런데 세 번이나 거부하고 난 뒤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그릇이 올라간 후 이 환상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골똘히 생각하는데 그 때 마침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를 보낸 백부장 고넬료가 당신을 모시고 오랍니다." 성령께서도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명하십니다. 하지만 평상시 같으면 베드로는 거절했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명령이라도 말입니다. 왜냐? 고넬료는 이방인이거든요. 베드로의 마음속에 이방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유대인에게만 복음 전해야지 절대 이방인들에게는 복음 안 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 또한 앞서 율법의 정결규정처럼 베드로에게는 절대적인 원칙이었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람이 찾아오고 성령님은 가라고 명할지라도 평상시의 베드로라면 절대 안 따라갑니다. 어디 부정한 이방인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방금 전 자신이 본 환상을 기억한 것입니다. 방금 내가 본 그 환상,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그 음성, 그것은 바로 이 상황을 두고 주신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즉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를 두고 부정하다 정결하다 따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규정일 뿐이지 율법을 주신 당사자인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면 아무 문제없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인데 이것은 먹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선교의 대상에 대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선민이요 이방인 부정하고 버려진 사람들이라는 그 생각 자체가 유대인들의 편견이요, 하나님은 지금 이 편견을 버리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백성이요 구원 받아야 할 그 분의 자녀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은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바위덩어리처럼 고집불통이던 베드로가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 깨닫고 생각을 고쳐먹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이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경고까지 하면서 무슨 환상을 보여주셔도 절대 자기 고집 안 꺾습니다. "죽어도 내 고집 꺾나봐라." 어떻게 될까요? 정말 죽습니다. 끝까지 못 고치면 죽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꺾었고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 전하고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하고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이방선교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고집이 꺾이지 않는 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고집이 꺾이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소나 양이나 염소나 흠 있는 것, 절거나 눈이 먼 것은 절대 사용할 수 없습니다(신 15:21).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장도 될 수 없습니다(레 21장).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신체적인 핸디캡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품과 인격에 흠이 있고 독성이 있으면 절대 하나님께 드려질 수도, 쓰임 받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고집과 자기주장이 대표적인 성품의 흠이요 독성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성품이 강퍅하여 아홉 가지 재앙을 당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다가 결국 맏아들을 잃고서야 보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고 나서도 내 고집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적하다가 결국 홍해에 빠져 죽습니다. 강퍅(剛愎), 굳셀 강, 괴팍할 퍅 으로 심령이 딱딱하게 굳어 괴팍해졌다는 뜻입니다. 고집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도 자신들도 목이 곧은 백성 되어 광야에서 망하고 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고집을 꺾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죽습니다. 망하고 맙니다. 예수님도 고집, 자기주장을 세우셨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내가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으면 좋겠다, 이 십자가를 안 지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하신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순종의 길을 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모자라고 바보 같아서 순종하는 것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주장도 없어서 순종하는 것 아닙니다. 나도 생각이 있고 고집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이 반드시 옳다는 것을 믿기에 내 고집 내 주장 다 꺾고 100%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교회에서도 내 주장 내 고집만 앞세우지 마십시오. 고집은 내 영적인 안목을 흐리게 만들고 은혜와 축복의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가로막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되면 순종해 주시고, 다른 성도들 앞에서도 항상 소리 높여 내 주장만 앞세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유연한 마음과 물 흐르듯 한 자세를 가지고 남을 포용해 주십시오. 이런 자세와 성품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귀히 쓰십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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