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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의 간절한 외침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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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하소연해 공감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공감, 그렇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원해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으면 공감해주세요. 그러면 참게 만들어줍니다. 또 다른 사람은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행동의 목적이 달라요. 한 쪽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남이 알아주기 원합니다. 다른 쪽은 그것보다는 그 힘든 상태를 벗어나려합니다. 한 쪽 행동은 공감만 얻을 뿐입니다. 다른 쪽은 무언가 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상황은 늘 개선이 필요하니까 계속 바꾸려는 시도가 일어납니다. 결과적으로 성장합니다. 갈수록 둘 사이의 차이는 커집니다.

한 쪽은 불평과 탄식으로 점점 살 길이 안 보입니다. 다른 쪽은 점점 눈이 밝아져 잘 살게 됩니다. 같은 자리에서도 한 쪽은 불평거리를 다른 쪽은 살 방법을 봅니다. 그의 외형은 점점 더 좋아지게 됩니다. 인상도 지위도 세상에서의 모습도 좋아집니다. 우리의 영혼은 늘 외치고 있습니다. “나는 밝고 행복한 세상을 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1. 근본적 해결의 소원을 가져라

어떤 분이 말한 것을 들으면 우리 TV드라마를 보면 아주 운명적이랍니다.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눌려요.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랑하지만 결혼 못합니다. 서로 상대에게 불행이 올 것 같아서입니다. 또는 양가의 무서운 반대로 또는 운명적인 문제로 인해서 헤어져야합니다. 감상적 대사가 아름답게 가슴 적십니다. 계속 보면 어느새 우울증에 잡힙니다.

교회 나가는 분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회사에 나가는 한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말씀 잘 듣고 교회 봉사도 잘 합니다. 그러나 회사는 생존경쟁이 심합니다. 교회가 아니에요. 진급해야 합니다. 실적 올려야 합니다. 나를 평가하는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술도 마시고 선물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거짓말도 합니다. 신앙과 달라요.

진급 못하면 퇴직합니다. 진급해도 결국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충분한 저축이 없습니다. 가장으로서 불안한 말을 자꾸 합니다. 교회에서 인정은 받고 있지만 겉모습뿐이요 속은 세상 사람처럼 멍들어 있습니다. 부인은 약하고 불신앙적인 남편에게 실망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교회의 중직이 그럴 수가 있느냐 합니다. 인격적으로 깔보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TV드라마처럼 운명적입니다. 교회 나와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하나님 믿기에 바르게 살려 하지만 그럴 힘이 없습니다. 삶은 너무 힘들고요. 사람은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마담이 힘든 이야기 잘 들어주면 멀어도 갑니다. 상담은 그 목적을 위해 있습니다. 아픈 상황 듣고 공감해 줍니다.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려줍니다.

사람들의 힘든 모습은 바디매오처럼 운명적입니다.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자연히 거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살기가 힘들까요? 네, 힘듭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집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동정을 구할 수 있습니다. 불쌍하게 생각해 줍니다. 그리고 돈도 줍니다. 그냥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옆에 있는 동료 거지들처럼 말입니다.

그는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위에 동료들도 그랬습니다. 삶은 버겁고 불만스럽습니다. 그들은 서로들 불평하며 서로들 싸웁니다. 그리고 서로들 공감해줍니다. 거지들의 괴로움을 거지들만이 압니다. 그래서 서로 모여 삽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불평하며 싸우며 공감합니다. 이 운명 같은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까요?

그가 다른 거지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상황을 혐오한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결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다른 거지들처럼 상황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일어서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상황이 만족스러운가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불평합니까? 그래서도 안 됩니다. 더 나은 삶을 간절히 원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만 예수는 오늘도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가 구원자임을 믿으세요. 바디매오처럼 보기를 원하고 자유를 갈망해야 합니다. 이 나이에 별 수 있나? 돈이 있어야지. 기술도 없는데. 맹인이 되었어요. 사는 길을 못 봅니다. 그렇게 우울하게 현실에 굴종하겠습니까? 간절히 원하세요. 바디매오가 해결됩니다. 우리도 그러려고 나왔어요.

2. 전능의 구원자 앞에 나오라

바디매오가 어떻게 했나요? 그는 구원자를 사모했습니다. 그 구원자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위의 사람들이 꾸짖습니다. “잠잠해라. 네가 여리고 망신 다 시키는구나. 좀 점잖게 있어라.” 그러나 그는 계속 더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두가 막아도 그의 열정은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예수는 머물러 섰습니다. “저를 부르라” 하십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옵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가 무슨 대답을 합니까? “제 사정 좀 듣고 공감 좀 해주세요. 위로 좀 해 주세요. 그리고 돈 좀 주세요” 했나요? 아닙니다. 말합니다.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원하는 게 보는 것입니다.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무엇을 원하나요? 공감인가요? 위로인가요? 감동인가요? 보기를 원해야 합니다. 자유를 원해야 합니다. 문제에서 구원을 원해야 합니다. 부단히 도전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몸 약해도 돈 없어도 상황이 나빠도 상관이 없어요. 나은 세상 보기를 원하세요. 믿는 사람은 다 됩니다.

아까 그 회사원 경우를 적용해 봅시다. 어떻게 진급하나요? 어떻게 실적을 올리나요? 어떻게 높은 사람과 좋은 관계 갖나요? 술을 안 먹으면서도 인간관계도 잘 하나요? 이것저것 잘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어요. 바디매오가 구걸하기 좋은 자리 차지하고 수입이 많아지는 겁니까? 수고한다고 위로 듣는 겁니까? 근본적 해결은 아닙니다.

예수의 구원은 그 이상입니다. 당신은 예수에게서 뭘 기대합니까? 구원과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게 뭐냐고요? 사람들은 세상보다 작습니다. 삶에 눌립니다. 남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돈도 힘도 시간도 다 부족합니다. 경기도 나쁩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위로가 아닙니다. 공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 주기 원하느냐?” 예수가 어떤 분입니까? 위로나 하고 맙니까? 공감해주고 눈물 흘리고 끝냅니까? 그는 구원자입니다. 맹인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합니다. 세상을 볼 영의 눈을 열어줍니다. 예수처럼 자유하게 합니다. 세상보다 큰 존재로 일으켜줍니다. 진짜 구원을 요구하세요. “못 보던 것을 보게 하소서.”

예수께서 뭐라 하시나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무슨 말인가요? 그가 구원자임을 믿습니까? 내 문제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을 믿습니까? 병고치고 약함 고침을 믿습니까? “네 느낌이, 네 체험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지 않습니다. 나를 고치고 나를 세상보다 문제보다 삶보다 크게 하셨습니다. 믿나요? 믿음이 구원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예수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가 영으로 여기 계십니다. 어떻게 만납니까? 거지들 가운데 그냥 앉아있나요? 점잖게 체면 지키며 있나요? 아니면 바디매오처럼 간절히 열정적으로 예배하나요? 그의 말씀을 받아 믿나요? 지금 이 시간 설교 통해 부어지는 복음을 받나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 받았음을 믿으세요.

3. 믿음으로 보고 자유하라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바디매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길에서 좇았습니다. 여기서 “곧”이란 단어가 얼마나 걸린 것인지 모릅니다. 며칠은 아닙니다. 몇 시간도 아닙니다.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안 보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씀과 봄과는 약간의 시간이 있습니다. 감사로 믿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이라 했습니다.(요10:35) 바디매오는 보았습니다. 자유로워졌습니다. 남의 공감 필요 없습니다. 돈 달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로도 필요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 위로하고 돈 벌고 공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뭘 요구해야 합니까? 위로인가요? 돈인가요? 공감인가요? 도움인가요? 아니, 예수요, 믿음이요 변화된 신분입니다.

TV보고 신문보고 사람들 말로 감긴 눈을 뜨세요. 그것들이 우리의 눈을 감겼습니다. 생긴 것과 몸 상태와 나이와 지식을 넘어서세요. 운명에 눌리지 말고 운명을 만듭시다. 모든 약함을 예수로 바꿉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에서 무엇을 얻어갑니까? 위로인가요? 공감인가요? 성경지식인가요? 예수를 얻어갑니다. 구원자입니다. 근본적 변화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좋아 자유를 누립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삽니다. 능력은 더욱 큰 능력을 줍니다. 믿음은 더욱 큰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불평하면서 나이 탓, 부모 탓, 돈 탓하며 어쩔 수 없다고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해결을 향해 계속 도전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모델입니다. 인도자입니다. 당신이 거지 바디매오보다 나은 존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진급해야 하나요? 실적 올려야 하나요? 생존경쟁 심하고 삶은 버거워요? 몸은 늘 피곤하고 나이 먹었어요? 노후준비 없어요? 근본적 도전을 하세요. “과연 나는 구원을 받았는가? 바디매오처럼 새로워졌는가? 내 영혼이 세상보다 문제보다 나이보다 큰 존재임이 확실한가?” 믿고 보세요. 즉시 안 되도 참고 도전하세요. 내 안에 예수가 안 보이나요?

우리는 금세 눈이 안 보입니다. 세상에 눌려서요. 경험이 병이 나이가 예수를 가립니다. 그래서 예배에 나오는 겁니다. 예수는 오늘도 대행자인 목사를 보내 만나십니다. 그냥 멀리 앉아 보내지 마세요.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바디매오가 되세요. 주위에서 비난합니다. “왜 그렇게 교회에 많이 가는가? 왜 그리 극성인가?” “바디매오처럼 되기 위해서.”

나의 영은 늘 갈급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평과 걱정을 그치고 예수의 구원을 믿으세요. 가려진 눈을 뜨세요. 지금보다 백배는 잘 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내 안에 주어진 예수를 의지하고 보세요. 나는 세상보다 큽니다. 문제보다 강합니다. “나는 예수의 축복을 받았노라. 예수를 모셨노라. 나는 보노라. 자유 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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