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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의 허용 요청 경고 (마 26:4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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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허용 요청 경고 (마 26:47-68)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누차 증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분이 영원히 죄를 참으시는 분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분으로부터 진리의 말씀과 경고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회개치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세 가지 태도가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죄를 허용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잠든 제자들을 깨워서 당신님을 파는 자에게로 가자고 하셨습니다(46). 그 때에 맞은편에서 유다가 다가오고 있었고, 그와 함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들은 검과 몽치를 들고 있었습니다(47). 유다는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효과적으로 체포하기 위해 무리들과 미리 비밀 신호를 짜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48). 한글 성경에는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내가 좋아하는’ 혹은 ‘내가 사랑하는’ 자를 잡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발견하자 곧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49). 여기서 입을 맞추었다는 말은 몇 번이고 열렬하게 입을 맞추었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대해 거짓된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입맞춤은 주로 존경과 화해와 사랑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다는 연거푸 예수님께 존경과 화해와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안녕하시옵니까’라는 단어도 ‘기뻐하십시오’ ‘즐거워하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말과 그의 표정과 그의 행동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마음은 전혀 반대였습니다. 아주 세속적인 사람들 중에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 속에 이러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50)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친구여’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만 3차례 사용되었는데, 나머지 두 곳(20:13, 22:12)에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상황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도록, ‘아! 내가 지금 무슨 짓하고 있는 거야!’하며 돌아서기 원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함께 했던 동료요 친구로서 유다의 행위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 특이한 것은 ‘친구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되네’라고 막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51-53절을 보면 오히려 유다의 행동을 막으려 하는 한 제자의 행동을 막으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은 체포되셨기보다는 체포되어 주셨습니다. 능히 피할 수 있으심에도 체포당함을 허용해 주셨기 때문에 저희가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유다의 행동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54절을 보십시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55-56절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을 생애 내내 사로잡고 있던 한 가지 열망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해 주님은 이 순간에도 유다의 악행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의 악행에 대한 책임이 주님께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끊임없이 유다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그를 귀하게 중용해서 직분을 맡기셨고, 최후의 만찬석상에서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죄를 향해 치닫는 유다를 위해 때마다 적절하게 제동을 걸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은혜 속에서도 돌이키기는커녕 점점 더 이중적이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이사야 26:10절 말씀처럼 되었습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결국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에게 은혜 베풀기를 중단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브레이크가 파열된 차처럼 악을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 은혜를 계속 무시하다보면, 그 은혜가 중단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 악행의 심각한 결국을 아시면서도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 시대는 ‘은혜’라는 말을 값싸게 여겨 죄 짓기에 담대한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많으나 기독교 윤리는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은혜’의 때에도 성도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인 ‘경외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작은 죄를 지적해 주실 때 그 죄를 애통해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회개하는 삶이 아니고서는, 큰 죄 역시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요청에 침묵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57).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든 불법적 행동을 동원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야담에 소집되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 체포된 당일에 사형을 선고하는 것도 날치기 재판이며 명백한 불법 행위였습니다. 피고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거짓 증거들을 찾고 거짓 증인들을 세우는 것 역시 심각한 불법입니다. 그것마저도 실효성이 없자 대제사장은 유도심문을 했는데 이 역시 불법입니다. 대제사장이 나중에 분개하며 옷을 찢었던 것도, 레위기 21:10절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말씀을 범한 행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불법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화려하게 갖추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63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죄의 허용만큼이나 두려운 일입니다. 이사야에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b),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죄를 회개하지 않는 한, 아무리 종교적인 행사를 거창하게 가지고 많이 기도해도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종교적인 복장과 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 마음에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도 역시 잠잠하셨습니다.

이사야 59:1-6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때때로 하나님께서 내 요청과 간구에 잠잠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경우를 무조건 죄 때문으로 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의 요청에 잠잠하실 때, 행여나 내게 있는 죄로 인함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매우 유익합니다.

셋째로 최후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잠잠히 계시자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법정에서 피고에게 사실 만을 말하도록 맹세시키는 행위였습니다. 잠잠하시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64a)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말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시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셨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b)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진리를 막으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는 결국 최후의 심판장에게 심판 받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이 모든 성도들이 소망하는 날이지만, 회개치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의 날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맹세로 답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 앞에서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며, 참람한 말을 하였다고 정죄하였고, 불법 공회는 사형을 선고했습니다(65-66).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모욕하고, 누가 때렸는지 맞춰보라고 놀리며, 선지자 노릇하라고 조롱했습니다(67).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는 말씀처럼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악인의 특징 중 하나는 이처럼 은혜를 베풀 때에, 더욱 교만해지고 더욱 담대히 악을 행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뿐입니다.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다면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의 한량없으신 은혜 속에 살면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잃지 않고 참으로 은혜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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