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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 동역자 (롬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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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동안 한반도에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불행한 사건으로는 한반도에서 핵이 터졌다는 것이고, 반가운 일은 세계 평화의 가장 중요한 자리인 유엔 사무총장에 우리 한국 사람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할 생각은 이 세상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 요소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일을 전력을 다해 하다보면 맨 마지막에는 허망한 좌절에 빠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온 세계가 북한을 그토록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유엔 기구에서 도와준 것은 고사하고 한국 정부가 10년 동안에 6조5천8백억 원이나 지원했고 민간단체, 온 세계 교회가 북한을 향해서 한 것이 이루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도와준 이유 중에 하나가 핵 실험 같은 것은 하지 말고 평화스럽게 함께 살자고 열심히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니까 지금까지 북한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계속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유엔 안보리에서는 하지 말자고 지금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일이 너무나 바빠서 협조하지 못하겠다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다 우리들이 해야 될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되는 마음을 이번을 계기로 또 한 번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로 온 세상이 뒤숭숭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북한을 더 이상 원조할 필요가 없다는 유엔의 결의를 보니까 더 큰일 났습니다. 북한의 민중들이 더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치 지도자 몇 사람들의 생각이 온 세상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 것을 우리가 또 한 번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두 가지입니다. ‘동역자’라는 말과 ‘문안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마지막 장을 쓰면서 자신의 선교 사역 일대기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안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2000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세계 선교에 가장 큰 공로자가 있다면 바울 사도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성지순례를 하는데 여러 가지 성지순례 코스 중에서 ‘사도 바울 선교지 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1, 2, 3차 전도 여행을 했고, 마지막에는 4차로 로마에 갔는데, 선교하면서 지나갔던 그 길을 답사하는 코스로 저도 한번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문명의 혜택에서 잘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첨단 과학적인 공법으로 잘 정리된 아스팔트 도로가 어디를 가나 잘 되어있어서 다니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또, 타고 다니는 버스는 그 나라에서 제일 수준급의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의자가 편안해서 피곤하면 뒤로 젖히고 침대같이 잠을 자도 될 정도입니다. 추우면 히터가 나와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 주고 더우면 에어컨이 나와서 시원하게 만들어줍니다. 목이 마르면 시원한 콜라나 다른 음료수가 언제나 버스 안에 준비가 되어 있고, 식사 때가 되면 어디를 가나 좋은 음식을 먹고 저녁이면 수준급의 관광호텔에서 잠을 잡니다. 그런데도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하는 말은 피곤해서 못 다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를 생각해 봅시다. 바로 그 사막 길을 걸어서 굶주리며 매 맞으며 감옥에 갇히고 심각한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기다리는 사람 없는 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들은 부끄럽고 창피스럽습니다. 바울을 보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했는데, 사실 바울의 선교 행적을 가보면 그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어떻게 그렇게 큰 선교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오늘 성경말씀에서 전해주는 바를 우리가 기억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선교 사역을 훌륭하게 잘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훌륭한 동역자들을 그에게 수없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로마서에 나타난 동역자의 이름만도 29명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바울의 13서신의 모든 동역자를 다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됩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지막 부분이 축도인 것과 그동안 자신의 선교를 도왔던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라는 기록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1~16절까지에만 해도 “문안하라”는 단어가 18번이나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 기억에 지울 수 없는 고마운 추억이요 잊지 못하는 선교 동역자들에게 글을 통해서 감사장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아니어도 평생을 복음 전파에 몸 바친 주의 종들은 은퇴 후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회고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90퍼센트 이상의 목회자들이 다 합니다. 한 달 전에도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은사이셨던 목사님께서 80회 생일을 맞이하셔서 출판기념을 하신다고 초대하셔서 제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인생 80년을 돌아보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모두 기록해서 그날 참석한 1000명도 넘는 축하객들에게 다 나누어 주셔서 저도 한 권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읽어보니까 거기에 제 이름도 하나 기록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 내용은 바울 사도와 같은 흐름의 기록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기억나는 고마웠던 사람들은 모두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저 같은 사람도 은퇴 후에는 틀림없이 그런 회고록 하나는 남기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는 것은 영원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가장 절실한 기록이 두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 두 기록이 모두 승천 직전 기록으로 나타나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적 교훈이라고 설교자들이 말합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마지막 부문입니다. 28장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 1장 기록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그 말씀대로 라고 믿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 사도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크게 쓰셨던 세계 선교사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바울 사도 자신이 고백한 선교 동역자의 역할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우리 사역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말씀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바울 사도가 강한 강조를 두어서 말한 것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기록된 문안자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부부로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리스가는 아내인데 아굴라는 유대인이고 부인은 로마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선교하러 갔을 때 돈이 없어서 취직을 하러 다녔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천막 만드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곳을 찾아서 가보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바로 그런 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취직을 해서 함께 일하면서 선교비를 조달받는 관계로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종의 이 집의 종업원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일 가운데서 피차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 부부는 새로운 사명감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협조합니다. 나중에 바울 사도는 에베소로 선교지를 옮겼는데 이들 부부는 고린도의 생업 터전을 정리하고 바울을 따라서 에베소로 가서 계속하여 바울 사도의 훌륭한 선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선교 동역 사역은 우리들에게 오늘 큰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선교 동역은 뜻이 같아야 능력으로 성취된다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선교 현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있습니다. 핍박인가? 그 나라 기후인가? 아니면 돈인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제일 큰 일이 뭐냐 하면 선교지에 가서 배우자인 남편이나 아내 둘 중의 하나는 하고 싶어 하는데 하나는 그만 두자고 할 때가 제일 큰 위기입니다. 이 문제는 아예 기초부터 흔들려 버리니까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그런 어려움입니다. 여기에서 선교 동역자 역할을 했던 남편인 아굴라가 반대했든지 아내인 브리스가가 반대했다면 절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교사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니니까 선교사나 목회자들의 고충 같은 것들을 아마 체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같이 이렇게 목회하는 목사도 가장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사모가 된 사람이 목회를 그만 두자고 제안을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없는 것 같지만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들도 “도저히 여기서 선교 못하겠다. 돌아가자.” 부인들이 이러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나 목회자의 부인이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을 때 어떻게 하죠? “그럽시다. 하나님이 나에게 소명을 주셔서 일을 맡기셨지만 당신이 싫어하니까 나는 그만 두겠습니다.” 그래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아니다. 너 이혼하려면 이혼해라. 나는 끝까지 하겠다.” 이래야 됩니까? 이 문제는 보통 힘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나 저같이 목회자들은 나만 빼놓고 부인들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그런 말이 나올까봐 아주 벌벌 떱니다. 버리지만 않으면 감사하게 살아갑니다.

지난번에 갔던 아프리카 선교사 부부가 지금 한국에 나와 있어서 만났습니다. 우리 일행이 한 열 명 정도가 갔었는데 그 선교사님이 우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느냐 하면 “간증을 하겠습니다. 내가 간증하는 것보다 아내가 간증하는 것이 훨씬 더 실감 날 것입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우리들이 “좋습니다. 들어보겠습니다.” 그랬더니 간증을 해주셨는데 무슨 간증이냐 하면 선교사역이 너무 어려워서 그동안 얼마나 심각하게 부부싸움을 했는지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심각하게 싸웠는지 마지막에 이 선교사는 자기 아내를 앉혀놓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겠다고, 이 기도를 하고 이대로 들어주시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끝내겠다고 하고는 자기 아내를 앉혀놓고 “하나님 아버지! 이 기도는 마지막입니다. 내 아내를 빨리 데려가시던가 아니면 변화시켜 주시던가 하십시오.”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옆의 사모가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도요! 둘 중에 하나 해주세요. 못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선교에는 절대적으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2제자를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훈련시키셨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언적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님을 제가 한번 모시고 오려고 하는데 눈이 작으십니다. 떴는지 감았는지 잘 분간이 안 되는 분이십니다. 실눈이라서 잘 보이지 않은 것 같이 늘 눈을 껌벅거리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이게 괜히 그러시는 게 아니고 선교하다가 하도 아내가 보기 싫어서 안 보려고 눈을 항상 감고 살다가 그렇게 되셨다고 말씀하시고, 사모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얼굴이 이 선교사 얼굴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안보고 몇 년을 살 정도로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금은 사모님이 훨씬 더 열심히 하십니다. 아프리카 국적을 갖고 한국 국적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개골을 여기에 묻자.”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선교의 역사 성취가 열매 맺히는데 이 선교 사역에는, 하나님의 사역에는 동역자가 이렇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느 정도의 선교 동역을 했는가? 오늘 말씀에 나타난 말씀을 그대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희생도 지불할 각오로 동역자로 나섰습니다. 여기 4절에 나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 사도의 선교 동역자들은 만약 바울 사도가 죽을 일이 생겼다면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습니다.”하는 정도의 선교 동역자 역할을 했다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지 그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 경험에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건강이 약해졌는데 진단 결과가 건강한 사람의 장기를 하나 떼어다가 붙이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줄 수 있는가? 이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자기 생명의 위험 부담을 안고 장기를 떼어 줄 수 있는가?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의 배를 째고 내 장기를 뚝 잘라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양심으로 한번 판단해 보세요.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쉽지가 않습니다. 요즘에는 아내나 남편이 죽으면 관 들고 가는 사람들에게 조심해서 들고 가라고 부탁한답니다. 떨어뜨리면 깨어날지 모르니까! 오다가다 나그네로 만난 바울을 위해서 어떻게 목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었는가? 그러면 성경은 거짓말을 했나? 이들은 바울 사역의 주님의 거룩성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바울 사도의 모든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취다. 그분이 살아있다는 것은 주님이 살아계신 것이요 그분이 죽는다는 것은 주님이 죽는 것이다. 순교자적 동역자가 되자! 내가 대신 죽을 수도 있다.” 지금 이렇게 강조해서 바울이 발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 선교사들을 위한 세미나 일 년에 1~2번 해마다 갑니다. 일본 선교사들도 저와 생각이 똑같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만약에 예수를 믿게 되면 세계 선교 사역은 달라질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일본 선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는 일본이 세계 선교에 큰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특징, 가치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문화에는 어떤 확실한 것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특성이 있는 특이한 민족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 세계 전쟁 역사에 누구도 하지 못하는 전술법! 가미가제 특공대! 일본 밖에 못했습니다. 20대의 젊은이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면서 천황 폐하가 내려주는 술 한 잔을 마시고 자기 몸을 박살내서 죽어버리는 전술법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나라 국민들이 이렇게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습니까? 이것은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제가 오사카 세미나 도중에 한국 재벌 총수가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했다고 일본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그날 아침 일본 목사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도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모든 책임을 내가 진다는 뜻입니다. 일본 같으면 그 사람을 따라서 한 사람 내지 두 사람이 또 자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이 분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하는 일은 옳은 일이요 이분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내 삶의 가치다. 이렇게 판단하고 열심히 도와드렸던 사람들은 나는 이제 살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목숨을 끊는 것이 일본의 문화입니다.” 그렇게 저에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진리와 최고의 가치관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위해서 몸을 바쳐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간다면 주님을 위해서 몸을 던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거야 말로 내가 찾는 진리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 선교사님들은 거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를 하시는 겁니다. 실제로 일본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보다 순교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자고 나선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무덤들이 지금 다 있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 가치 있는 일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위해 한번 모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생에서 한번 살다 죽고 마는 것을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해봤자 뭐가 좋은 게 있습니까? 사실 바울 사도는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영적으로 평가하면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죽어줄 수도 있는 동역자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 그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면 바울만 행복했는가? 바울의 동역자들도 똑같이 행복했습니다. “나는 옳은 일을 위해 이렇게 동역자가 된 기쁨을 가지고 목이라도 내놓았습니다.” 사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에 인생을 맡깁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거룩한 명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텍사스에 부흥회를 하러 갔는데 다 끝나는 날 저녁에 교회 중진들이 너무 기쁘다고 늦었지만 좀 모이자고 하시며 한 30명 정도가 어느 집사님 댁에 모여서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데 그 집 주인의 삼촌이 되는 사람이 한국에서 오셨습니다. 모 대학 정치학 교수이십니다. 자기소개를 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평생에 교회를 가본 것은 이번에 3박 4일 부흥회를 처음 갔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런데 나는 이 부흥회를 통해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고 내 인생이 얼마나 헛살았는지 후회가 막심합니다.” 구체적으로 자기는 정치학 교수라서 언젠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줄을 섰는데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틀림없이 자기가 대한민국의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자리를 얻을 것이라고 대학 교수 생활 하면서 모은 수십억 원의 돈을 줄 서는데 갖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대통령이 되셨답니다. 이때나 저때나 나한테 무슨 연락이 오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연락이 없고 그래서 화병이 생겼답니다. 이제는 다 시간이 지나갔단 말입니다. ‘내 인생은 도대체 이게 뭔가?’ 그래서 화가 나서 미국 조카네 집에 지금 쉬러 왔다고 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만약 그동안의 내 정력과 재물 이런 것을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 위해 거룩하게 사용했다면 지금쯤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의 삶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동역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보고 ‘저런 어리석은 사람들! 아니, 돈 한 푼 없는 바울에게 충성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사실 얻을 게 없이 오히려 소비요, 희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왜 그가 하는 일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놓았는가? 아마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시대에 사업 잘해서 잘 먹고 잘 살고 끝났다면 그것과 지금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거룩하게 지구상에 나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많은 설교자들의 예화 거리로 설교의 주제 인물로 등장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편이 되시겠습니까?

그 다음에 바울 동역자 또 한 사람이 13절에 나타납니다.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많은 문안자 가운데 이 두 군데에 강조를 두었습니다. 이것도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머니라고 하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관계보다 가장 진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TV 방송 뉴스에서 두 어머니의 희생을 보았습니다. 한 어머니는 비탈진 길에서 아들이 탄 자동차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자기 몸을 던져 막으려고 했다가 아들이 탄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또 하나는 불타는 집 안에 아이가 있는 것을 구하러 불 속으로 뛰어들어 불에 타서 숨진 어머니,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라는 표현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나를 낳아 길러주신 육신의 어머니 외에 내가 진정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의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40년이 넘도록 목회하면서 수만 명의 교인들과 접촉을 하고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협조한 사람이 있고 나름대로 좋은 관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지만 실제로 내 마음 속에 사도 바울과 같이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편의상 “주 안에서 부모, 형제, 자매된 자들이여!”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관계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인가? 이 어머니는 루포라는 아들과 알렉산더라는 아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남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잠시나마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의 아내를 보고 지금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이 집은 잠시나마 예수님을 대신해서 지고 갔던 십자가 그것 때문에 온 집안이 그때부터 예수를 믿고,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바울에게 진정 어머니 역할을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똑같은 동역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독신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는 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여!” 혹은 “디도여!”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이러한 거룩한 명분의 희생적인 동역자 관계로 세계를 복음화시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성경을 써서 후대에 남기지는 못합니다. 또 그 당시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었던 그 사람들과 같이 목을 내놓고 어머니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고록이 가르치는 가장 거룩한 신자의 사명에는 피차 거룩한 문안도 있어야 하고 거룩한 입맞춤도 이루어져야 됨을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영적 교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 때 내 믿음의 인생 여정에 문안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고, 바울과 같이 넉넉한 그런 회고록은 남기지 못해도 내 인생 회고록도 바울의 회고록과 같이 남길 수 있는, 또한 다른 사람의 회고록에 내 이름이 아름답게 들어가 기록되는 거룩한 명분의 동역자 관계, 이것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피차 문안하고 피차 아름다운 관계로 주님의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 이 땅에서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살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챤으로서 훌륭한 것인가? 말씀 가운데서 갈 길의 방향을 정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훌륭한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동역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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