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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은 양 이야기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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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 이야기
누가복음 Luke 15:1-7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Now the tax collectors and "sinners" were all gathering around to hear him.
But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muttered, "This man welcomes sinners and eats with them."
Then Jesus told them this parable:
"Suppose one of you has a hundred sheep and loses one of them. Does he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open country and go after the lost sheep until he finds it?
And when he finds it, he joyfully puts it on his shoulders
and goes home. Then he calls his friends and neighbors together and says, 'Rejoice with me; I have found my lost sheep.'
I tell you that in the same way there will be more rejoicing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rsons who do not need to repent.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어떤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양이 100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양은 각별한 양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양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양이었습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골짜기를 헤매고, 들판을 건넜습니다. 산을 타고 넘었고, 숲을 지났습니다. 드디어 그는 바로 그 양을 찾아내었습니다. 끌어안았습니다.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모두 사회에서 배척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의 지도층에 속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과 친구가 되었다. 함께 음식도 먹는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비유가 오늘 나눈 “잃은 양”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잃은 양’은 곧 죄인들과 세리들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이란, 저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일종의 풍자(諷刺)입니다. 비꼬는 뜻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저들이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도리어 우스갯거리로 삼으신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1. 아흔 아홉 마리나 되는 양을 버려두고 길을 떠난 목자의 심정은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 있었습니다.
2.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이 결코 주지 못했던 기쁨이었습니다.

비유는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모든 비유는 꼭 하나의 메시지만 품습니다.
이 비유에서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인격”을 운운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잃어버린 양과 목자, 누가 그 헤어짐의 책임이 있는가? 이런 질문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포인트를 잡아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멸시 당하는 죄인들과 세리들을 사랑하신다.
      저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저들을 구원하시고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에 사로잡히신다.”

잃은 양을 찾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여는 자리, 이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아 나서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었던 것을 회복하는 비유”가 세 개나 등장합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 탕자

이 모두는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복하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잃어버린 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 되십니다. 우리를 찾아 나서, 잃어버린 우리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차원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1. 우리 스스로가 잃은 양입니다.
      2. 우리 이웃이 잃은 양입니다.


1. 우리 스스로가 잃은 양입니다.

어떤 늙은 늑대 한 마리가 양치기를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겠지요. 내가 당신의 양을 모두 잡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올해에 나와 흥정을 합시다. 만일 나에게 올해 여섯 마리를 내어준다면 당신의 양떼에 접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키느라고 밤샘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섯 마리라고? 그건 내 양을 모두 합한 숫자 아닌가?”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한 마리를 깎아 드리지요. 다섯 마리는 어떻습니까?”
“농담하시는군. 나는 그렇게 많이 줄 수가 없어요.”
늑대는 흥정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네 마리는 어떻습니까?”
양치기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안돼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그러면 세 마리는?”
“그것도 안 돼요.”
“내가 큰맘을 먹고 많이 양보하리다. 두 마리. 이제 그 아래로는 내려갈 수가 없어요.”
“안 돼.”
늑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아무래도 천국에 가려나 봅니다. 한 마리로 하지요. 단 한 마리로 만족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양치기는 손을 허리에 갖다 대면서 말했습니다.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단 한 마리도 안 돼. 네놈에게 내 귀여운 양 누구를 준단 말이냐? 내가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망을 보아서라도 지킨다. 너 같은 녀석에게는 단 한 마리도 보낼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늑대와 양치기”라는 독일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 이야기”와 사뭇 다르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 예수님께서 양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우리를 목양하시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잃은 양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여기 우리 교회에서 한 사람을 늑대에게 주어야 한다면, “그게 바로 나일 것이다!” 라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씀을 거역하고, 은혜를 저버리고 살아온 모든 모습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 30년쯤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새벽송을 돌던 때 이야기입니다. 산길을 오래 걷다 보면, 별별 무서운 이야기가 돌곤 합니다. 그런데, “맨 뒤에 가는 사람 하나를 마귀가 데려간다!” 그런 해괴한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맨 뒤에 서지 않으려고 하다, 등불을 들고 눈길을 뛰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새곤 했지요.

스스로 돌아보면, “나는 모든 크리스찬 중에 맨 끝에 서서 걷고 있지는 않을까?” “나야말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이 안 될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건 하나님을 버린 죄에 대한 벌이 아닐까?”

모든 일이 잘 풀려도 걱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왜 이래. 폭풍전야(暴風前夜) 아니야?”
불안에 불안이 계속 따라붙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십시오. 그럴 때, 그런 자괴감에 빠지고 말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단 한 마리도 마귀에게 양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한 마리라도 양보하실 생각이셨다면, 그렇게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셨을 리가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단 한 명의 생명도 마귀에게 양보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 중에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생명을 마귀에게 넘겨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주었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미루어 주님을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전에 나온 여러분. 금문인 여러분. 여러분은 잃어버린 양임에 틀림없습니다.

      1. 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2.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3. 읽는 성경이라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근사해 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 돌이켜 보면, 정말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실까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그저 ‘죄인’입니다.
이런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안녕 친구여 곰곰히 생각해봐 그대는 지금 자유로운지
안녕 친구여 감추지 않아도 돼 애써 웃는 모습 안보여도돼
구원받은 몸이라 안심하고 있었나 끊임없이 생기는 어둔 죄 감춰둔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는데 친구 넌 그뜻을 진정으로 아는가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어둔죄로 아파 하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아버지 기다리시는 그 곳에
안녕 친구여 생각해 보았는가 정말로 천국 갈 수 있는지
안녕 친구여 세상 떠나 갈 때에 칭찬하는 하나님 뵐 수 있는지
마음속 깊은곳에 하나님이 계신가 희미한 예감으론 평안을 얻지못해
예수님 알기위해 얼마나 고민했나 아직도 이세상을 그렇게 기대하나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어둔죄로 아파 하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 곳에

우리 자신이 잃은 양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방황하였습니다.

주님 보실 때, 나는 잃은 양이 아닌가?
주님이 필요한 사람 아닌가?
길을 돌이켜야 할 사람 아닌가?

날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성찰(省察)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야 합니다.

커피를 앞에 놓고, 묵상하면서 성경책을 펼쳐 읽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지난 수 천 년 동안 인류가 사랑하고 읽어온 책입니다. 이 책에서 모든 은혜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인류의 문화는 이 성경책 위에 건설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말씀 위에 세워진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말씀으로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이 잃은 양을 찾으시는 참 목자 되신 우리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2. 우리 이웃이 잃은 양입니다.

예배는 잃은 양과 함께하는 즐거움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도 그 즐거움이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전도서 4:1-3

최근 나는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을 다시 꺼내들게 된 동기는 을유문고에서 낸 <다산논총>의 앞 몇 페이지를 읽다가 얻은 충격이었습니다. <전론>이라 하여, 밭에 대한 논의가 그 첫 머리입니다.

      밭 열 뙈기를 가진 사람이 있다. 자식이 열 사람인데, 한 사람은 세 뙈기를 차지하고, 두사람은 두 뙈기를 차지하고, 세 사람은 한 뙈기씩 차지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차지할 것이 없어 부르짖으며 동동거리다가 굶어 길바닥에 쓰러져 죽게되면, 그 아비 된 사람은 남의 부모 노릇을 잘 한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창조하시고, 전지(밭)를 두어서, 생산하여 먹고 살도록하셨다. 그런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세우고, 수령을 두어 백성의 부모 노릇을 하며, 그 살림을 고르게 마련하여 다 함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임금과  수령 된 사람은 팔짱만 끼고 여러 자식이 서로 치고 빼앗아 제것으로 만드는 것을 눈여겨 보면서도 금하고 단속하지 않아서, 건강한 자는 더욱 차지하고, 약한 자는 밀침을 당해 넘어져 죽게 한다면, 그 임금과 수령 된 자는 임금과 수령 노릇을 잘한 것일까?

나는 목회자로서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정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다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반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떼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입니까? 가장이라면, 가정의 식솔들을 하나하나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영적인 바른 삶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고 있습니까?

2006년 3월 19일자 LA 타임즈(Los Angeles Times) 제1면 톱뉴스입니다. 스탭 기자 에드문드 샌더스(Edmund Sanders)가 쓴 타이틀은 이렇습니다: “In Bad Times, Girls are an Asset: Child marriages rising with Kenya's drought.” (위기의 때 여자들은 재산이다: 케냐의 가뭄에 늘어나는 어린이 결혼들.) 이어지는 기사를 요약 발췌 소개합니다.

쿄로고(Soitanae Ole Kyologo, Kyoilgo?)는 그의 보물인 소들이 가뭄으로 죽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50마리의 소떼 중에 겨우 두 마리만 살아남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급박해진 그는 부의 유일한 자원에 눈길을 돌렸다: 올해 여덟 살과 아홉 살 된 두 딸들이었다. 올해 47세인 마사이(Massai) 족 출신의 이 아버지는 두 딸들을 지역의 남자들과 결혼시키기로 했는데, 그가 대신 받을 것은 한 아이 당 세 마리의 소와 담요 몇 장과 현금 얼마였다.

이것은 동부 아프리카를 강타한 가뭄으로 생겨난 슬픈 이야기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수백만 명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케냐에 있는 어떤 어린이 보호기관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어린이들 수가 크게 늘고 있다고 했다. 대개는 잃어버린 가축으로 인한 재산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특히 마사이 족에서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 남부 케냐 시골 지역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딸들의 미래를 신부지참금(bridal dowries)를 보고 팔아넘기고 있는데, 그런 아버지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홉 살 난 팀피안(Timpian Soitance)이 말했다: “가뭄 때문에 저의 아버지는 제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나를 어디 보내 버리려고 해요.”

그 여자 아이들이 결혼 전에 실시하는 여성할례를 받기 3일 전에 경찰은 이들을 부모로부터 격리시켰다. 팀피안(Timpian)과 그녀의 동생 수야(Suya)는 결혼이나 소년이라는 몇 개의 단어를 듣자 낄낄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수야가 말했다: “저는 결혼하기에 너무 어려요.” 겨우 인형 사이즈의 손가락으로 당황스런 웃음을 가리며 웃었다.

소이탄스(Soitance) 씨는 시내에서 야간경비로 매달 70불을 번다. 그러나 그의 주 수입은 소들이다. 우유, 고기, 그리고 피까지 얻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소는 전부입니다.” 마사이 문화에서 한 남자의 자존심과 아이덴티티는 몇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조기결혼과 여성할례를 금지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위들은 널리 시행되고 있다. 특히 마사이(Masai)족 같은 부족에게서 많이 발생한다. 유목 생활하는 그들을 법으로 통제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어린이 보호기관은 작년 가을의 가뭄으로 어린아이 결혼이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작년 12월의 가뭄으로 케냐, 에디오피아, 소말리아, 그리고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적어도 6백만 명이 위기 중이다. 이번 4월 우기 때도 충분한 비가 예상되지 않는다. 비상식량이 긴급하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다.

카즈이아도(Kajiado)에 있는 아프리카 교회 소녀 보호소(African Inland Church Girls Rescue Center) 책임자 낭구래이(Nangurai)는 “어린 소녀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아버지들은 딸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릴 만큼 성장하기 전에 결혼시켜 버리려고 한다.” 낭구레이와 정부 관련기관 종사자들은 지난 달 얼마나 많은 조기결혼이 이뤄졌는지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올해 아홉 살 난 나이페이(Naipei Melita)는 아버지가 자기를 60대 남자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도망쳤다. 3년 전, 오히려 덜 심각한 가뭄 때, 그녀의 언니가 열 살의 나이로 소 다섯 마리와 얼마간의 권리를 받고 시집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다른 언니는 그 같은 운명을 피해 가출해 버렸다.

LA 타임즈는 이 기사에 일요판(Sunday Preview)의 거의 한 페이지를 다 할애했습니다.

전쟁의 소문이 꼬리를 뭅니다.
      이라크
      북한
      콜롬비아

세상에서 학대를 당하는 사람들, 그들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오죽하면 저런 고난을 받나? 받아도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보아서는 결코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죽을 가운데서 살리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하루를 살아도 그렇게 삽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살리는 것”입니다.

실망한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립니다.
세상일에 탐닉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의미 없는 삶에 시간 보내는 사람에게, 참된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길을 잃었느냐?
비난하고, 욕하는 대신, 우리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지난 한 주일 어간에 세 차례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면 모르겠습니다.
아니라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떠날 세상을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가장 지혜롭게 살았구나!” 평가하실 일을 해야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단 한 마리의 양도 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Alan J. Pakula가 감독하고 각본과 제작까지 맡은 영화,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는 1982년에 나왔습니다.

메릴 스트립이 역할을 맡은 소피 짜위스토스카(Sophie Zawistowska)는 아버지와 남편을 나치에게 학살당합니다. 소피 또한 레지스탕스와 연결되었다는 죄목으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습니다. 소용소로 끌려가는 도중,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어떤 독일군 장교가 접근합니다. 그리고 두 아이 중 한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선택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두 아이는 끌려갑니다. 아이들이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발버둥칩니다. 여기서 소피는 소리 지르며 부르짖지요. “Don't make me choose!” 말하자면, “나는 선택할 수 없어요. 어떻게 그걸 해요?”

그러다가 아이들이 골목 저 끝으로 끌려 돌아가는 순간, 딸을 지목합니다. “그러면 저 애를 데려가세요!” 소피는 끌려가는 딸을 보면서 오열합니다. 영화의 후반부, 주인공 소피는 자살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나는 미국에 온 초기, 거의 20년 전에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어가 잘 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선명하지 않고, 또 제법 오래 되었기 때문에 흐름이 가물가물하지만, 아이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지점에서 몸부림치던 메릴 스트립의 연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 이후, 회복되지 못하는 고통으로 자살할 때까지 이어지는 지난(至難)한 삶의 여정을 기억합니다.

이 영화로 메릴 스트립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이 정말 연기를 잘 했습니다. 그녀는 본래 연기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그 역을 맡았다면, 어느 정도의 연기력을 인정받을 만큼 감정이 몰입된 연기를 했을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둘 중의 한 아이를 선택해야 하는 고통.
우리는 누구나 이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소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생은 잔인한 명령을 우리에게 내립니다.
소리쳐 외칠 수밖에 없는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Do not make me choose!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공부 잘 하는 딸을 희생시킨 가정이 많았습니다.
맏아들을 위해 나머지를 희생시킨 가정도 있습니다.

우수한 두 명의 학생 중에 한 명에게만 장학금을 주어 유학 보낼 수밖에 없던 교수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능력’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교수가 임의로 정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교수는 일평생 죄의식을 벗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절망하고 분노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것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38선을 넘을 때, 교인 몇 사람만 골라서 배에 태우라는 선장의 말에 절망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때 강 저편에 남겨둔 교인들의 울부짖음을 평생 기억하며, 그때마다 괴로워하고 울부짖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그때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에 대한 후회와 참회가 가득합니다.
특히 그것이 “자녀”가 되었든, “교인”이 되었든, “학생”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부하직원”이 되었든, 사람 선택 문제에 이르러서는, 일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의 흔적으로 남습니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장남이라는 이유로
      머리 좋다는 이유로
      예쁘다는 이유로
      같은 고향이라는 이유로
      동족이라는 이유로
      밥 한끼 같이 먹었다는 이유로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런 이유가 주는 명분(名分)은 점점 그 색깔이 바래고, 죄의식만 차 올라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인격은 누구나 같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몰랐는데 시간이 갈수록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동향이니, 동창이니, 그런 것은 정말 아무런 소중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더욱 더 절실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모든 것을 버려두고 길을 떠나신 사실,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는, 우리의 지나간 날들이 모두 “죄”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죄를 짓는 다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 받는 것은 얼마나 필요하고 또 필요한 일일까요?

나는 금문교회의 목회에서 보람을 느껴왔습니다. 앞으로의 목회에서도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주님께 인도하게 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빌고 또 빕니다.

내가 아는 금문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교회입니다.
나는 금문교회 성도 단 한 사람도 내어줄 수가 없습니다.
지키고 지켜, 모두 구원 얻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누구를 잃어버리고, 그로 인한 고통으로 시달리는 그런 나의 인생은 꿈꾸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 그가 참 목자입니다.
지극히 작은 성도 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그리스도인, 그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금문교회를 “영적인 베이스 캠프”(spiritual base camp)로 삼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아름다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배운 사랑과 여기서 얻은 은혜로써 인생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1.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인생의 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천국에 갈 수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우리는 호시탐탐 노리는 늑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는 늑대와 타협을 거부하였습니다. 전면전쟁입니다.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이 긴 밤을 지나보내고 나면,
우리 주님께서 준비하신 ‘새벽’이 옵니다.
지나간 밤의 고독과 고통을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참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까닭은
우리가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생명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이 모든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목자를 생각해 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여는 그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생각합니다.
먼저는 우리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도 그렇게 빛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왕에 잃어버렸던 양들을 ‘회복’할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기회’입니다.
늦었지만, 아주 늦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시간, 경제, 학문, 그 모든 것을 동원해서, 주님 만나뵙기 이전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회복”하는 일입니다.

      1. 잃은 양 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님께 나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2.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만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화해합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습니다.
      용서. 이것은 “보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주여,
저에게 이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생명 다 하기 전에, 이 기도를 들어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기도

은혜의 주님. 감사드립니다.
오늘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진리와 사랑으로 저희들의 인생의 잔을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 간구 드립니다.
생명을 얻은 기쁨을 안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게 하옵소서.
네가 죽도로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의 음성을 날마다 묵상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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