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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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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비유를 소개합니다.
대개 예수님의 비유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이 비유에서는 '나사로'와 '아브라함'이라는 실명이 나옵니다.
흔히 이 비유를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정반대 되는 삶과 죽음'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9-26절에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운명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27-31절에서는 부자가 지상에 있는 자기의 다섯
형제들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하나로 종합되어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부자와 거지 나사로: "상반된 삶과 역전된 사후 세계"(16: 19-26)
먼저 19-26절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어떤 삶을 살았고,
죽은 후에 어떻게 운명이 뒤바뀌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의식주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의 생활 수준은 대개 그가 누리는 의식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알부자 중에서도 검소한 사람들이 많지만, 대개 부유한 사람은
값비싼 옷을 입고 맛난 음식을 먹으며 좋은 집에서 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부자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 사람이
입는 옷, 먹는 음식, 사는 집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호의호식하는 부자>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절에 보니까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자색옷은 대제사장들이 입은 옷이기도 했는데 그 당시
귀족과 왕족들이 주로 입었던 최고급 옷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수입해온 최고의 옷감으로 만든 명품 의상을 입었다는 말이지요.
오늘로 말하면 기성복이 아니라 앙드레 김이 만든 몇 백 만원,
몇 천 만원을 호가하는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속옷도 아주 편하고 가벼운,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 다음에 부자는 호화롭게 연락했습니다.
19절에 보면 날마다 연락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자는 이틀이 멀다 하고 최고의 산해진미를 동원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벌써 음식 담는 그릇들이 해외에서 수입해온 최고의 그릇들이었습니다.
음식도 매일 메뉴를 달리 해서 그 당시 최고 요리를 풀 코스로 먹었을 것입니다.
잔치자리에 술이 떨어질리 없기에 잔칫상에는 최고의 양주들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자는 사는 집이 달랐습니다.
20절에 보면 부자가 사는 집은 대문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평민들은 울타리 없이 초가집에 살았는데 부자는 대문이 딸린 집에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수십 억을 호가하는 초호화판 저택에서 살았다는 것이지요.

<개도 업신여기는, 거지 나사로>
부자가 이와 같이 날마다 최고로 호화스러운 향락을 누리고
있었을 때 부잣집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부자가 그 당시 최고급 옷이었던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었을 때
그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해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을 정도였습니다.
아마 간신히 부끄러운 데나 가릴 정도의 겉옷만 걸쳤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부자가 날마다 최고의 산해진미를 먹고 있었을 때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영락없는 거지 중에 상거지였지요.

부자가 초호화 저택에서 살 때 나사로는 집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리 밑이나 산 속에 움막을 만들고 살았던 걸인이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불쌍하고 더러운 몰골은 심지어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는 표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사로는 개들조차도 업신여기는 가난뱅이였습니다.

<역전된 사후 세계의 운명>
지상에서 이와 같이 정반대 인생을 살았던 두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음 앞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합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부자나 가난한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나 권세 없는 사람이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니 부자도 죽었고 거지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부자는 돈이 있으니 최고의 장례식을 치러
'좌청룡 우백호'라는 최고의 명당 자리에 묻힌 것 같습니다.
나사로는 일가친척도 없지 돈도 없지 하니 장례식도 제대로 못 치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경우에는 죽자마자 천사들에게 이끌려 곧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장례식도 번번이 치르지 못하고 단박에 천국으로 들려 올라 간 것이지요.

이제 두 사람 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그 운명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려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음부(Hades), 즉 지옥불에 들어가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방에 화염이 소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니 얼마나 목이 말랐겠습니까?
그래서 24절에 보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소리를 질러 부탁합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부자가 천국에 있는 나사로를 자기에게 보내서
자기의 목 좀 축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지요.
여기 보면 부자는 죽어서도 변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사로를 심부름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 목이나 축이기 위하여 자기 맘대로 써먹을 수 있는 하인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 이런 부자의 부탁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뭐라고 응답합니까?
25-26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 도 없게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지나온 땅의 생활을 한 번 되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지상에서 부자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후에서만큼은 두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지상에서 고생했으니 천국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고,
부자는 지상에서 호의호식했으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양쪽이 서로 왔다 갔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참 놀라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큰 간격이 있어서 부자 쪽에서 나사로 쪽으로 갈 수도 없고,
거꾸로 나사로 쪽에서 부자 쪽으로 옮겨갈 수도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서로 오갈 수 없는 간격으로 가로 막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건널 수 없는 간격은 사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생전에도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간격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자가 왜 지옥불에 들어갔습니까?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입니까?
그가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는 말은 없습니다.
또한 본문 말씀 그 어느 곳을 살펴봐도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학대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업신여기고 구박했다는 말이나 자기집 대문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한가지, 부자의 결점이 있다면 자기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최고의 옷을 입고 최고의 음식을 먹으며 최고의 집에서
날마다 최고의 잔치를 누리며 사는 동안, 자기 집 대문밖에는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들판에 아무렇게나
뒹굴며 사는 최고의 거지 나사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처음 본 것은 죽은 다음이었습니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23절). 

두 사람이 똑같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부자는 나사로와 같이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만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천국과 지옥의 간격이 생긴 것이 아니고 이 땅위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다른 스타일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자나 거지
나사로는 서로 담을 쌓고 양쪽을 왔다 갔다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사후에는 나사로가 천국에, 부자가 지옥에 각각 들어갔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자가 천국에, 나사로는 지옥에서 각각 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지상에 있는 동안 매일 천국에서 사는 부자가
매일 지옥에서 살고 있는 나사로에게 관심이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토록 불행하고 그토록 가난한
사람이 자기집 대문밖에 있는 줄을 몰랐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말하려는 핵심 주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자의 잘못은 그가 적극적으로 거지 나사로를 업신여기고 학대한데 있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자는 나사로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습니다!
부자가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거지 나사로를 학대했다면 그것은 큰 죄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거지 나사로의 존재에
귀와 눈을 감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그 못지 않은 큰 죄입니다!
여러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이 무의식적인 죄, 소극적인 죄,
수동적인 죄, 즉 무관심하고 간과하는 죄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존 도나휴(John Donahue)는 "부의 가장 큰 위험성 중에
하나는 '눈을 가리게 하는데'(blindness) 있다."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자기 자신의 부와 향락에만 도취해 살다보니 부자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바로 자기 집 문밖에 개만도 못한 인생을 살아가는
거지 나사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부' 그 자체가 죄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부에 탐닉하게 될 때 눈과 귀가 멀어져서 하나님과 고통 당하는
이웃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도록 만드는 부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2.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회: "천국이냐? 지옥이냐?"(16: 27-31)
이제 이 비유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부분은 두 번째 부분, 27-31절입니다.
부자는 사후에 자기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절망적인 대답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살 때 자기가 거지의 고통에 한 번도 관심 기울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천국에 있는 거지 나사로 역시 부자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건너와 자기 목에 물 한 모금
찍어 넣어주는, 그 쉬운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아, 이것은 지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집 안방에서 조금만 밖으로 걸어나가도 거지 나사로를 만나서
그에게 작은 자비를 베풀 수 있었을 텐데, 그 쉬운 일을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지상에 있을 때 자기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골이 패어져 있었던 것처럼,
이제 하늘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살아 있는 다섯 형제들을 염려하는 죽은 부자>
부자는 이제 사후에 결정된 자신의 운명을 도저히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상에 있는 자기의 다섯 형제들의 운명을 염려합니다.
자기처럼 살아 있을 때에는 얼마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었는데 바꾸지 못해서
죽은 뒤 자기가 당하는, 다시는 역전시킬 수 없는 지옥형벌을 지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만큼은 당하지 않게 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도 이 부자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누구라도
이런 진실을 자기에게 미리 말해주었더라면 여기 지옥에
오지 않고 천국에 갔을 텐데, 하는 회한이 밀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아주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27-28절 말씀을 보세요.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에게는 아직 살아있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어 천당과 지옥에 대하여 생생한 증언을
하게 해서 자기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자기는 이미 기회가 지나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지만 자기 형제들은
아직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미리 경고를 해달라는 것이지요!

<성경을 듣지 않는 사람은 부활한 사람의 말도 듣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부자의 부탁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참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29절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나사로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세, 즉 율법의 말씀과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 말을 들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이 율법서와 선지서인데, 한 마디로 말해서
지상에 있는 다섯 형제들은 성경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청종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지옥에 안 갑니다.
여러분, 그런데 부자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30절을 보세요.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아마도 부자는 자기 경험을 빗대어서 이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도 지상에 있었을 때 모세의 율법도 알고 선지서도 알았지만 실천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성경 말씀만 들어서는 땅에 있는 다섯 형제가 마음을 고쳐 먹기
어려우니 거지 나사로와 같이 죽어서 천국과 지옥을 아는 사람이
다시 살아 나가서 이야기를 해주면 틀림없이 들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 그런데 아브라함의 대답이 중요합니다.
31절 말씀을 보세요.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미 성경에 가난한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다 말씀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가서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나사로의 이야기도 듣지 않을 것이고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말씀하셔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는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모든 내용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잘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사로가 가서 이야기를 해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돌아와 외친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쇠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 힘껏 외치신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듣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꿰뚫는 말씀이지요! 

3. 우리의 자화상: "부자? 거지 나사로? 다섯 형제들?"
이제 이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공들 가운데 누구와 똑같은 사람들일까요?

"부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중에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처럼
호의호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교인들을 보면 큰 부자가 없고 거의 다 보통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우리를 일치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
우리 교우들 중에는 가난한 분들이 더러 있지만 도저히 나사로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남들 어려운 만큼 어려운 정도이지 끼니를 거르고 구걸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와 우리 자신을 일치시켜야 할까요?
"다섯 형제들," 즉 얼마든지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을 기회가 있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 비유는 아직 살아있는 다섯 형제들이 들으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청자(聽者)는 14절의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너무 물질적인 부에 집착하여 이웃에 대해서
눈과 귀를 감는 것을 경고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지요.

불쌍한 이웃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의식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학대하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부지중에 무의식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무관심하고 간과하는 것도 죄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웃에 대하여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듣지 않는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 사람의 이야기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듣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운명은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당장 바꾸어야 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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