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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을 정한 다니엘 (단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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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풍자 문학가인 마크 트레인이 쓴 소설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런던의 어느 가정에 두 아이가 태아 납니다. 한 아이는 아주 허름한 빈민의 집에 태어납니다. 톰 캔디라는 아이인데 이 아이는 자라서 소매치기가 되고 거지가 됩니다. 한 아이는 그 당시 영국왕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워드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들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됩니다. 이 거지인 톰이 소매치기를 하고 도망간다는 것이 왕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숨을 곳을 찾다가 왕자 에드워드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걸인 소년과 왕자는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걸인 소년은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번 실 컷 먹어봤으면 좋겠어! 좀 좋은 침대에서 자봤으면 좋겠어.”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거지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너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닐 수 있잖아. 나는 왕궁에 갇혀서 가고 싶은데도 갈수도 없다.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서로 옷을 바꾸어 입기로 했습니다. 왕자는 거지행세를 하고 거지는 왕자 행세를 했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옷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자 옷을 입은 거지는 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 신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누가 더 힘들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 거지가 된 왕자가 더 힘들겠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왕자가 된 거지가 힘들거야.”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문제는 왕자가 된 거지입니다. 밖에서는 아무렇게나 생활을 했는데 손을 씻어야 됩니다. 예의를 지켜야 됩니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시간대로 규칙적으로 생활을 해야 됩니다.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똑 같다고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신분적으로 거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자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왕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과거의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술집 앞을 지날 때면 목이 칼칼한 것입니다. 옛날 먹던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과거의 언어,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왕자가 된 거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생활의 적응해야 되는데 적응이 힘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왕자의 삶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과거의 본능이나 하고 싶은 데로 살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무엇으로 결정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삽니다. 누가 치마를 미니 스커트를 입으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롱 커트를 하면 롱 커트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면 나도 해야지 하며, 유행과 세속주의를 따라 갑니다. 또 한 부류는 집단의식에 끌려갑니다. 사람을 나눌 때 내편을 나눕니다. 네 가 아군이냐 적이냐를 나누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내 그룹에 속하면 아무리 틀려도 옳은 것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편이 아니면 틀린 것입니다. 꼭 정치인들의 모습 같습니다. 그룹의식, 갱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어디 출신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를 묻습니다. 이것도 저속한 문화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을 자신의 이익에 둡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 봉사도 이익을 따집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런 것” 딱 잡아뗍니다. 가려서 합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물질에 대해서 아주 사리가 밝습니다. 때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따라 갈 때가 많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들은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행동합니다. 남들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선이고 정의이면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입니다. 흑인들을 노예로 불이는 것 이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고 그 악과 싸웁니다. 동족 간에 남북이 전쟁을 하더라도 선을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좀 더 발전된  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기준할 때 거기에 따라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가 되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라야 합니다. 내 모든 가족이 반대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나 혼자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물어야 합니다. 누가 의견을 이야기 하느냐? 누가 주장하느냐?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로 결정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살았던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7C 에 남 왕국 유다 출신입니다. 그 당시 남 왕국 유다는 18대 여호야김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친 애굽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바벨론과 애굽이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바벨론이 승리했습니다. 애굽을 후원하던 유다가 미움을 샀습니다. 바벨론은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던 왕족들과 귀족들, 성경에 보니 흠 없고 잘생기고 똑똑한 소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똑똑한 사람들을 다 데려가서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에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니까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자신의 신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유대인들을 바벨론화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여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그의 앞에 다가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불행하다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끌려 왔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왕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바꾸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이고, 왕이 입는 옷을 입혔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변질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니엘의 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벨드사살에 벨드는 바벨론의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을 회유시키는 하나의 전략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무엇일까요? 고난과 핍박일까요? 그런데 그럴 때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무장해서 더 잘 이겨내고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그런데 잘 해주고 회유하고 친절하게 해주고 늘어지게 잠자게 해주면 하나같이 신앙이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다 세속주의에 물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다니엘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진미는 우상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율법은 우상에게 드린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엷은 포도주는 마셔도 독주는 마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니엘의 갈등이 주어집니다. 바벨론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왕과 나라가 계속 바뀌었지만 그는 계속 총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만큼 훌륭하고 총명하고 인격이 뛰어났던 것입니다.

포로 생활 중에 다니엘이 총리가 되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인생의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첫째는 그가 뜻을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어떤 뜻을 정했습니까? 더러운 우상 제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서처럼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인생의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분명한 뜻을 정해야 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면 뜻을 정한 곳에 길이 있습니다. 포로 소년에게 이런 특혜와 환대가 주어지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우상 제물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정한다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독립운동을 하려고 뜻을 정하는 분이 있고, 나라를 위해서 뜻을 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갈림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분명한 비전과 목적이 없다면 그는 방황하게 됩니다.

이사야 49장에 보면 “내가 헛되어 수고 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힘만 낭비하게 됩니다. 가야 할 방향이 분명한 사람은 옆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직 목표만 향해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의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 3장에 “형제들아 아직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쫒아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삶입니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그곳에 온 마음과 정신과 시간과 물질을 맞추면 강력한 힘이 들어 납니다. 우리가 안경을 쓸 때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초점이 맞으면 잘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뜻을 정한 사람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위대한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3장 36절을 보면 “다윗은 당시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다가 잠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 7절에 보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분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말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입니다.” 정말 내 인생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 당시의 음식 문화속에서는 어떤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상을 차려주는 주인에게 내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바로가 주는 빵과 고기 덩어리를 떠날 때 그들이 독립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가 주는 그 고기와 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떠나고 돌아설 때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니엘은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래서 바벨론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땅에서 나는 채소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밥 한끼를 먹고 먹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깊은 신앙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내 삶의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일에 분주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약속된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물질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의 하나를 드리는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열의 하나를 돌려드린다는 것은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생각하면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시간을 지키는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물질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운 뜻을 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다니엘이 이렇게 변화된 삶을 위해서는 직접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뜻만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워서 머릿속에서 고래 등 같은 집을 열채를 지었다 부수었다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채도 짓지를 못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진정 변화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 요단강은 그때가 추수철이었기에 물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들이 요단강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물이 줄어들고 마른 땅같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결코 그 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을 믿고 행동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내년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당장 오늘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생각들이 실천되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머무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오늘 다니엘은 자기가 믿는 대로 뜻을 새운 데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환관장에게 가서 “나는 이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행동했습니다. 신앙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수한 은행에서 아주 요직에 부장 한명을 특채했습니다. 부장을 특채해서 환영회를 하는 시간에 전무가 술을 한잔 따라서 부장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때 부장이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무가 화를 내면서 “옆에 있는 이 상무는 장로야. 장로는 술을 얼마나 잘 먹는데. 당신은 집사도 아닌 것이 술을 안 먹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나와는 상관없고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옆에 있던 총재가 “내가 주는 술은 거절하지 않겠지?” 다시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부장이 “주시는 것은 자유이지만 저는 양심상 이것만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부장 오래 일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재의 안색이 변하더니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자내가 진짜네. 나는 자네를 신뢰하겠어. 내가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을 받는데 당신이 진짜네.” 라고 했습니다.  그 후부터 이 총재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이 부장을 불러서 상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행에 중직에 오르고 총재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거꾸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시고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잘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숨기고 다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는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니엘은 자기들을 관리하는 감독관에게 가서 요구합니다. “내가 환관장에게 요구를 했더니 왕이 보고 우리 얼굴이 초췌해 지면 자기가 위험할까봐 허락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내가 감독관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열흘 동안만 저희가 채식을 하게 해주세요. 열흘 후에 우리 얼굴이 초췌하면 왕의 진미를 먹겠습니다. 그러나 저희 얼굴에 윤기가 흐르면 저희를 그냥 채식을 먹게 해주세요.” 그렇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실험을 했는데 어떤 결과가 있었나요.

성경 14절-1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여러분 보세요. 열흘 동안 채식만 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얼굴이 건강하고 윤기가 나고 아름다워 보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실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시고 믿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이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저지게 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던저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비록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풀무불에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신앙의 진가가 있습니다. 그 후로 다니엘 총리를 시기하는 자들이 그를 모함해서 왕 외에 다른 누구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조서를 썼습니다. 다리오왕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지만은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 다음날 다니엘을 모함하던 무리들이 다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일날 문 닫으면 장사 안 되는데?” 가게의 문을 닫고 주일날 봉사하는 사람들 보면 금요일 토요일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유 목사님 지금도 부족한데 십일조하면 우리 다 굶어 죽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진짜 굶어 죽는지. 그래도 망하게 되면 오세요. 돌려 드릴게요. 신앙은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시험해보라.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내게 들여서 내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쌓을 곳이 없도록 붙지 아니하나 나를 시험해 보라.”고 말라기 3장 8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신앙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는 진정한 다니엘의 충성스러운 신앙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 고등학생이 주일이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를 하니까 늘 집에 돌아가면 늦게 됩니다. 그런데 이아이가 고3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이해를 못합니다. 가끔 술을 먹으면 술에 취해서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우리 아이 잡아먹으려고 하십니까? 고3이 교회만 가서 살면 대학은 누가 붙여줍니까?”하고 말을 했습니다. 아이가 이 사실을 알고 왜 목사님께 전화 하냐고 반문을 합니다. 아버지가 “야 이놈아! 네가 우리 집 장남인데 대학도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냐?”라고 말을 합니다. 이 아이가 기도를 하다가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버지 저하고 약속을 하십시다. 제가 주일날은 마음대로 교회에 봉사하고 예배하게 해주세요. 대신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두 달 동안만 시험해 보셔서 제가 성적이 떨어지면 제가 교회를 끊겠습니다. 만약 성적이 올라가면 저의 예배를 방해하지 마세요.” 이 아이가 주일날은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 학교는 매일 시험을 보는데 월요일은 주일날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15등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화요일은 12등, 수요일은 10등, 목요일은 7등, 나중에 토요일은 1등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두 달 후에는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곱절의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학문과 재주에 명철을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20절 말씀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보다 십배나 나으니라.”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는데 다른 박사들보다 10배나 총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내가 정결한 삶을 살겠다.” “믿는 자의 합당한 삶을 살겠다.” “내가 하나님과 약속한 예배시간을 지키겠다.” “내가 주일 성수를 하겠다.” “내가 온전히 십일조 생활을 하겠다.” 한번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뜻을 새우면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거지로 사시겠습니까? 왕자로 사시겠습니까? 여러분 거지의 신분을 벋어 버리세요. 하나님의 자녀의 왕자의 생각을 하세요. 왕자처럼 생각하시고, 왕자처럼 말하시고, 왕자처럼 걸어가시고, 왕자처럼 품위 있게 사세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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