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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하라!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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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하라!
마가복음 7:24-30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가운데 Amazing Grace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
이 찬송가를 작사하신 분은 영국의 '죤 뉴톤'이라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남긴 이야기 가운데 전세계적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나는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랄 것이다.  첫째는 내가 천국에 가서 꼭 볼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없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천국에서 볼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거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두 번째로 놀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내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놀랠 것이다."

저는 이 말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의 교리를 부정하는 어떤 의외성에 대한 증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 믿은 사람이 천국 갈 수 있다든지 혹은 믿은 사람이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그런 의외성에 대한 증언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견상 어떤 사람이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너무 잘 믿어서 천국에서 굉장한 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주님이 '너는 열심히 믿은 것 같았으나 내가 보기에는 별로였다.'  이렇게 아마 책망받을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조용한 그런 무명의 성도처럼 보였지만 천국에서 주님이 너무너무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는 분들도 없지 않아 천국에 가면 틀림없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저는 그런 현상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주변에서 가장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제자들이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가까이서 예수님을 모시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까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다가 우리가 놀라는 장면들은 예수님이 이 대표적인 제자들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나무라시고 꾸중하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의외성의 모습들이 나옵니다.  아마도 복음서에서 예수님 앞에 좋은 믿음, 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대표적으로 칭찬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생각나십니까?  여러분은 백부장이 생각나십니까?

로마의 백부장, 로마에서 파견 나온 군대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 고쳐 주세요."  그런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만 해 주세요.  그러면 내 아들이 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치유를 부탁할 때, 치유의 은혜를 받고자 할 때 일상적인 부탁의 형식은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겁니다.
"예수님, 우리 아들이 아픈데요,  죄송스럽지만 우리 아들 아픈데 까지 와 주세요.  내 아들에게 손을 얹어주세요.  안수해 주세요.  그리고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내 아들이 나을 것 같아요."
이것이 아마 의례적으로 치유의 기도를 부탁하는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 백부장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어떤 절대적 신뢰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말씀만 해 주세요.  그러면 내 아들이 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런 백부장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가 보지를 못했다."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이방인입니다.  로마에서 온 사람, 신앙적인 백 그라운드가 하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이런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가 소위 선민이라고 자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가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또 칭찬받은 사람이 본문에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자입니다.  본문의 기사가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마태복음 15장 28절에 보면 예수께서 본문에 나온 여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식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는, 교회에 나오게 되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게 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식 때문에 예수 믿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식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노력을 해 봤지만 쉽게 해결이 안됩니다.  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 고통하고 있는 자식들의 문제, 인간의 한계를 느끼면서 "하나님 우리 아들 고쳐주세요.  우리 자식을 좀 도와주세요."  그런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식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빌면서 접근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나타낼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커다란 믿음, 아주 존귀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저는 백부장보다도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의 믿음이 더 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의 경우에는 무슨 커다란 기적을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커다란 대우, 커다란 은혜를 받을려고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본문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여인의 유명한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만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 저는 부스러기라도 좋아요. 부스러기라도!"

여러분, 이 여인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 한국말 가운데 너무 절박한 상황과 환경 속에 빠지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이런 심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스러기라도.  그래서 내 딸이 고침 받을 수 있다면, 내 딸이 새 인생을 살 수가 있다면 부스러기 은혜라도 베풀어주세요.  그러나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며 예수님 앞에 나왔던 이 여인은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크나 큰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이야말로 큰 믿음이라고 칭찬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환경, 그리고 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우리도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구할 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 그 큰 믿음, 그 큰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절실한 문제에 대한 응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마다 이 여인에게서 배워야 할 믿음이 있습니다.  큰 믿음,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 그 믿음의 특성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로, 이 여인의 믿음은 불리한 상황의 조건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불리한 환경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누구처럼 예수 믿을만한, 하나님 믿을만한 좋은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믿었습니다.

먼저 이 여인에 대한 소개를 본문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본문의 26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 여자가 어디 여자였습니까?  헬라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수로보니게의 족속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단어의 합성인데 '수리'라는 말은 시리아라는 말입니다.  수리아 지방, '보니게'는 페니키아라는 말입니다.  시리아의 베니게 사람이었다.  그  중에 한 사람, 한 여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두로라는 지역이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라고 했습니다.  두로라는 지역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바다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나옵니다.  그러나 두로는 이스라엘 지경 바깥입니다.  지금 나라로 말하자면 이 두로는 레바논에 속한 도시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같이 있습니다.  일종의 쌍둥이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경 바깥에 아주 가까운 이웃 마을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하고는 아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반 유대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웃에 연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이 지경 사람들을 박대했습니다.  그들을 철저한 이방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이방인의 땅, 어두움의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의 모욕적인 표현이 있다면 '개'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왜 두로 지방에 갔을까?  오늘 본문의 사건에 도달하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을 추적해 보면 예수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싸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규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그들에게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은 잠시동안 휴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 안에서는 그런 휴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예수님은 바깥을 벗어나서 두로 지방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방인의 땅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 이방인의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신뢰했던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을 만난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문자 그대로 하나의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어째서 이방인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수가 있었겠는가?

보십시오.  이방인은 신앙적인 백 그라운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나 핑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우리 집안에는  믿을만한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기에 그의 믿음은 더 순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이 여자가 가지고 있던 불리한 조건은 이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 당시에 이류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여기 사시는, 이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여성 동무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옛날 유태인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두 번째 감사는 하나님,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이 짤막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얼마나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인권이 박탈당하고 천시 당하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를 못 믿을까요?  가끔 전도를 해 보면 '제가 워낙 상황이 어려워서 저는 못 믿겠습니다.'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열등한 조건, 나의 무력함, 그러나 내가 무력하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나의 무지를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지는 않으신가요?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반드시 신앙의 불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올 수가 있다면, 그렇습니다.  내 육체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를 바라고 주님 앞에 나오는 과정이 있어서 예수 믿게 되었다면 내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인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여인은 그런 의미에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믿음에 도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여인의 믿음은 냉소적 거절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님의 응답이십니다.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7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러분, 이것이 허락입니까? 거절입니까?  거절입니다.  거절도 그냥 거절이 아니라 거의 모욕에 가까운 거절처럼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어떤 사람은 흥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할 만 합니다.  적어도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편견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편견의 특성은, 편견은 오래갑니다.  편견은 쉽게 수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편견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국 땅에 뿌리 박힌 끈끈한 지방색의 편견, 그것이 어디 쉽게 없어집니까?  한평생 붙들고 있더라구요.  편견은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여자에 대한 편견, 이방인에 대한 편견, 예수님도 별 수 없이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 후에 대화의 격을 완전히 바꿔서 이 여인에 대해 칭찬하시면서 "야, 당신의 믿음은 정말 위대하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테스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반응하나?  바로 이 테스트의 창에서 이 여인의 순수한 믿음을 예수님은 확인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삶은 테스트입니다.  믿습니까?

인생이 테스트입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인지하거나 말거나, 내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우리의 삶은 테스트입니다.  살아가는 모습,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테스트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이 도청문제, 감청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만은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몰래카메라를 백화점 화장실에도 설치해 놨다고 하는데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내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감시되고 있다. 나는 테스트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모든 것을 피할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삶의 장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낱낱의 사건.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사건.  우리의 인간관계.  이 관계 앞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주님이 보고 있습니다.

삶 전체가 사실은 테스트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이 드러날 수 있는 하나의 창을 오히려 제공하시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합격했습니다.  사실 마태복음하고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의 기사에서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 도와주세요"  그랬을 때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기도 바로 다음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대답이 없습니다.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응답을 거절로 해석합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거절하셨다.'  때로는 '그러면 그렇지.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실 리가 없어'  우리는 스스로를 자조하면서 신앙의 자리에서 쉽게 후퇴해 버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의 속성상 그것은 지속적입니다.  우리가 한번 기도해서 곧바로 응답이 왔다, 그러면 믿고 응답이 안 오면 안 믿는다, 그러면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흥정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회용 자동 기계에다가 동전을 집어넣고 거기서 내가 필요한 콕이나 소다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그런 차원에서 생각할 겁니다.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 계속 믿어야 됩니다.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어서 지금 당장 내가 구하는 그대로를 응답하지 않으실 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아시지 않습니까?  내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고 무엇이 최선인가를 아시는 하나님.

우리는 성경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당장 응답이 나타나지 않아도 계속 믿고 있어야 됩니다.  계속 구해야 됩니다.

제가 사오정 얘기 듣다가 아, 때때로 신앙인들도 사오정처럼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오정 시리즈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어느 날 사오정이 식당에 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먹을 것을 주문합니다.
'돈까스와 우유 주세요.'
그랬더니 주인이 뭐라고 대답을 하느냐 하면, 주인이 '돈까스는 없습니다.'
사오정이 '그래요?  그러면 돈까스와 커피 주세요'  그럽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화가 나서 '돈까스는 없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아.. 알았습니다.  그러면 돈까스만 주세요'  그랬답니다.

이 말을 아예 알아듣지 못하신 분들도 있어요.  그게 바로 사오정입니다.  상대방이 뭐라 그러던 집요하게 계속해서 자기의 메뉴를 고집하는 이 우직함, 이 사오정의 우직함이 신앙인에게도 좀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하십니까?

"하나님. 나, 포기할 수 없어요.  하나님 꼭 주셔야 되요.  하나님. 이것이 제가 단순한 욕심을 위해서 그럽니까?  나의 생존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 그래야 우리 가정이 더 잘 하나님 섬길 것 아닙니까?  하나님 주세요.  돈까스 주세요."

여러분,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나와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집요함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늘이 침묵할 때도 나와서 구하시기 바랍니다.

거절하시는 것 같은 주님, 그러나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절 뒤에 미소를 지으시면서 한없는 연민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계시는 주님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이 시련의 장에 주님 앞에 엎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냉소적 거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믿음 이것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거절같은 음성을 듣고 이 여인이 어떻게 말합니까?  본문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이 여인의 유명한 요청입니다.  28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얼마나 윗트있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은혜 받으려면 이 자존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저는 이 여인의 자세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 저는 이 여인에게 주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그 마음의 바탕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본문을 잘 보시면, 2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뭐라고 불렀습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여'.  한 유명한 성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처음 나와서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부른 사람은 이 여인 밖에는 없었다.

저는 이 여인 속에는 주님 앞에 나오기 전에 예수가 주님이라는 어떤 믿음이 이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여'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그저 병 고치는 분 정도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기 메시아, 자기 삶의 주인, 내 인생을 구원하시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시고 내 인생을 하나님의 기대처럼 빚어 만들 수 있는 나의 구원자, 나의 주님 메시아, 주여.

똑 같은 기사를 마태복음에 보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여자가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표현입니다.  다윗의 자손.  이것은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도록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시다.  이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27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주 중요한 한 단어가 있습니다.  27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외견상, 표면상으로는 거절처럼 들리는 예수님의 말이지만 저는 이 여자의 경우에는 이 말씀을 거절로 듣지 아니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은혜 받으려면 말씀을 자세히 들어야 됩니다.  피상적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주님의 구원사의 섭리는 먼저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속의 복음을 증거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이방 사람들을 제외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의 순서일 다름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러나 먼저 다음에는 복음이 어디로 갑니까?  이방인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아마도 자세히 주의 말씀을 들었을 이 여인은 이 말씀을 붙잡았을 것입니다.  이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입니다.  나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나도 포함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는 이방인인 나도 포함되지 않습니까?"
이 여인은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엎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생활을 가만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은혜 받는 사람들에게 증거가 있습니다.  은혜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붙듭니다.  그리고 은혜 받은 증거도 말씀에 대한 애정, 그 말씀에 대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늘 말씀과 나의 거리. 내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내 가슴속에 다가오는 가, 말씀이 소중하게 느껴지는가, 말씀을 들으면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말씀과 나의 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거리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은혜 받는 사람들을 보면 말씀이 너무너무 좋은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그 말씀이 나의 생명이 되고, 그 말씀이 나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생명으로 다가올 때 그 말씀을 놓치기 싫어서 성경을 가슴에 꼭 안았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의 증거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말씀이 내 말씀으로 다가 오는 겁니다.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나를 붙들고, 나를 지배하고, 나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사람, 그들은 반드시 은혜를 받고야 말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듭니다.  붙들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맞아요.  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주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신 주님,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나도 포함시켜 주세요.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에서 개 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엎드리는 이 여인의 심정, '주님, 부스러기라도 나에게 주세요.'

왜 부스러기를 주겠습니까?
이방인에게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포함시킨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방인을 똑같이 자녀로 삼아 주시고, 부스러기 아닌 가장 놀라운 은혜를 준비하신 주님은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테스트에 합격한 여인, 마침내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여, 부스러기라도,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게 주옵소서."라고 구했던 이 여인에게 주님은 마침내 커다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드디어 귀신에게서 자유를 얻습니다.  가정의 샬롬,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자마다 이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물러가지 아니하면 이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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