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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와 담대한 시작 (느 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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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주부터 시작해서 느헤미야서를 살펴봄으로 믿음으로 이루는 승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라고 하는 한 평신도 행정 관료가 민족의 신앙과 생활의 상징인 예루살렘의 성이 황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금식하고 울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는 나아가서 기도 속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을 소원합니다. 이제는 그 슬픔의 소식을 회개와 금식과 아픔으로 삼지 않고 나아가 새로운 승리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가 곧 예루살렘 성의 관리로 임명을 받아 나아가 예루살렘성의 재건을 주도하기로 마음에 소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관원으로 아닥사스다궁에 거하던 중에 마침내 왕과의 만남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왕과의 대화의 기회 속에서 그는 왕께 소원을 말하게 됩니다. 왕이 그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고 그는 왕에게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부탁 속에 준비를 한 결과, 마침내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여 예루살렘 성벽 수축하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즉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의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에 슬픔 속에 민족의 도성인 예루살렘성이 황폐됨을 듣고 슬퍼하며 근심하다가 마침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소원을 가지게 된 것까지가 지난 주일의 본문이었고 이와 같은 믿음의 출발위에 오늘은 새로운 준비 속에 어려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진행하고 시작의 결단에 이르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2장 8절>에 기록한 대로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라고 기록한대로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도록 왕이 그 마음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 뿐만 아니라 <2장 10절>이하에 나오는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부임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하는 대목 속에서 사단의 세력들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또 그들을 방해하기는 하지만 그들 자체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흥왕의 소식을 대하고 근심하게 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 속에서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떻게 준비하여 어떻게 방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소원하며 그 일을 시작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됐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첫 번째 기도하던 중에 그의 소원을 품게 되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본 <1장 11절>을 보면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느헤미야의 기도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라는 것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궁의 관원으로써 봉직하고 있는 느헤미야는 왕이 자신에게 은혜를 입혀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간청하고 하나님 앞에 소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2장 1절-6절>을 보면 느헤미야에게 그런 기회가 왔습니다. 왕이 보니까 느헤미야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전에 건강하던 느헤미야에게 이와 같은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수심이 가득하느냐?” 이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느헤미야는 자기가 이렇게 근심에 쌓이게 된 배경을 이야기 합니다.
“내 나라 내 민족이 이와 같이 황무케 되어 그들의 가장 중심인 도성이 무너지게 되었고, 그들이 모두 땅에 떨어지는 국운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왕께서 나를 예루살렘으로 파송해주시면 내가 내 민족을 위해서 수고하겠습니다.” 하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장면 속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왕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안색에 수심이 있는 것을 보고 걱정하는 왕, 이 사람은 분명히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수많은 궁중의 관원들 중에서 느헤미야의 얼굴에 있는 수심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라면 왕은 느헤미야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왕의 마음에 안색이 좋지 않음을 걱정할 만큼 신임을 얻고 있었던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왕 앞에서 그의 소원이 있음을 분명히 말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지만 느헤미야는 적어도 자신의 소원을 왕에게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신이 들 정도로 왕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 앞에 말하면서도 주눅 들리지 않고 자기 확신과 신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느헤미야, 결국 이와 같은 느헤미야의 배경이 느헤미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를 소득 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있어지는 지극히 중요한 순간 느헤미야는 인간적인 신뢰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의식하고 진행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니 ‘하나님께 묵도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왜 이렇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냐하고 물어볼 때 하나님 앞에 잠시 묵상하여 기도하며 왕에게 담대히 그 원인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반드시 그 꿈과 소원을 이루게 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는 사람과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와 같은 기회를 놓지는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사람, 심약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을 탓하는 사람, 작은 일하고 큰 수고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주어진 기회도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기회를 분명히 알고 어떠한 생각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받아들입니다.

느헤미야에게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흘렀을 것입니다. 왕이 나에게 물어볼 때 내가 정말 내 어려운 사정이 내 민족 때문에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내게 어떤 기회를 주실 것을 간청할 것인가, 페르시아는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인데 내가 우리나라 민족을 중흥하기 위해 간다하는 것은 왕에게 어떤 느낌으로 보여질까하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한 사명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왕 앞에 자신의 소신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왕에게 담대히 말합니다. <4절>에 ‘하나님께 묵도하고’ <5절>에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에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왕에 대하여 자신이 신임을 얻고 있는 것을 확신하였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왕의 마음이 움직여져 자신이 예루살렘 성으로 파송이 되어 그 성을 중건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그 일을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많은 사람은 생각까지는 하지만, 실행까지는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과 실행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까지 하면 그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하나, 생각과 실행은 전혀 달라요.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당연히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상정해야 합니다. 많은 위험과 갈등의 요소도 있습니다. 현재의 모든 위치를 다 잃어버리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 없는 새로운 시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결이 없으면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머물러 있을 뿐이고 물결을 타고 배는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물결을 파악하여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물러 있고자 해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수고만 생각하지 내 부족과 그 일을 이루기 위한 얼마만큼의 용기와 희생과 수고가 필요한가는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감히 왕 앞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큰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삶의 모험 없이는 아무런 승리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이러저러한 위험 부담을 안고 모험을 행해야 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모험이 아니라 늘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모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부족함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루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일단 새로운 일이라는 것은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고 애씀과 그리고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모든 값을 치렀을 때만 결과가 주어집니다. 이루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 삶이 나에게 야속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거나, 내 능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어리석게도 작은 수고로 많은 기대를 한 것입니다. 의외로 우리 삶은 공평합니다.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우리 삶을 자꾸 패배로 몰아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정직하게 부족과 실패를 인정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과 자신의 부족과 실패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다른 사람 혹은 여건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진보하지만, 다른 곳에서 핑계를 찾으면 우리는 언제나 남을 핑계하고 환경을 탓하고 살뿐입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나아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 그 사람은 이래서 저래서 안됐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것이 우리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심리적인 출구가 되기는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져야 합니다. 내게 무엇이 부족했을까, 내가 어떤 것을 채워야 할까, 내가 이와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담대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무엇이지요?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서 이제 더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말 들으면 정말 난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주 주보에 썼는데 여러분 읽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지도자는 책임지고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고 그 일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다른 이야기로 설명을 드려야 하는데 제가 삶의 반경이 워낙 좁다보니까 이제까지 교회일 밖에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 일을 하다가 일어난 일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데, 저도 이 교회에서 16년째 담임목사를 하다 보니까 저희 교회 교역자가 협동목사님들까지 다하면 거의 40분이 되시는데, 거의 매년 면접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력서 내시면 서류심사하고, 또 면접을 보고, 또 일주일씩 인턴을 하고 해서 오시게 되면 면접을 제가 봐야하는데 그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는 한 세 시간쯤 면접을 하게 되는데 처음 하는 얘기하고 세 시간 지나서 하는 얘기하고 대부분 많이 달라지십니다. 제가 면접을 잘 안 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여러 해 하다보니까 마지막으로 제가 봐야할 때가 생기지 않습니까?

젊으신 목사님들 오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만약에 우리 성도님들이나 학생들을 맡고 있을 때 일을 잘 못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게 되면 어떻게 할 겁니까?” 하면 젊은 목사님 중에 이렇게 씩씩하게 말하는 분이 있어요.
“깨끗하게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그런 교역자가 지금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책임지고 물러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일 년이고 이년이고 교구를 잘 맡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본인은 실컷 연습했어요. 아주 미숙한 분이어서 실컷 연습했어요. 그리고 잘 못했어요.

그럼 본인은 실컷 연습하고 좋은데 나머지 일이 안되고 사람이 다 망가지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어떻게 해서든 제가 부족했던 것을 채우고 제 모든 능력을 더 상향시켜서 제가 부족했던 모든 것까지 다 채워서 잘 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답이 아니겠습니까? 그저 잘 못하니까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건 비겁하게 물러나는 것입니다. 다 망가뜨리고 물러나면 그게 뭐 그리 잘하는 것인가요? 망가뜨린 것도 다 회복시켜 놓고 다 잘 만들어놓고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물러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에요. 내가 망가뜨려 놨으면 내가 다 고쳐놔야 하고요, 내가 잘못 만들어놨으면 내가 다 새롭게 만들어서 새롭게 회복시켜 놓는 것이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요. 나는 실컷 연습했는데 나머지는 다 망가졌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 능력이 부족해서 더는 못하겠습니다.’ 라는 것은 우리들에게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제게 기회를 더 주시면 제가 반드시 최선을 다해서 이전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어놓겠습니다.’ 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죠? 우리는 구구한 설명 할 필요가 없어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이제까지 부족했던 것, 또 내가 잘못했던 것 회복하고 내가 더 잘 하겠습니다,’라는 이런 각오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리에겐 진정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겸손한 마음이며 하나님 앞에 책임지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게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더 맡겨서 안 된다고 하면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그건 정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그 일을 맡은 사람이 할 일이지 본인이 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내게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어려움을 감내하고 하나님 앞에 그 일을 감당하는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해지지요. 어떤 사람이 40일 동안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했어요.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내려오다 보니까 호수가 보이는데 갑자기 호수를 보니까 마음에 확신이 생겼어요. 내가 물위를 걸어갈 수 있다. 여러분 그 사람이 물위에 풍덩 뛰어들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 물위를 걸어가겠습니까, 못 걸어가겠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그러면 호수를 걸어가겠어요, 안 걸어가겠어요?
아니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마음에 확신이 일어났는데 걸어가겠습니까, 못 걸어가겠습니까? 당연히 빠지지요. 그건 객기예요. 믿음이 아닙니다.
왜죠? 호수를 걸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하다못해 물에 빠져있는 사람 구해내기 위해서 막 뛰어간다면 그건 또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도 없는데 물위를 걷는 확신이 있어도 뭐 어쩌겠다는 말인가요? 이건 마치 예수님보고 사단이 광야에서 시험할 때 ‘성전 꼭대기에 데려가서 네가 뛰어내려라 그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너를 받아 주리라.’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 명예심에 불과하다는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뭐라 말씀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건 우리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지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떤 일이라는 것은 과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내 자기만족이나 아니면 내게서 심리적인 출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 나라에 무엇이 소용될까, 이것이 어떤 일이 있을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 아니고 하나님 앞에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에요.

오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 앞에 정말 자기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날아갈 수 있는 이런 순간에도 담대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삶에 대한 마음의 확신이 있었던 거예요. 내가 적어도 왕에게 이런 말 할 때 왕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확신과 은혜를 주셔서 왕의 마음을 변화시키리라. 그는 마음의 확신과 하나님께 대한 기대와 더불어서 그가 그 말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에 뜨거운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지요. 기회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획득하고 확보하여 활용하는 사람과 그 기회를 놓쳐버리는 사람 두 종류가 있을 뿐입니다.

두 번째는 그에게 기회를 획득한 후에 그는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이지요.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목회 구호 가운데도 ‘준비는 철저히’ 라는 사항이 있지요?
제가 보니까 시험에 실수로 떨어지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어쩌다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있어서 한 두 개 더 틀려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실수가 실력이지요? 한 두 개 실수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그 실수 안할 수 있으면 그게 실력인데요. 실수로 떨어지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실수로 붙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왜냐하면 실수해서 붙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실수해서 떨어지는 것은 좀 있는데 실수로 붙는 것은 거의 드문 것 같아요. ‘실수로 3번을 쓸려고 하다가 2번을 썼는데 이게 스무 개가 되어서 내가 합격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결국 사람은 준비한대로 모든 일을 이루게 됩니다. 일 년 준비해서 십년 동안 헤매는 것 보다는 십년 준비해서 일 년에 그 일을 마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실패하는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도록 준비가 부실해요. 삶의 환경과 주변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것에 대처할 내 준비가 부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험문제가 어려워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시험문제를 풀만한 내 능력이 안돼서 떨어진 것이지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만한 내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대부분의 경험입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추게 됩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당연히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될 것을 마음에 확신 받았을 때 왕에게 무엇인가 요청하여 확보하죠.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는 여행 통과권, 예루살렘성곽을 수축할 때 필요한 살림 채벌권,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현지상황을 파악했어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밖에 나가서 현지 상황을 다 파악한단 말입니다. 이걸 읽어보고 뭘 느끼십니까?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이에요. 누구든지 아 내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겠다하면 ‘아, 거기 가서 무슨 일을 하겠다. 아, 이게 필요하구나.’ 느헤미야는 좀 더 용기가 있어서 왕에게 확실하게 담판을 지어서 그것을 확보했고 예루살렘에 가면 누구든지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한 번 살펴보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왜 이게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분 어떤 글을 쓴다고 합시다. ‘이건 내 마음 정리를 하기위해서 글을 쓰는 거라서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을 꺼야.’ 그럼 마음에 있는걸 그대로 쓸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글을 쓰는데 이걸 누구에겐가 보여줄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 합시다. 그때는 어떻게 하지요? 내 마음에 있는 소리를 쓰는 게 아니지요? 내 마음에 있는 소리를 다 쓰되 누군가 이글을 읽고 어떤 느낌과 영향을 받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단 말입니다.

느헤미야서는 다른 사람이 읽도록 쓴 책입니다. 그러면 여기 느헤미야의 행적이 짧은 몇 페이지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예요. 느헤미야의 삶 중에서 중요한 것만 몇 가지 적은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만 몇 가지 적었는데 느헤미야가 이렇게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에 또 부임해서 왜 이렇게 몇 가지 준비한 사항을 굳이 기록했을까?
이 성경을 쓴 느헤미야는 그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중에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요 사항을 기록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읽을 때 그것을 읽고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느헤미야는 준비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러 가지 일중에서 그가 준비했던 이 몇 가지 사실을 이 짧은 성경에서 이와 같이 집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에는 이와 같은 준비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준비 중에 생각의 정리 정돈 및 준비가 매우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생각이 정리되고, 정돈되고, 덜 되거나 부족한 것이 없이 우리 생각이 완비되는 것입니다. 대강 생각하고 실행해서 어려우면 그만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작하는 사람은 많으나 이룬 사람이 적은 것은 결국 기본적인 논리나 위기상황 대책조차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 많아서입니다.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 필요한 심적, 그리고 실제 행동에 필요한 사항들을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심력의 약화에서 오는 것 같아요. 그것은 결국 우리의 믿음의 문제이지요.

<마태복음 8장23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게 됩니다. 풍랑이 일어서 제자들이 죽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쿨쿨 주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깨워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죠?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걸 보면 무서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필요한 거지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우리 인생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은 당연히 있는 겁니다. 어려움은 누구든지 있어요. 문제는 그 어려움의 순간을 헤쳐 나가는 사람과 두려워서 그 가운데 좌절하는 사람 두 종류가 있을 뿐입니다.

요즘 우리 청년들을 가르칠 때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없고 적어도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확신하고 담대하게 어떤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후회하고 자신이 없어서 해놓고도 의심이 들어서 또다시 고치다 결국 망하고 마는 거예요.
적어도 내가 한 생각,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선 나는 책임과 소신을 가지고 여기에 대해서 나는 분명히 확신한다.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나는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으로 나는 기꺼이 기뻐하리라. 부족하면 내가 한 번, 두 번, 세 번도 노력해서 부족한 부분만큼 더 채우리라. 나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늘 후회하지 않고 살아요.
늘 후회하고 사는 사람과 어떤 경우에도 단호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는 생각의 정리가 필요해요. 우리는 우리 마음의 심력을 준비해야 될 때가 필요합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생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일이 있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대처할까를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정확히 계산하되 계산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겁니다. 계산조차 못한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믿습니다’라는 것은 그냥 대강 생각하고 어떤 경우가 되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철저히 계획되지만 그것이 인간이 가지는 한계속의 것이고 그것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믿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준비하면 그 준비가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으면 준비 안 한 사실이 우리에게 꼭 다가와 우리를 난관에 빠지게 합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요. 준비하면 준비한 사실이 필요 없다. 그러면 뭐 하러 준비해. 준비하면 준비한 사실이 필요 없게 돼요. 그런데 준비하지 않으면 준비하지 않은 사실 때문에 꼭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준비하면 준비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능력이 습득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때 능력으로 습득된 것은 어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따라서 준비한 것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요. 이미 준비하는 사이에 우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준비하지 않으면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준비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 능력도 배양될 시기가 없어요. 따라서 우리들에게 준비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모든 것은 늘 어려움으로 닥치는 겁니다.

준비는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능력이 생성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준비하면 준비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예비하면 예비하는 것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예비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능력이 이미 돼 버리는 것이니까요. 혹시라도 예비하는 것을 사용할 때가 있겠죠. 그러면 우리는 힘과 능력이 완벽하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완벽한 준비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힘이 닿는 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그 일을 감당해야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언제나 준비만 하고 살지는 못해요. 준비하며 사는 삶의 시기도 있고 준비한 것을 활용하는 삶의 시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가장 큰 준비는 대처할 마음과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의외로 우리 삶이라는 것은 기술적인 일이라기보다는 의외로 실패와 성격은 심적인 강인함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한 가지 과학적으로 발견하고 발명한다고 합시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한 번에 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여러 번 연구하고 실험하고 고치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 일이 이루어진다고 누구나 생각합니다. 한번 딱 해보았더니 딱 됐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문제는 수없는 실패를 견제한 수없는 시도 속에서 누가 그 수없는 좌절과 낙망을 끝까지 견디고 또 다음을 시도해서 결국 완성하고 그 일을 승리할 때까지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기술적인 문제이전에 그 기술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실패의 반복 속에서 결코 마음에 지루해 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그 일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가는 심적인 강인함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의 준비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힘과 능력으로 우리의 성실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겁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못 믿어서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못 믿어서 믿음이 없어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준비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준비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어떤 일을 준비한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준비하나 그것이 아닙니다. 노력도 성령 충만 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성령 충만해지면 우리는 변화돼요. 그 모습이 외적으로는 어떻게 비쳐지지요? ‘아, 저사람 노력하는 사람이다.’라고 비쳐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우리 생활에 임할 때는 일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우리 삶에는 용해되어서 일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는 일반적인 능력이 상승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우리들에게 유입되어 그와 같은 은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사람이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가 필요해요. 믿음이라는 것은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준비함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운행의 섭리가 이 지상에서 올바르게 운행될 수 있는 거지요.

세 번째는 방해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용기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이루는 승리의 삶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해와 협박과 고통과 위축시킴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위축되지 않는 용기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방해는 준비되고 시작하면서 방해는 동시에 시작됩니다.
느헤미야가 부임하는 소식을 듣고 벌써 산발락과 도비야 일당들은 벌써 그 마음에 준동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하고 있었다고 했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면 사단의 세력은 근심하게 되요. 그리고 그 근심이 구체적인 공격으로 바뀌게 되고 모략으로 바뀌게 되는 거지요.
백성들의 마음을 모아 일을 시작할 때 그들은 비웃고 모략을 합니다. 왕에게 이와 같이 반역하려고 하는가 하는 모략까지 가지게 되지요. 방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동시에 사단의 세력에게는 두려운 것이기도 하지요.
<2장 10절>을 보니 산발락과 도비야 일당은 근심했다고 말하고 있죠. 사단은 우리에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망가뜨릴 수는 없어요. 그러나 위협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 마음에 지레 겁을 먹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를 세우셨어요.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세우면서 그에게 말씀하셨어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라 그리고 하신 말씀이 무엇이죠?
‘두려워하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많은 두려움과 어려움이 여호수아의 마음을 위축시킬까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방해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시작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라고 <2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진행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고 진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현실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허공에 뜬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직시하지만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그 일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속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이 땅에 이루고 사는 사람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계산만 하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리로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머릿속에서 생각만하고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적으로 발을 내딛어 이루는 사람이 믿음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앞에 슬픈 소식을 듣고 마음에 새로운 결심을 하고 하나님 앞에 꿈과 소망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승리의 출발 선상에 섰다면 이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기회를 붙잡고 그 가운데 우리는 철저한 준비를 하며 그 가운데 어떠한 어려움과 방해와 위협 속에서도 우리는 출발하는 겁니다. 시작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생각되는 것을 역사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머릿속의 생각이 손발을 통해서 실제적인 삶의 업적으로 나올 때 그것을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머릿속의 생각을 평가하지 않아요. 머릿속의 생각이 현실 세계 속에 나타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에 생각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결국 그 일을 실제로 시작하셔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결심이 되었습니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준비가 되었습니까? 어려움이 있어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천명의 사람을 돕는 믿음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고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면 이제까지 안하던 일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안하던 일을 해야 한 사람이 천명을 도울 수 있지, 이전과 똑같이 살고서 한 사람이 천명을 돕자고 기도한다면 이것은 전혀 알맞지 않은 것이지요.
내가 한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고 기도했다면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전엔 안하던 일을 시도해야 돼요.
이전에는 못하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내 마음속에 두려웠던 일이 담대하게 자신이 생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도하셔야 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겠다는 기도가 우리들에게 짐이 아닌 힘이 돼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능력이 돼야 합니다.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돼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주께서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든지 새로운 역사를 시도하고 그 가운데 주의 축복을 더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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