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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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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시편 23편 앞부분에서 시인은 푸른 초장에 누워 꼴을 먹으며 움직이지 않는 물가으로 인도를 받아 갈한 목을 축이게 하시며, 곤고한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회복을 경험하였고, 온갖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도록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 되심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던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되심을 고백하고 있는 시인을 보게 됩니다.

시인도 한 때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인의 인생이 항상 잔잔한 물과 푸른 초장 곁을 지나왔던 것은 아닙니다. 항상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와 뚜렷한 하나님의 인도만이 그의 인생을 주장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때때로 영혼의 고갈을 느끼기도 하였고, 갈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캄캄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끊어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한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신 사실을 확인하고 그 관계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평화로운 환경과 여유 있는 생활 때문만은 아닙니다. 시인을 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평범하게 고백하다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시편 23편의 이 위대한 고백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한복판에서도 가슴 벅찬 언어로 목이 터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의 원동력

시인은 분명히 오늘 본문 말씀을 고백하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깊은 어두움의 골짜기 속에서 걸어간다 할지라도 나는 재앙을 겁내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한 막대와 한 지팡이, 그것들이 나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시인은 인생의 평온한 시기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 되심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폭풍과 같은 시련을 지나고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동일하게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격하며 인격적으로 그 앞에 승복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인은 이전에 실제로 그런 골짜기를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그 시간도 그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계곡을 지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위기가 현재이든지 과거이든지 미래이든지 그는 동일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도 나를 겁먹게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사망의 위협도 나로 하여금 평온한 풀밭과 쉴 만한 물가를 지날 때와 다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고, 고난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사망을 이기는 것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음침한 골짜기에서 희망을 갖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왜 매주일 교회에 모이고 날마다 기도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며 우리의 인생을 향한 완전하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시인의 고백 가운데 묻어나는 그 마음과 동일하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목자로 그분을 받아들였고,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납증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젠 우리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재산도, 우리의 미래도, 우리의 자녀도, 우리의 꿈도 모두 하나님께 헌납하였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육신밖에 없는데 우리는 이것도 주님을 위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남김없이 헌납증서에 도장을 찍고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의 종이 된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시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폭풍의 언덕을 지나면서도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이 위기 가운데 있는 시인으로 하여금 엄몰하는 인생의 파도를 비웃으며 노래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위탁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담대함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삶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거듭났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한 담대함이 없는 자는 모두 잘못된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주셨던 목표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더 집착하는 우리의 열망이 바로 우리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승복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 장면은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들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목동이 양떼를 이끌고 푸른 풀밭에서 풀을 먹게 하고 잔잔한 물가에서 마음껏 물을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목초지에는 더 이상 먹을 풀이 없어서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보며 미리 정해 놓은 목초지로 양떼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목자가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양떼를 이끌고 그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 약한 짐승들과 함께 그 험한 산을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목동은 골짜기나 계곡으로 들어서 길을 질러가게 됩니다. 중동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기록물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메마른 광야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깎아지른 듯한 협곡이 나오며 골짜기 사이에 길이 나 있는 그런 지형이 자주 나옵니다. 그 골짜기는 매우 깊고, 거기를 지나는 기분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높이 솟은 벼랑에서는 언제 흙더미들이 쏟아질지도 모르고, 어두운 계곡에는 맹수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는 자기의 양떼를 풍요로운 목초지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 골짜기를 지나야 합니다.

다윗은 지금 양떼들을 데리고 이런 골짜기 길을 지나야 했던 그의 목동 시절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생 말년에 자기가 지나온 인생길을 회상해 보니 그것은 실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들을 지나온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지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나온 인생의 날들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구비 구비 지나온 인생을 뒤돌아볼 만큼 오랜 세월을 살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여기까지 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이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시련의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형통한 길로 걸어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보증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미 들어갔다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입성의 티켓을 받은 것입니다. 그 표를 들고 첫발을 내디딘 곳은 어디였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전쟁과 기근, 고난과 결핍이 기다리고 있는 광야였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경험하며 행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없는 고난과 시련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기도와 믿음을 통해, 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 삶의 환경들을 바꾸고 인생을 가로막고 있는 난관을 치워버리기도 합니다. 확실히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바꿀 뿐 아니라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의 삶을 단지 축복과 평안만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장차 나타날 영광스러운 유업들을 소망하며, 그 소망 때문에 가치 있는 고난도 견디고 의미 있는 시련을 이기며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찾아 살아가게 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고, 거기서 극적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장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더욱더 분명히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목자로 모신 자녀들을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바르게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시련의 때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소중함과 우리를 다루시는 그분의 성품을 배우게 됩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저들을 인도하시고, 만나와 생수로 저들을 먹이시며, 이방 열왕들의 마음을 물같이 녹이신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나타났습니까? 이 모든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 가운데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철저하게 훈련시키심으로써 이방 문화와 우상으로 가득 찬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골짜기의 선한 목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나 광야와 같은 외로운 장소야말로 양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존과 삶을 위하여 목자의 인도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 곳에서 양들은 목자를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과 처지에 대해 자각하게 되고, 그와의 관계를 더욱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은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에 있으며,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을 통과할 때에 자주 놓치기 쉬운 확신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과 가장 선한 길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도 이러한 골짜기에 접어드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부족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우리의 죄악 때문만도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범죄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골짜기에 접어들기도 합니다. 이유가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두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내가 변한 것처럼 주위의 환경과 사람들도 그렇게 간단하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즉시 질문할 것입니다. 그럴바에야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전에 경험했던 사망의 골짜기는 오직 두려움과 고통, 상처만을 안겨 주던 날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지금, 우리가 지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누구이시며, 그분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험하게 되는 장(場)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의 원숙한 신앙의 세계, 진리에 대한 깊은 인식, 상처를 극복한 자유로운 찬양의 고백들은 모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붙들게 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단지 우리들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훌륭한 학원이 됩니다. 그곳에서 해를 받기는커녕 하나님과 우리와 맺은 관계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생명싸개 안에 보호받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이렇듯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잠시 잠깐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언제나 기억합니다. 그래서 시인도 이렇게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여 근심할 지라도 우리의 손목이 주님께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한, 우리의 한숨으로 노래할 수 있고 우리의 걱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없이 홀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파괴적인 외로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긍휼히 여기시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할 때에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솟아나야 할 경건한 갈망을 속된 감상(感傷)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감상적인 슬픔이 영적인 회복에 도움이 될 리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만이 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만이 골짜기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선한 목자의 사랑의 위로를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놓치기 쉬운 확신

그러나 다윗도 이러한 사실을 놓치고 살아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 속에서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인생이 고난과 위기를 지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정서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타락한 정서에서 비롯된 세속적이며 파괴적인 외로움이고, 또 하나는 신령하고 거룩한 외로움입니다. 전자는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독소와 같아서 우리를 점점 더 깊이 좌절하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영적 열망들을 질식시키는 외로움입니다. 반면 후자는 신령한 세계에서 경험되는 외로움으로서, 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하게 만드는 외로움입니다. 청교도 조지 스위녹(George Swinock)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거룩한 외로움은 무리 속에 갇혀 있던 사람을 풀어주는 것이다”

다윗은 인생의 말년에 자신의 살아온 지난날들을 회고해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고 때로는 그러한 외로움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생활에 타격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시인의 불신앙을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로 자신의 지난날들을 고백하면서 시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그분께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되던 그때에도 사실은 자기 혼자 그 위기의 골짜기를 지났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우리를 누가 이끌어내어 빛의 자녀들로 삼아 주셨습니까? 그분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인도해 오셔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고 계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 없이 살아온 때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한 순간도 우리를 홀로 두신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욕심과 유혹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추적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버렸으나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그분을 기뻐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시는 하나님을 바랐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기뻐하셨습니다. 인생의 깊은 밤을 홀로 지나고 있다고 여겨지십니까? 눈을 드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목자의 지팡이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과 함께하셨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양을 치던 시절에 그의 곁에 항상 두었던 두 가지 도구를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지팡이와 막대기였습니다. 우선 이 지팡이는 목자들이 양떼를 인도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하기를 좋아하는 양들의 성품 때문에 양들은 종종 대열에서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가곤 하는데, 그때에 끝이 둥글게 휘어진 이 지팡이를 양의 목에 걸어 당김으로써 대열에 다시 들어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던져 줍니다.

첫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서는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가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처해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판단하고 그들의 갈 길을 잘 지시해 주지만, 자신이 신앙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면 그러한 판단이 흐려지고 자신조차 올바로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바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지날 때에 우리의 분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게다가 선하신 하나님의 바른 인도와 돌보심을 믿고 따르지 못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곳은 죽음의 땅이 아닙니다. 그러한 골짜기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로 말미암아 갈 바를 새롭게 알게 하시며, 어둠 가운데 그릇 행하던 삶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을 수 없게 인도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을 경험케 하시기 위해 목자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까요?

둘째,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으십니다. 요셉과 같이 꿈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때로는 환경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소원을 주심으로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가장 일반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말씀을 통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잊고 살기 쉬운 또 다른 사실을 알려주는데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의 느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 우리가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빠지거나 환경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겨 혼란해질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주의를 집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고요히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함으로, 고난의 골짜기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붙들며 살아가는 신앙의 지혜를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다윗은 시편의 다른 곳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분의 역사는 단순한 인도 그 이상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105-107). 그렇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인도를 분명하게 경험하기만 한다면, 때로는 단순한 인도를 넘어서서 영적인 소생을 경험하는 장(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회복이 아닌 것은 진정한 회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그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믿음의 지혜를 배우십시오.

목자의 막대기

시인은 지팡이와 함께 막대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유사하나, 그 용도는 사뭇 다릅니다. 지팡이가 양들을 다시 대열로 이끌기 위해 사용된 도구였다면, 막대기는 끝이 뾰족한 흉기로서, 양떼를 해치기 위해 다가오는 맹수들을 무찌르는 데 사용된 도구였습니다. 목동에게 있어서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양떼를 지키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였습니다. 목자의 사명은 단순히 양떼들에게 꼴을 공급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양떼를 해치기 위해 공격하는 적들을 퇴치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소유한 용사도 되어야 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5-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가 되셨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근을 면하게 하시기 위해 만나를 내리시고, 그들을 해갈시키려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은 곧 그들을 위하여 용사가 되어 주시겠다고 다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라고 할 때의 이 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그러한 공급과 수혜(受惠) 이상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용사이십니다. 당신의 양떼인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우리의 대적들을 당신의 대적으로 여기시고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보호 아래서만 비로소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막대기가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고백한 것은 시인의 영혼을 노리던 대적의 위협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이런 류의 박해를 받으며 죽음의 계곡을 지나는 것 같은 인생의 고통을 체험하여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시인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망의 위험 아래 놓여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시 55:1-8).

어떻게 시인이 그런 깊은 좌절과 두려움 가운데서 이처럼 위대한 승리를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당신의 양떼인 시인을 지키기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명목상 우리의 인생의 목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향하여서는 선하고 인자하신 분이시지만, 당신의 양떼인 우리를 해치기 위하여 도전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향하여서는 냉엄한 용사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참된 위로

시인의 마지막 고백은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삶의 위기, 영적인 깊은 침체의 늪에서는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오랜 된 상처들을 신앙 안에서 치유 받게 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상처에 대한 진정한 치유는 상처 자체를 주목하거나, 잠재의식 속에 있는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서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자체를 주목하기 보다는 상처를 능가하는 목자 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오늘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체험하며 사는 일이 진정한 치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된 사람입니다. 변화된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고, 미래에 대한 거듭난 소망을 비전으로 소유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외치게 된 것을 보십시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인생의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고통을 능가하는 하늘의 위로가 그의 영혼 속에 넘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부요함이 자신의 삶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쓰라림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온 영혼으로, 온 마음으로, 온 인격으로, 온 삶으로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다윗 말고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진리를 증거 합니다. 요셉도 그 중 한 사람이 아닙니까? 이복형제들에 의해 미움을 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말도 되지 않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투옥되었어도 그는 변함없이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 요셉은 상처도 받지 않는 특수 인간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애굽에서 생활하였는지는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창 41:51).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내시고, 애굽의 치리자로 삼으심으로 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과 넘치는 사랑을 입증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창 50:19-21).

맺는 말

지금 여러분들 가운데 지난날의 상처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문제는 이전의 상처가 아닙니다. 상처받았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분노를 삭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머물러 산다면 여러분의 상처는 성령보다 더 강력하게 여러분의 삶과 인격 속에 역사하여 회복된 영적인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난날의 상처를 능가하는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신앙의 현실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처를 통해 여러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보여주시기 원하십니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얼마나 능력 있는지를 나타내기 원하십니다. 과거의 상처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세월이 흘러가면 그 상처가 잊혀지리라고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복수도 그 상처를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만으로는 옛 상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옛 일을 생각하며 좌절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가려는 생각을 바꾸십시오.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자유케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 진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만이 우리를 영적인 회복을 넘어서 진정한 자유, 불꽃처럼 타오르는 완전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이렇듯 상처의 치유를 넘어서 영적인 회복과 완전한 자유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말씀의 의미가 주는 도전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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