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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관 (레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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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제사장 이야기는 그 이전에도 나옵니다.
성경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제사장은 멜기세덱입니다.
창세기 14장 17절과 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실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은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 말고도 아론 이전에 제사장 이야기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칠년 흉년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요셉을 총리로 임명한 다음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요셉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창 41:45).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였습니다(출 1:16, 3:1).

이렇게 오늘 본문 이전에도 제사장의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사장 제도는 공식적으로는 오늘 본문에서 시작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초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단히 엄숙한 느낌을 줍니다.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았습니다.
제사장이 될 사람들을 씻기고 정해진 예복을 입히고 거룩한 관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33절을 보세요, 이레 동안 행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성직과 성직자들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신학교를 나오고 각 교파에서 정한 과정을 마친 분들을 목사로 세울 때 목사 안수식을 합니다. 
감리교에서는 연회에서 목사안수식을 하고, 장로교는 노회에서 목사안수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목사 안수식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직과 성직자들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을 임명하는데 이렇게 엄숙한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3절을 보세요,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하신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장정만 육십 만이었으므로 부녀자, 노약자까지 합하면 이백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 회막문 앞에 모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실제로는 대표들만 모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이 세운 제도가 아닙니다.
5절을 보세요. 모세는 회중에게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이러하니라”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내용은 출애굽기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직은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밖의 10절을 보세요.
모세는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에게 발라 거룩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을 세울 때 이와 같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택하시고 이렇게 엄숙한 의식을 통해 제사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8장 1절과 2절을 읽어드립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저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아론과 그의 네 아들은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론은 전과자였습니다.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 있을 때 금송아지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큰 전과가 있습니다(출 32:6).
오늘 본문을 통해 제사장으로 임명 받은 아론의 네 아들 가운데 장남 나답과 차남 아비후는 그 직후에 제사절차를 어기다가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레위기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부족함과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입니다.

성직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 이것을 기본적인 인식으로 가져야합니다.

각 사람에게는 언어습관이 있습니다.
언어습관은 그 사람의 인격과 교양과 가치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좋은 언어습관은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혹시 저의 언어습관에서 이런 것을 발견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목사님, 담임부목사님, 전도사님들에게 꼭 ‘님’자를 붙인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에게 ‘님’자를 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목사, 전도사는 동역자들이니까 나이 차이에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데 거의 예외 없이 ‘님’자를 붙이고 있습니다. 
감리사 직책을 맡고 있을 때는 감리사가 직접 관할하는 젊은 서리 전도사님들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나무랄 일이 있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개 전도사 그렇게 할 수 있어?’ 또는 ‘아무개 전도사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지 않고 ‘아무개 전도사님,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금 말한 것과 같이 성직은 존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체험 때문입니다.

35년 전에 저는 수원에 있는 한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35년 전이니까 서른이 채 안되었을 때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육십이 넘은 분이었는데 장로님이셨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모든 교사들에게 말할 때 ‘아무개 선생님,’ 꼭 ‘님’자를 붙였습니다.

제가 한 번은 ‘교감선생님, 저를 부를 때는 님자 빼고 부르세요. 제가 아들 뻘이 되는 되는데 그렇게 하시니까 좀 거북합니다.’ 했습니다.
그 교감 선생님이 정색을 하고 ‘유 선생님, 아닙니다. 교직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사를 교직에 있는 사람이 위해주지 않으면 위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유 선생님,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했습니다.
저는 그 교감 선생님,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향이 개성이셨는데 어찌나 깐깐하신지 모시고 일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 때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일에 많은 영향을 받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본받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저의 이 습관, 교역자들에게는 꼭 ‘님’자 붙이는 습관은 본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교역자를 교회에서 위해 주지 않으면 위해 줄 곳이 별로 없습니다.

다행히 한국교회는 성직자들을 존경하고 위하는 대단히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대심방이 진행되고 있는데 심방을 받는 가정마다 교역자들을 잘 맞이하기 위해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단장하고 정성껏 심방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이 전통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정성을 다해 축복하곤 합니다.

최근에 교역자와 관계된 주일이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학교 주일입니다. 1월 둘째 주일이었습니다.
하나는 은급주일입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신학교주일은 신학교육기관들과 신학생들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신학교 주일은 지나갔지만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교역자의 길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신학생들을 위하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신학생들의 숫자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신학생들이 농촌교회에 가면 귀한 분 오셨다고 잘 대접하곤 하였습니다.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 이용도(李龍道)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신학교 2학년 때 건강이 좋지 않아 휴학을 하고 강동이라는 곳에 휴양을 갔습니다. 그곳 교회에서 귀한 신학생 오셨다고 부흥회 인도해 달라고 해서 단에 섰다가 큰 은혜를 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신학생들의 숫자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많습니다.
그래도 그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귀한 결단을 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분들입니다. 귀하게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은급주일은 원로목사님들과 그 분들의 노후대책에 관심을 갖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원로목사님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 은급주일이라는 것이 설교의 주제로 이런 것을 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직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는 복을 받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이 많은 분들에게서 흔히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간증을 하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우리 집은 어렸을 때 아주 가난했어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목사님이 심방 오면 정성껏 대접했어요. 그 때 저는 부모님을 원망했어요. 우리들에게는 과자 하나 사탕 하나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목사님이 오시면 흰 쌀밥에 과자, 과일, 저렇게 잘 대접하시나, 원망했어요. 목사님이 심방을 마치고 돌아가시면 얼른 방으로 달려 들어갔어요. 목사님이 남기신 것을 먹기 위해서였어요. 목사님이 하나도 안 남기고 다 잡수시고 가셨을 때는 회가 나고 약이 올랐어요. 그 때는 부모님들이 하시는 일이 이해도 안 되고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렇게 목사님을 잘 대접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북한입니다.
북한이 저렇게 저주 받은 땅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 땅에서 많은 성직자들이 박해를 받아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오늘 본문은 목사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보통 제사장이 아닙니다.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 하반절과 6절을 보세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예수님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를 제사장으로 세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10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이 말씀들에 의지해서 만인제사장론(萬人祭司長論)을 중요한 원리의 하나로 삼았습니다.
만인제사장론은 만인사제론(萬人司祭論)이라도 합니다.
만인제사장, 만인, 만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주장의 내용은 여러 번 들어 잘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모든 신자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인제사장론은 제사장의 중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만인제사장론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직위와 도덕성을 가진 성직자의 특수집단이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제사장직은, 그러니까 목사직은 직무상의 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다 같은 학생인데 필요해서 선출된 반장과 같은 존재입니다.

자, 여러분, ‘나는 제사장이다’ 또는 ‘내가 제사장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셨으면 오늘 본문의 주인이 바로 나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먼저 6절을 보세요. 제사장으로 임명 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물로 깨끗하게 씻습니다.
우리는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합니다.
이것은 회개하여 죄에서 깨끗함을 입어야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정화를 말합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샤워를 하고, 온몸을 씻고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지난주일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보니 집의 수도가 고장 나서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찬물을 찍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교회에 나와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하루 종일 심방을 했습니다,
그 날 따라 교회도 펌프를 수리 하느라고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심방하는 집에도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육신을 씻지 않아도 이런데 영적으로 회개를 하지 않으면 더 개운하지 않습니다.

7절을 보세요.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뭐 어른이 옷 입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속옷에 대해서까지 말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사장은 그 내면이 깨끗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 감추어진 부분도 깨끗해야합니다.
여러분, 자기의 속옷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속옷은 깨끗한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내면, 영적인 면이 깨끗한지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사관학교에 생도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훈육관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생도들의 생활을 자세하게 보살피는데 깨끗한 속옷을 입도록 늘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검사를 엄격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훈육관이 위생관념이 철저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군인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귀관이 죽고 누군가가 귀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군복을 벗겼을 때 지저분한 속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장교의 품위에 어긋난다.’ 이것이 이 훈육관의 주장이었다고 합니다.
바른 생사관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 때 우리의 영이 깨끗하지 못해서 천국 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늘 깨끗한 속옷을 입고 있는 성도들, 영이 깨끗한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봅니다.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걸쳐 입히고 에봇의 장식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띠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하게 활동할 수 없습니다.

이 띠는 진리의 띠입니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데 제일 먼저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서 17절까지를 읽어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장인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입어야할 옷에 대해 가르치는 말씀이라면, 에베소서 6장 13절에서 17절까지는 제사장인 우리가 영적 전투를 할 때 갖춰야할 무장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띠는 사랑의 띠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14절까지를 읽어드립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들이 갖춰야 할 품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들입니다.
아까 에베소서의 말씀에서는 띠가 제일 먼저 나왔는데 골로새서의 말씀에서는 띠 이야기가 
제일 나중에 나옵니다.
띠는 시작이고 완성입니다.
여러분, 진리와 사랑의 띠를 띠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에봇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봇은 알기 쉽게 신분을 나타내는 조끼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요즘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은 자기의 신분을 나타내는 조끼를 입습니다.
기자들은 ‘보도’ 또는 영어로 ‘Press’라고 쓴 조끼를 입고 취재를 합니다.
사진 기자들은 ‘Photo’라고 쓴 조끼를 입고 사진 촬영을 합니다.
경찰들이 사건현장에 출동했을 때 경찰이라고 쓴 조끼를 입고 현장 감식을 하고 수사를 하는 것을 TV 화면을 통해 자주 봅니다.
교회 전도 팀이 전도를 나갈 때는 지금은 교회 이름이 새겨진 파카를 입고 나가는데 춥지 않을 때는 조끼를 입고 나갑니다.
그 조끼를 보면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알고 협조해 줍니다.
여러분,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에봇을 입고 있는 사람, ‘제사장’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조끼를 입은 사람은 그 조끼에 쓰인 신분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만일 경찰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현장에 출동한 사람이 긴장된 눈매로 사건 현장을 살피지 않고 다른 사람과 잡담을 하고 담배를 피워 물고 있으면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 이 사건, 제대로 해결되지 않겠구나!’ 합니다.
제사장 에봇을 입은 사람이 제사장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습니다.
‘아, 저 사람, 제사장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겠구나!’ 할 것입니다.

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림은 ‘빛들’이라는 뜻이고  둠밈은 ‘완전함’이라는 뜻인데 판결하는 도구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번에 이 나라와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것들을 판단할 때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했습니다.
제사장인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판단하고, 이 세상이 나아갈 길을 가리켜야 할 의무도 있고 권리도 있습니다.
여러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건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렇게 말했을 때 ‘아,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당신이 말하는 대로 했더니 참 잘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을 ‘의견지도자’라고 합니다.
건전한 의견지도자들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 튼튼한 사회입니다.
한국사회는 건전한 의견지도자 대신에 선동가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원리, 신앙양심, 신앙체험, 성경지식, 이런 것들이 이 시대 제사장인 나의 우림과 둠밈이 되어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잘 판단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9절을 보세요, 제사장들은 머리에 거룩한 관을 썼습니다.
그 관에는 금 패가 붙어 있습니다.
공동번역과 새 번역은 이 금 패를 “금으로 만든 성직패”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제사장이오!’ 알려주는 패입니다.

군인들은 만났을 때 어디를 제일 먼저 봅니까?
모자를 봅니다. 모자에 계급장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급장을 보고 나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면 얼른 경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제사장인 나는 머리에 거룩한 관을 쓰고 있고 사람들은 그 관을 보고 ‘아, 저 사람 제사장이로구나!’ 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사장의 관 가운데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거룩한 관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제사장으로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자기 몸을 온전한 제물로 드려 안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찬송가 233장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이 찬송의 5절 가사는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 뿐이라
주가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가 주신 면류관 쓰고” 주님은 우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실 때 관을 주십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이 주시는 관은 보석으로 장식된 면류관이 아닙니다.
피 묻은 가시관입니다.

목사님들은 예복을 입고 천을 목에 걸치고 길게 내립니다.
이 천을 스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대(領帶)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목에 드린다고 해서 드림천이라고 번역해서 쓰는 실천신학자도 있습니다.
이 스톨을 보고 멋있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착각입니다.
이 스톨은 멍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스톨의 목에 대는 이 부분은 반드시 이렇게 좁아야 합니다.
이것이 멍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멍에를 맨 소가 주인에게 순종하듯 주님에게 복종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뜻으로,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완전한 순종을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교역자들은 이것을 목에 거는 것입니다.

아제 말씀을 요약하며 마칩니다.

여러분, 성직과 성직자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로 제사장인 것을 다시 한 번 아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으로 갖춰야 할 것들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정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속옷, 내면이 깨끗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와 사랑의 띠를 띠시기 바랍니다.
내가 제사장인 것을 표시하는 에봇을 입고 있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원리로 세상을 판단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바른 조언을 해주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머리에 거룩한 관을 쓰고 있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관은 가시관인 것을 또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시관이 주는 그 아픔을 이길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여 제사장의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우리를 제사장으로 택하시고 세우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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