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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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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가 지난 주의 예고편과 달라서 죄송합니다. 설교가 무엇이냐 할 때, “시대를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오늘 당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대의 모습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이렇게 살아라 라는 멧세지를 증거하는 것이 설교라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의 정의에 따르면, 성경강해를 통해서 시대를 해석하고 이렇게 살아라 라는 멧세지도 좋지만, 우리 시대의 사건, 현상들을 소재로 하여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부각시키고 마음에 새기는 것도 설교의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집니다.

제가 오늘은 요새 우리 나라의 핫 뉴스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과 그 이후 긴급조치법에 따라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명단이 공개된 사건을 소재로 하여서,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사실은 주보 칼럼 난에 짧은 글로 써서 올려놓으려고 했는데, 글의 양도 많아지고 또 글을 쓰면서 계속 마음에 부담이 되어서 이런 느낌이 성령님의 이끌어가심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예고편과 다른 설교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도 역사하는, 가끔은 느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교통하심을 조심스럽게 인정합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침례교회에서 목회를 배울 때, 대학부에서 한 달에 한번씩 설교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담당목사님이셨던 S목사님이 주로 하셨고 저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만 했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제가 원래 석양에 바쁜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토요일 아침부터 설교준비를 하는데 정말 너무너무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저는 설교 영감을 받아서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고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아직도 사용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영감을 주시는 것이 그치게 되면, 제가 설교사역은 은퇴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바람을 거슬러서 괴로이 노젖는 제자들처럼,  기도를 했다가 몸을 비틀었다가 시계를 봤다가 S목사님께 '죄송한데 오늘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전화를 할까 난리를 치며 결국은 원고를 다 쓰지 못하고... 그냥 교회에 갔습니다.

대학부 예배 시작 한 시간 전에 갔더니 대학부 담당이신 S목사님이 저를 부르더니, “덕재형제, 미안한데 오늘 설교 외부강사 오시기로 했어. 내가 미리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해. 딴 데 갔다가 전화번호를 놓고가서 전화를 못했네. 그래서 내가 기도는 했어.” 이 양반이 약간 헐렁한 면이 좀 있으신 분입니다.

오늘 설교 안해도 된다 라는 안도감이 하도 커서 목사님 좀 심하시네.. 진즉에 연락 좀 주시지 서운한 마음이 찾아올 틈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님이 저를 좀 연단시키신 것이라 여깁니다. 성령님께 제가 조금 더 민감했다면 고생안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느낌을 통해서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교통하심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겸손한 마음을 지켜야함을 철칙처럼 여깁니다.

변명이 좀 길었는데, 요는 제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인정하고 예고편과 다른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하여.. 교인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다 이해해 주시는 우리 가족들이지만요..

인혁당 사건에 대한 말씀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월 23일에 서울중앙지방법정에서 인혁당 사건 재심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무죄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사실 인혁당 사건은 이미 지난 2002년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그리고 2005년에 국가정보원 자체가 실시한 진실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임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이 뒤늦게 내려지고, 지난 주에는 유신시절 긴급조치법에 따라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한 판사들의 명단이 공개되어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지요.

그 때, 정의롭게 죽지 못하고, 사는 기회의 편에 서서 지금도 사법부 권력의 핵심에 있는 판사들에 대하여 “이제라도 사과하고 용퇴하라”는 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한편, “이제와서 어쩌라고..”하며 괜히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자고 반론을 하는 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다 드러났지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정권에 의하여 고문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며, 특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판결은, 사법살인이라는 말을 낳게 한, 우리나라의 얼굴에 스스로 똥칠을 한, 참 창피한 판결이었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2번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1964년에 있었던 제1차 인혁당 사건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그로부터 딱 10년 뒤 1974년에 있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부르지요.

제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에 일어났습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인 6·3사태로 인해 계엄령이 선포된 지 얼마 안 되어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북의 지령을 받아 국가를 변란하려는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중정에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그러나 검찰 조사 과정에서 1차 인혁당 사건은 중정의 고문을 통한 조작임이 밝혀지고, 이용훈 부장검사 등 3명의 담당 검사가 아무 증거도 없이 조작된 사건이기 때문에 기소를 거부하지요. 그러자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 씨가 기소를 하도록 압력을 넣고 마침내는 이들 검사들이 사표를 제출하게 되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사법파동 끝에 결국 당시 중정의 대대적인 발표와 달리 도예종씨 등 몇 명만이, 인혁당과는 무관한, 과거의 사상적 경향을 이유로 실형을 받고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인혁당이라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중정의 사건 조작이 실패로 끝난 이 사건이 다시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차 인혁당 사건 발생 후 10년이 지난 1974년의 일입니다.

유신에 항거하기 위한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저항이 가열되고 조직화되자 위기를 느낀 정권은 또다시 '조작'의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유신정권은 분단 상황에서 국민들이 레드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며 이철, 유인태 등의 학생들의 시위 움직임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으로 역어 사형선고까지 내리면서, 이들 학생의 배후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내 지하조직이라며 10년전 사건 조작에 실패했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체포, 대규모 간첩단을 검거했다고 사건을 발표합니다. 이것이 2차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지요. 총 23명이 구속된 이 사건 관련자들은 74년 5월 27일 내란예비 음모 및 내란 선동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로 기소되어 6월 15일 비상 보통 군법회의 1심 재판을 시작으로 10개월만에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 중에도 이미 일반인의 상식,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도 두 가지나 있었다. 하나는 군법회의 제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했는데, 제2심에서는 형을 감량하는 것이 아니라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하여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피고를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 중 “애국 학생들을 국보법 등으로 걸어 빨갱이로 몰아 사형을 구형하고 있으니 이는 사법 살인행위이다‘는 발언을 했다가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기소됩니다.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한 말을 가지고 기소를 하는 예는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대법원은 75년 4월 8일, 이 사건에 대한 피고측의 상고를 기각하며 주요 관계자 8명에 대해 사형을 확정하였고, 놀랍게도 판결이 난 지 20시간도 안되는 다음날 새벽까지 8명에 대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습니다.

공안관련사범이라 해도 사형선고 이후 적어도 3, 4 년은 그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춰 볼 때, 극히 이례적인 이날의 사형집행은 사법부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에 정말 수치스러운 비극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사형집행에 대하여, 독재정권의 조작과 폭력을 어느 정도는 예상은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권력의 횡포를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치를 떨치며 깜짝 놀란 것은 국내만이 아니었습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였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미, 대일 외교사들을 보면, 나라가 이렇게 뒤가 구린 것이 있으면 외교에서 얼마나 손해를 많이 보는지 모릅니다. 지난 주에 뉴스에도 나왔던 바, 우리나라가 세계 각지에서 애써서 번 이익의 반절 이상은 일본으로 다 넘어갑니다. 아직도 일본경제에 많이 종속되어 있다는 증거이지요. 그래서 수출 사상 유례없이 잘 되고 해도 그 혜택이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으니 서민들은 살림살이가 어려운 거고요.

이렇게 일본에게 경제적으로,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종속을 심화시킨 주 요인이, 나라가 의를 세우지 못하고 뒤가 구린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일협정 시작할 때부터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 김대중 씨 납치 사건 등 우리 정부가 떳떳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입막음을 빌미로 외교에서 얼마나 손해를 많이 봤는지 모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이지요? 뒤가 구리고 숨은 부끄러움의 일이 있으면 절대로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코꿰어서 종속됩니다. 그래서 개인이든 나라든 의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튼, 32년이나 지났지만, 뒤늦게나마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이 이루어지고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32년이나 지난 일을 새삼 다시 구구히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키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KNCC의 ‘인혁당 사건 무죄판결에 대한 성명’에서처럼, 이 판결을 통해서, 사법부의 철저한 반성과 개혁이 이루어져 인간의 존엄과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 사회 속에 살아 숨쉬었으면 좋겠고, 이번 기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의 생명 존중을 위해 사형제 폐지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과거사를 조사하는 위원회의 이름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조사위원회’인 것처럼, 진실을 밝히는 것은 화해를 위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한 때 사법정의를 뭉개뜨린 ‘그 때 그 재판관들’을 마녀사냥하듯이 단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양반들이 스스로 자신들도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더없이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요.

반면에 인혁당 희생자 8명의 유가족들, 억울함과 한에 눌려 지냈던 유가족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적절한 배상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은 다행히 잘 이루어질 것같습니다.

그렇게 인혁당 사건 무죄판결에 이어서 유신정권 당시 긴급조치법에 따라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이름이 공개되어지고, 이후로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과 함께 자칫 여론몰이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약간의 우려도 들지만, 사법부가 정권의 시녀라는 오명(汚名)을 벗고서, 나라의 정의를 세우고 기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확고하게 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권력의 시녀.. 이런 것은 단어조차도 없어져야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아름다운 진실과 화해를 위하여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민족과 이 나라, 우리 시대에도 이루어지도록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서부터 시작입니다. 민족과 나라를 생각한다고 조금 알게 된 역사의 아픔과 모순으로 인하여, 섣불리 분노의 행동으로 가벼이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세상 일이 다 그러려니 하며 무관심하여 이기의 높은 담 속으로 숨지도 말아야 합니다. 기도함으로써 이 민족과 나라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에 주님께서는 더 맑은 꿈을 주시며 바른 의식을 세워주시며 속사람을 강건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 분노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더욱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나라 사법부가 나라의 정의를 세우고 지키는 기둥으로 반듯하게 서도록, 과거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극단으로 사람들을 가르는 것이 되지 않고 화해의 도구가 되도록, 사형제가 폐지되고 인간 생명의 존엄한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억울함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이루어져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도록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살기 원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로 그 교훈을 깨달으라고 던져주신 거울<고전10:11>임을 기억하며, 마음아픈 우리 현대사의 거울을 통하여 우리가 간과하지 않고 새기고 넘어가야 할, 한 교훈은 이것입니다.

요새, 제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입에 붙었지요? 신앙인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추구되어야 하는가를 잘 요약해준 어구(語句)라 여겨져서 그럽니다.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기도, 꿈이 없이 ‘수신(修身), 제가(齊家)’에만 머무르는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반면,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반성적 적용이 없는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논의는 위선(僞善)이구요.

앞에서 우리나라 사법부가 나라의 정의를 세우고 지키는 기둥으로서 올곧게 거듭나도록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치국, 평천하의 참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화두로 던진 사건, 인혁당 재심 무죄 판결을 통해서 우리는 당연히 수신과 제가의 교훈을 되새겨야 합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 판단하는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크건, 작건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남용하여 진실을 은폐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목적, 명목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는 악(惡)임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힘에 의한 폭력, 꾀에 의한 조작의 방법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것임을 신앙인의 양심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사람을 조작하고 왜곡하는 일이 없을 것같지만, 그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권위를 내세우거나 혹은 세상경영원리를 차용하여 다른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가려는 시도가 마치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의 것인 양 자행되는 일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왕왕 있습니다.

속셈을 하면서 겉으로는 명목과 구실을 일삼는 삶의 태도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 어린아이같은 모습은 어린아이의 단순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순결하고 맑아야 한다는 것은 교회는 투명한 교제를 통해서 성령님의 교통하시는 은혜를 입어 세워져 가는 것이지 힘에 의한 폭력이나 작업, 조작을 통해서 통제되어지는 단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상 방법, 인간의 지혜를 좋은 것인양 동원하는 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예컨대, 전도의 목적으로 경품을 내거는 모습, 교회 성장, 선교의 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 폼을 갖추기 위해 봉사자를 돈 주고 사는 것, 작게 보이지 않으려고 통계숫자 뿔리는 것 등등 이런 허탄과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요약컨대, 비전이 좋다고 거짓된 수단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목적을 내세워서 그릇된 방법, 삶의 태도를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비전, 목적을 위하여서 거짓된 방법, 수단을 허용하면, 인혁당 사건을 조작한 ‘그 때 그 사람들’처럼 무자비한 사람, 무식한 사람이 됩니다.

목적도 없고 비전도 모를지라도 오늘의 삶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뜻입니다. 나는 목적도 모르고 비전도 모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오늘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비전을 이루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이잖아요. 사람이 무리를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참된 삶은, 과정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둘째로, 긴급조치 때의 판사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 무엇보다도, 이런 마음은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법이 독재권력의 횡포로서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이제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유신시절 긴급조치법은,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 제1호가 발령되기 시작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바로 모두 해제될 때가지 제9호까지 발령이 되었었습니다. 긴급조치가 발령되었던 1974년에서 1979년까지, 총 2,159일간 긴급조치법 위반의 혐의로 행한 재판은 모두 1,412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이 1,412건의 재판 가운데, 권력의 시녀노릇을 거부하고 판사의 양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 경우는 딱 3건 밖에 없었습니다. 영등포지방법원 이영구 부장판사(당시, 현 변호사)가 2건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었고 광주지방법원 양영태 부장판사(당시, 현 변호사)가 1건에 대하여 양심에 따라 긴급조치법에 반(反)하여 무죄를 선고했었습니다. 재판한 판사들의 수로 비교하면, 당시 판결에 참여했던 판사의 수는 492명이고 이중에서 권력의 힘에 눌리지 않고 양심적 판결을 한 사람은 딱 2명이었습니다.

당시의 판사들 중에는 권력에 잘 보여서 승진하려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긴급조치법을 옹호하는 소위 ‘유신판사’들도 극소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판사들은,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면서도 권력의 힘에 눌려서, 자신과 가족의 명예와 안녕이 헤치는 것이 두려워서, 힘들게 사는 것이 싫어서...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잡아넣도록 선고를 내렸었습니다. 그 세상의 힘에 휩쓸려 가지 않고 양심에 따라 옳은 판결을 내린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이었습니다. 판사들의 비율로 보면 492명 중의 2명이니 0.4%정도이지요. 

사실 이 통계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절대 권력의 힘에 눌려서 양심에 거스리는 판결을 내린, 당시 다수의 판사들에 대하여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분개하며 쉽게 정죄하는 사람은 아마 인간이 연약한 존재임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아직 베드로의 닭울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수치를 대하면,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회의가 들게 하고 내 자신의 경우였다면 과연 그 상황에서 양심적으로 행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자신없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게 우리들에게도 다수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현대사의 단면은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7:13,14>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 극단적 종교행습을 하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신앙의 희생의 길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양심적으로 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유신시절 판사들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되는 바, 양심의 갈등의 상황에서 사람들 다수는 넓은 길, 안전한 길, 고생하지 않는 길, 쉽게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위선과 가식을 벗고서 양심에 정직하게 따르는 생명, 진리의 길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길이 아니고 또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단정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싶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이 역사의 진실을 보면, 자신없는 게 우리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하게 사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도 여호수아에게도<수1장>, 다윗의 임종시 솔로몬에게 내려준 유언<왕상2장>에서도, 바울이 디모데에게도<딤후2장> 똑같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깨우쳐 주시는 뜻을 알 것도 같지 않습니까?

그들이 지도자로 서기 때문에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얼마나 많은 지도자들이 마음이 강하고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퍅해져서 제왕적이 되는지... 씁슬한 장면들을 우리는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세 경우 모두 마음을 강하게 담대하게 하라는 말씀을 주시는 문맥의 뜻은, 그래야 마음이 강하고 담대해야, 대장부가 되어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도(道)를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들은 지도자로서 마음 속을 감추는 포커 페이스가 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를 따라서 정직하게 살도록,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도록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마음이 유약해서는 하나님의 도를 따르지 못합니다. 다수의 흐름을 거슬러서 행하는 데에는 확신과 용기가 필요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용기는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힘으로 폼잡기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경계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누가복음 12장 4-7절> 

아무리 막강 권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육신밖에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지옥에 던져넣을, 권세를 지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땅에서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한다면, 좁은 문을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직의 용기를 품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이 전부가 아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명심해라 그러면 네가 양심껏 사는 용기를 얻을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그러면 네가 정직하게, 아름답게, 진정으로 속사람이 강건한 모습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린다는 것은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당시의 물가로,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냥이면 참새 4마리 값인데, 다섯 마리라는 것은 덤으로 끼워 팔리는 작고 못생긴, 돈주고는 사람들이 안사갈 만한 참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덤으로 끼워 팔리는 참새라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새도 그러시는데, 우리 인생들을 어찌 하나님께서 안돌봐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돌봐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 수 있고 용기있게 살 수 있고 양심껏 살 수 있습니다.

최소한, 믿음없는 세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역사의 거울로 교훈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넓은 문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이 비록 세상의 즐거움을 누렸지만,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별 수 없는 인간들이었음을 드러내고, 양심에 정직했던 사람들, 당시에는 고난을 받았어도 지금은 사람들 마음으로부터의 존경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15세기말 16세기 초에 살았던 영국의 정치가 중에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많은 사람들에게는『유토피아』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요. 이 분은 참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토머스 무어는 재상으로서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헨리8세 임금의 정치 고문으로 있을 때, 헨리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였던 앤 불린과 결혼하려고 하지요.

그러자 토머스 무어는 이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왕이 자기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고 토머스 무어를 감옥에 가두었을 때의 일입니다. 중세 때 감옥은 주로 성루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남편의 처세술이 부족한 모습에 답답한 아내가 감옥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던졌지요? “널다란 집을 놔두고 좁고 더러운 감옥에 오니까 그래 당신은 행복해유?” “아무래도 집보다는 여기가 더 하늘에 가깝지 않소?”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끝까지 왕의 이혼에 지지를 보내지 않자, 결국 헨리8세가 토머스 무어를 참수형에 처하도록 합니다. 마지막 참수대에 올라섰을 때, 복면을 쓴 참수관이 큰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기 목이 금방 잘리우는 때에 토머스 무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 칼을 들고 선 참수관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지요.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오늘의 삶에 복판에서 이 예수님의 말씀들을 기억한다면 토머스 무어처럼, 거짓된 세상 폭력에 의하여 자신의 목이 잘리우는 현장에서도,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하는 여유(餘裕)와 태연자약(泰然自若)의 용기를 우리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 대다수의 삶에서는 양심적 선택 때문에 목숨이 위협을 받고 가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노정에서도 크고 작게 신앙의 양심을 따를 것이냐, 눈 앞의 작은 이익과 편안함을 따를 것이냐의 갈등은 계속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갈등들을 계속 주시는 주님의 뜻은,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도록, 좁은 문을 선택하는 용기를 더욱 크게 갖게 하심임을 되새겨 봅니다. 

한 편으로는 그래도 연약한 우리들이기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은혜의 약속에 은근히 기대어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돌보시는 은혜의 하나님께 기대어, 역사의 거울을 통하여, 우리 삶의 경험으로써 연단해 주시는 손길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써, 성령님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셔서 좁은 문을 따르며 나아갈 수 있는 정직의 용기를 키워 주심을 기대하고 의뢰해 봅시다. (이덕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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