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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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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의 무덤은 암석을 파서 만든 무덤, 돌로 입구를 막아 놓았던 무덤이었습니다.
그 무덤 앞에서 주님은 세번 명령을 하십니다.
①돌을 옮겨 놓으라(요11:39) ②나사로야 나오라(요11:43) ③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11:44)
그런데 주님이 하신 말씀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었습니다.
베다니에 오신 주님이 무덤으로 안내되었습니다. 하지만 무덤문이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39)고 명령하십니다.
사람들은 책망을 듣고서야 돌을 옮겨놓습니다. 그때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말씀이 나오기까지는 시차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사로야 나오라'는 말씀 후에도 분명히 어느 정도의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에게 다가가 그를 풀어주려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에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여전히 묶여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본능적으로 그에게 달려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묶여 있는 굴레들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두 눈으로 나사로가 병들어 죽는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썩은 냄새로 확인했습니다. 때문에 이제 그는 싸늘한 시체로 누워있어야 하고, 꽁꽁 묶인 채 있어야 할 존재라는 선입견이 저들 뇌리에 꽉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꽁꽁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나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이 직접 죽은 나사로를 묶었을 때 저들은 생각도 그를 꽁꽁 묶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타인을 향한 이런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사고의 틀 안에 타인을 꽁꽁 묶어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다양성을 허락하셨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한 많은 은사들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기준으로 남을 판단, 정죄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왜 이땅에 오셨을까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이 말씀이 주는 더 큰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지금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죽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이미 주님이 그를 살려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묶인 상태에 머물게 해서는 안됩니다. 죽은 자처럼 취급하고,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가 이 말씀속에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허물과 죄를 인하여 죽은 자들'이었습니다.(엡2:1)
그러한 우리를 주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30)

구원을 받는 다섯 과정 미리 아심-미리 정하심-부르심-의롭다 하심-영화롭게 하심입니다.
그 출발은 이미 아심, 미리 정하심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부르심의 과정을 통해 주님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사람을 사망과 죄악의 굴레로부터 자유케 하는 이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작업을 다 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의 과정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드디어 그를 구체적으로 부르십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주께서 이미 살려놓으신 자를 우리로 하여금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말씀의 진정한 뜻입니다. 지금 내 곁에 주님이 이미 살려놓으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마르다나 마리아처럼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그를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저들은 영적으로는 살았지만 육적으로는 여전히 묶여 있습니다.
이들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를 향한 그 어떤 선입견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영적 선입견이라고 부릅니다. 선입견으로 바라보고,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다가가 손을 내밀어 꽁꽁 묶여 있는 그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2차 대전 후 독일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마르틴 니뮐라'라는 목사가 「2차 대전 책임 백서」라는 것을 발표해 굉장한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이 히틀러가 아니라 독일 교회와 독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동일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지나가는데 제 뒤에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너는 왜 나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아무도 저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하도 익숙해서 돌아보니 그는 히틀러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때까지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누가 히틀러에게 다가가 전도한 자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영적 선입견을 버리십시오.
사울이 바울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그는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도도했던 나아만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무릎 꿇게 될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요?
긍정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영적 선입견을 깨뜨려 버리십시오.
믿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이 이미 살려 놓으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아직 묶여 있습니다. 우리가 풀어놓아 주어야 합니다.

나사로에 관한 행적은 요11:44절에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요12:1에 다시 등장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요12:1~2)
그가 풀려진 자유인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해 있습니다. 천국의 말씀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음주는 영적 대각성전도집회 입니다. 영적잔치를 벌여놓았습니다.
우리가 초청할 사람들은 바로 나사로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로들을 우리 옆에 살려놓으셨습니다.
다가가서 풀어놓기만 하면 스스로 걸어나와 말씀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한 주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진력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고정관념을 깨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를 나에게 붙여주신 것은 그의 묶여있는 것을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것을 풀어 줄때 그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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