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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가지 죄 (마 2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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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세 종류의 죄인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시기하여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유대지도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실리를 선택한 빌라도입니다. 세 번째는 진리에 무관심하고 충동에 이끌린 무리들입니다. ‘시기심’과 ‘실리주의’와 ‘진리에 대한 무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다지 큰 죄처럼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세 가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치명적인 죄악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죄들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불법 공회에서 사형판결을 받으신 예수님은 새벽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1-2).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철야심문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정죄된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유대인의 종교문제에 관심두지 않을 빌라도에게 넘길 때는, ‘정치적 반란죄’라는 명목으로 고소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왕은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 자체는 구약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호칭에 합당했으므로, “네 말이 옳도다”고 긍정하셨습니다(11).

그 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소가 빗발쳤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고, 빌라도에게도 한 마디 대답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12-14). 그렇게 하심으로 이사야 53:7절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자기의 억울함을 항변하고 재판장의 자비를 구하는 다른 죄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빌라도에게 기이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넘겨줬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18).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아내도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19)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재판하는 일에서 발을 빼기 원했습니다. 그는 명절에 죄인 하나를 특별 사면하던 전례를 기억해내고서는, 무리들에게 ‘예수 바라바’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했습니다(17). 무리들이 원하기만 하면 유대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도 예수님을 풀어줄 수 있는 절묘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미 무리들에게 손을 써두었습니다(20). 무리들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이름을 가졌던 바라바는 로마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민족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로마는 이런 자들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반란을 막아왔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바라바를 풀어주고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악도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예상치 못한 무리들의 요구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무리들의 요구를 외면했다가는 민란이 발생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물을 가져오게 해서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4)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25)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대신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26).

시기심

때로 여인들에게 있는 ‘시기’는 매력의 한 요소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시기심이 자신을 독려하는 자극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기 5:2절은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시기는 언제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은 인류 최초의 존속 살해 사건이었는데,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일은 이복형제 간에 벌어진 엽기적인 인신매매 사건이었는데, 역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다가 땅이 갈라져 멸망당했던 고라당 역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2007년 2월 8일자 중앙일보 신문에, 모든 이들이 선망하던 하늘 위에서 나락으로 추락했던 한 여인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지난해 7월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승선했었던 여성 우주 비행사 리사 노왁이 삼각관계에 있었던 동료 우주 비행사 콜린 시프먼을 살해하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연모했던 남성이 다른 여인을 더 사랑한 것에 대해 시기함으로 발생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이 기사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는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시기심의 뿌리에는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른 잘남 때문에 자신의 못남이 폭로되는 것이 싫어서 상대방을 미워하고, 상대방도 못나게 되도록 깎아 내리려는 태도입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을 세워주고 살려주기보다 어찌하든지 훼방하고 죽이려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실수록 자신들의 거짓과 위선이 폭로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의 인격 비난하며 사역을 훼방하였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죽기까지 비난과 조롱을 계속했던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시자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시기는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입니다.

실리주의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과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을 단번에 간파할 만큼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진리보다 실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죄 없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이 양심에 걸렸습니다. 곧바로 석방했다면 그의 양심은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유대 지도자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현실과 타협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무리들의 요청으로 원만한 타협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의 양심은 다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실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양심의 소리를 억누른 채 예수님을 채찍질 하였고, 마비된 양심으로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역사에서 두고두고 예수님께 고난을 가했던 장본인으로 정죄당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많은 똑똑한(?) 신앙인들이 진리와 함께 실리도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나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그 일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성경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7:14)고 했는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넓고 편한 길을 찾는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했는데, 핍박 없이 경건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둘 다 동시에 취하려는 태도는 진리와 실리를 동시에 가질 수 없는 때마다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갈등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양심의 소리를 누르고 결국 실리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리의 길만을 걷고, 경건을 위해서는 핍박도 감수하겠다는 단호한 태도가 없다면 나 역시 빌라도가 될 수 있습니다. 실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빌라도의 행동 역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가 되었습니다.

영적 무지

군중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정치놀음에 이용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눈 없는 괴물처럼 몇 사람에 의해서 이리저리 선동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한 종교 지도자들이나, 혹은 알고도 실리를 선택한 빌라도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외침은 예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와 같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바라바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선택했더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진리의 기준이 없어 사람의 말에 따라 이리 저리 요동하는 그들의 무지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빌라도를 보면 진리를 안다는 것과 진리대로 행한다는 것은 분명 별개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안다고 해서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설교하는 만큼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늘 회개하면서 설교를 준비합니다. 저로 말씀을 깨닫고 설교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설교한 내용에 저 역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 하셨기 때문입니다(약 1:22).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고 있다면 악에 이용당하기 쉽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본문의 무리들을 통해 확인됩니다.

4세기 이후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진리를 탐구했던 많은 수도사들이 교회사에 등장합니다. 성경이 귀하던 시절, 안타깝게도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시된 바른 진리 보다는 영지주의 문서와 같은 이단적인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도원 운동 속에는 성경을 떠난 신비주의가 많이 있습니다. 명확한 진리의 기준이 없었던 그들은 선임 수도사와 인간 교황에게 복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악한 교황에게 이용당하게 되었습니다. 수도회가 이단사냥의 앞잡이가 되었던 것이나 십자군 운동들이 그 예입니다. 루터가 성경을 연구하면서 복음 진리를 재발견하기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어둡고 두려운 중세시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 역시 죄입니다. 그 죄 역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 시대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시기심과 실리주의와 영적 무지는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며,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바라바처럼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우리가 은혜로 놓임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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