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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성도 (고후 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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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학교 학생이 '요나와 큰 물고기'라는 그림책을 가슴에 안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비신자가 그 학생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요나와 큰 물고기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느냐?"
  그러자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오늘 교회학교에서 배운 내용인걸요?"
  비신자는 더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얘야, 너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낮, 3일 밤을 살다가 살아난 이야기가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느냐?"
  잠시 생각하던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요나 아저씨에게 물어볼께요."
  비신자는 더 어려운 질문을 던집니다.
  "요나가 만일 천국에 없고 지옥에 갔으면 어떻게 할래?"
  학생은 즉시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아저씨가 물어보세요."

  위대한 종교 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그들의 모든 노력과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개혁의 명제를 주장하였습니다.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당시의 교회에 과감히 반기를 들고 개혁의 깃발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정열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미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미쳤던 자들에 의해서 굳게 세워지고 성장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매우 중요한 핵심을 진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거나 그들을 위한 봉사자가 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일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고난과 고통과 모든 환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철저히 자신의 기쁨을 포기하였습니다.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람과 교회와 주님을 이용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와 우리 자신들이 바울의 심장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시작한다면 놀라운 감동과 기적은 여기에서 바로 시작될 것입니다.

1. 살든지 죽든지
  본문 8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사도 바울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어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진정은 주와 함께 거하는 것뿐입니다. 종말론의 신앙에 속하는 것이고, 신앙은 주의 뜻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칼빈은 "진정한 믿음은 죽음을 경시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소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이 신앙에 도움이 되고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음을 확신한 신앙인들의 거룩한 모습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에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주님의 재림을 경험하고자 희망했으나 점차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죽음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깨달아 가는 생명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죽게 되는데 언제나 주님을 뵙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 때문에 주님을 기쁘시게 못하거나, 죽는 것 때문에 주님을 슬프게 해 드린다면 최고의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사를 초월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52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있을 때, 온 도시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당시 선제후는 루터에게 대학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나로 피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거절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무모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실제적인 조처를 제안했으며, "비텐베르크에 머물러 있어야 할 종교적, 시민적 의무가 없다면 떠나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아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목회자로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설교자와 목회자처럼 영적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확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요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고통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자신감과 사랑을 가지고 세상의 고통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월드 비전>의 설립자인 봅 피어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나도 아프게 여기게 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그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림자, 안개, 풀, 꽃, 나그네, 바람,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실감하고 가슴에 콱 와 닿습니다. 인생이 생각처럼 쉽거나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낙심하거나 자살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견디고 기도하다 보면 극복하고 승리하게 됩니다. 살아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죽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 있어야 힘든 세상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성공이나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로 바뀌어야 합니다. 목적이 바뀌면 기쁨과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 방향이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U턴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새로운 세상과 인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시대의 사도 바울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어디서든지
  본문 9절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집에 거하든지 집을 떠나든지", "이 세상에 거하든지 세상을 떠나든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스러움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확신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초연하게 하며 오직 모든 관심은 주를 기쁘게 하는 데 집중하게 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과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육체를 '장막'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장막'이 인간의 초라한 생(生)으로 비유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유목민들이 장막을 쳤다가 다시 걷어 가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장막을 치고 살지만 언젠가 그것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영원한 집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육체적으로는 당장 죽지 않았으나 죄와 사망과 질병 그리고 육체적 노동 등의 고통에 놓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범죄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위치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거나 단절되었다면 어느 곳에 있든지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믿음과 순종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어디에 있든지 관계없이 기쁘고 평안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이든 천국이든, 가정, 교회, 사회와 삶과 활동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입니다.

  미국에서 세탁소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그 땅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자 세탁소를 하면서 수입의 일부분으로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세탁소를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이전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맡겨진 세탁물의 안 주머니에서 2천7백 달러가 발견되자 그는 투덜거리며 말했습니다.
  "하는 일도 힘들고 자존심도 상하는데, 이제는 시험거리까지 생기는군."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그 세탁물의 주인이 오자 그 사람에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왜 이런 것으로 나를 시험하는 거요?"
  얼마 후 세탁물 주인은 이 사람을 다시 찾아와 세탁 공장의 운영을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 세탁물 주인이 항공사의 부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세탁소의 주인은 현재 700명의 직원을 고용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이는 정직의 힘입니다. 정직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삶이 힘들다고 기준을 낮추지 맙시다. 이러한 일상의 일들을 통해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진정한 영성은 일상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주를 기쁘시게 합시다.

  가족들에게는 너무나도 책임과 사랑으로 잘 보살피고 행복하게 지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무책임과 냉정으로 일관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반면 교회에서는 예의와 품위를 지키지만 가정에서는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을 휘둘러 가족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마음과 신체에 큰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전혀 믿는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고 신뢰할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모두가 정확하고 객관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고 선교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디서든지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아지고 섬겨야 합니다. 용서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분들은 다르다"라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에 한 번, 하루에 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실천해 봅시다. 모든 성도가 매일 매일 주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을 베풀게 된다면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교회는 부흥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어디서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무엇을 하든지
  본문 10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최후의 심판대는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천국 생명과 지옥 생명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심판은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상이 크고 작음을 가리는 자리가 됩니다. 면류관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에게 기쁨인 동시에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면류관을 위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다 참았습니다. 면류관은 어떤 고통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선악간에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리고 목마른 자, 병들고 나그네 된 자, 작은 자들을 영접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 살기도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인정과 상급과 축복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며 나를 위한 기쁨이 아닌 주님을 위한 기쁨으로 삶의 목적과 기쁨의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그가 일하는 직장이나 지역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학생일지라도 학교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자녀 하나가 가족 전체를 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순종하는 한 사람의 삶이 교회 전체를 뒤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에 따라 각자의 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중심을 맞추고 있는지 항상 주의를 기울이라.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위해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함께 우리가 그분의 일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삶은 새로운 의미와 영원한 목적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부와 세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을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도록 하셨습니다.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종으로 삼아, 그들을 통해 일하심으로 로마 제국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들의 충성스런 증거 때문에 많은 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방식이며, 그 일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트리나 폴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두 마리의 애벌레가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내용입니다. 줄무늬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는 결국 진리를 발견하고 또 그 진리를 몸으로 체험하다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에는 애벌레였던 그들이 어두움과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나비로서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두움과 고통의 시간이 있으나 믿음으로 참고 견디면 금생과 내세에서 나비와 같은 영원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모든 것은 영원한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과 투자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보험이며 행복증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이제 남은 생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시다. 반드시 상상할 수 없는 기쁨과 수지 맞는 축복의 생애가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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