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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에서 세상을 넘어 (창 1:20~25, 벧전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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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들도 나무도 짐승들도 다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참 좋다‘ 이런 찬양 들으시면 참 좋지요.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참 좋습니다. 또 만드신 것을 되받아서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다 볼 수 있습니다. 들도 볼 수 있고 나무도 볼 수 있고 모든 걸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찬양하는 속에 담긴 우리의 감사의 뜻은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 말씀드리면서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인데 창조한 것은 다 보고 만질 수 있다. 그런데 안 보이는 것 만질 수 없는 것도 있다. 세상은 다 쥐고 살 수 있는데 쥐고 살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사람은 눈에 보이고 얼굴도 보이지만 마음속에 있는 마음의 깊이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느낄 수 있다. 하나님 내가 안보이지만 그 하나님이 제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제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뛰어넘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창세기 얘기의 중요한 것은 창조된 나무와 짐승과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것과 함께 즐기되 창조된 모든 것 외에 옆에 밖에 밑에 창조주가 계시다. 인간이 있지만 인간위에 인간과 함께하는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다. 창조주가 계시고 그래서 피조물들이 아름답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분을 잊지 마십시오. 이야기를 드리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제가 보기에 가장 깊이 파악하고 역사를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이라는 왕입니다.

여러분, 다윗 왕 그러면 목동이었을 때 돌팔매를 들어서 거구인 골리앗을 이긴 것이 생각납니다. 용맹스러운 목동, 후에 왕이 된 다윗. 또 예수님의 계보를 따지고 나오면 다윗이 원조입니다. 이런 훌륭한 다윗 왕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윗이 돌을 하나 들어가지고 거구인 골리앗장군의 이마를 쳤을 때 이게 기술이 아닙니다. 그 던짐 속에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 기적으로 나타나서 골리앗이 쓰러집니다. 유명한 장군 다윗, 목동 다윗, 그것만 우리가 추앙하지 마시고 다윗이 어떻게 피조물 인간으로서 창조된 세계에서 아름답게 살았는지 돌을 던진 진위가 뭔지 다윗의 아름다움이 뭔지 군인다운 용맹스럼 뒤에 숨어있는 인간 찬미 아름다움이 뭔지 제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적어 놓은 책을 통해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다윗 당시 왕 이름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프 연주를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하프연주를 들었습니다. 더욱 아름다운 하프연주를 원했을 때 어린 목동 다윗이 자원합니다. 사울이 어린애가 뭘 연주할 수 있겠냐 거부했는데 여러 번 간청 끝에 왕궁에서 하프를 연주를 합니다. 얼마나 연주가 감동적이었는지 사울이 너무 기뻐서 연주 중간에 춤을 추고 그러고 너무 좋아했습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다윗한테. 어떻게 네가 연주했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음을 연주했느냐? 다윗의 답입니다. 저는 하프를 연주할 때 하프의 마음을 읽으면서 연주합니다. 그 마음이란 것은 뭐냐 하니까 하프가 생각하는 세계와 제가 어릴 때 목동으로 느꼈던 세계를 호흡하고 대화하면서 연주하는데 제가 목동이었을 때 나뭇가지에 새들이 와서 앉아있고 좋아서 지저귀고 나뭇잎 사이로 하늘에서 번지는 햇빛이 비치면 그 빛을 바라던 빛이 가지에 물가에 빛을 발합니다. 제가 그러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제가 한 몸이 되가지고 대화하면서 연주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이  잘 자란 나무를 톱으로 잘라버렸습니다. 너무 슬퍼서 하프와 제가 함께 슬픈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저음으로 자꾸 소리를 냅니다. 이게 뭐냐면 나무 잘릴 때 느끼는 감정을 손으로 표현했더니 슬픈 곡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는 하프한테 이렇게 감정을 표현합니다. 나무 잘린 걸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그 나무는 잘렸지만 하나님은 그 나무를 베어서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려고 나무를 베었는데 하프도 그 잘린 나무의 피조물이다. 이렇게 했더니 하프가 고맙다고 기쁜 소리를 냈습니다. 마지막 피날레 기쁨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용맹스러운 왕, 이스라엘의 분단국가를 통일했던 통일의 왕, 엄청난 왕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왕이요 또 엄청난 위인입니다. 이 사람이 갖고 있고 세계를 움직이고 인간을 움직이고 통일을 했던 역량은 과도한 군상이나 용맹스런 기술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나뭇잎에 비친 햇빛을 보고 햇빛과 대화할 줄 아는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세상을 만드신 분과 깊게 진지하게 대화하면서 함께 살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골리앗을 넘어뜨리게 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물들의 결과를 보고 축하합니다. 그 결과 속에는 잔잔한 창조주와의 대화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 없이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에서 보이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 뒤에 계신 영성이 가득한 분 만질 수 없으나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과 마음 깊은 곳에서 대화를 통해서 세상을 변혁하고 저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신앙이 있는 예술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예술은 기능이 아니고 기술이 아니고 심호흡 하면서 창조주와 대화하는 깊은 삶의 요소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피조물은 다 우리 것으로 살 수 있으나 행복은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와의 생산적인 삶의 대화를 하면 우리는 진실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창조물과 함께 세상에 사십시오. 그러나 창조하신 그분과 함께 대화하고 호흡하면서 사십시오. 간단하지만 심오한 우리의 삶의 방향입니다. 성경말씀을 다시 넘어가 봅니다.

오늘 베드로 전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방법 중에 하나가 마치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항상 길을 떠납니다. 언제까지 떠나느냐 하면 마지막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들어서 나그네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언제까지 나그네로 살아 가냐 하면 그 에덴동산이 완벽한 에덴동산으로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동산에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이 말을 오늘 우리에게 비유한다면 여행객입니다. 우리 이 세상에서 여행하듯 살아갑니다. 요즘에 인천이나 김포공항 많이 다녀오시죠. 저도 가방크기만 보면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어떤 분의 얘기입니다. 처음 등산을 하려고 하는 초보자는 들고 가는 가방이나 배낭이 굉장히 크고 무겁다. 이유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슨 필요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짐이 크고 무겁다. 매번 외국을 가거나 등산을 가는 사람은 짐이 작다. 필요한 것을 다 안다. 그러니까 불필요한 것을 다 지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전문가의 짐은 가볍다. 그리고 알뜰하다. 외국여행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여정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고통만 지고 살지 옆집 옆 사람 모든 고통을 아니 이 나라 모든 사람의 고통을 함께 지고 끙끙댑니다. 자기가 무슨 구세주라고 세상의 모든 고난을 다 짊어지고 끙끙대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인생 여행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오늘 성경말씀은 초보자다 이렇게 부릅니다. 신앙의 초보자도 그렇게 살고 인생의 초보자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는 전문가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창조하셨을 적에 저한테 주어진 고통의 짐이 있습니다. 제가 감당할 만큼 고통이 있지 세상 모든 고통을 세상 모든 즐거움을 다 제가 지으라고 하나님이 저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나무가 많은데요, 나무마다 다 제몫에 쓸 용도가 다릅니다. 모든 나무가 똑같이 용도가 같은 게 아닙니다. 인간도 같습니다. 한 용도 자체가 아름다운거지 모든 용도를 다가져야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사랑하는 교인 여러분 세상 짐 다 지지 마십시다. 질 필요도 없고 질수도 없습니다. 근데 왜 인간걱정을 다 끌어안고 살아갑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질 만큼만 지어라. 세상에 수많은 사람을 만든 이유는 모두가 다 각자 다양한 달란트에 따라서 각자 짐을 주었으니 자기 짐 지고 살자.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입니다. 그대들은 나그네처럼 살아가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냥 끙끙대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모든 짐에서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우린 자유인이 돼야 합니다. 자유인은 남의 짐을 쓸데없는 짐을 지고 끙끙대지 않는 사람. 두 번째는 자기 짐만을 지대 스스로 온갖 짐을 혼자지고 혼자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짐을 지대 하나님이 대신 지어 준다고 하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자기 짐을 지는 사람. 이 사람은 오늘 말씀이 자유인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자유인이 굉장히 고마운 축복이라고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유인이란 불합리하고 쓸데없는 짐이 아니라 내가 꼭 져야할걸 자발적으로 집니다. 고통도, 기쁨도, 눈물도, 웃음도 지겠습니다. 단 눈물과 웃음과 짐은 나 홀로 지는 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주가 함께 지워 주신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짐을 지어주신다니 왜 나 홀로 질려고 고생만 하십니까? 불필요한 고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나그네 된 여러분 자유함을 받았지 않습니까? 자유 속에는 선택받은 종으로서의 자유 동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자율적 결단이 포함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박입니다. 그 여러분이 아시는 문호 여러분이 계신데요,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의 인생경험입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자가 사랑한답시고 여성한테 접근할 때는 봄이 되고 결혼한 다음에는 겨울이 된다. 제가 남자로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근데 또 어느 분이 받아가지고 해법하나를 얘기했어요. 남자가 야생동물이라면 여자는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사람이다. 이것은 폴리스바헬 이라는 사람이 한 얘기입니다. 이 두 얘기를 합쳐보겠습니다. 남자가 사랑한다고 접근할 때 봄이 되는데 결혼하고 나면 겨울입니다. 그런데 겨울을 봄으로 뒤바꿔 놓는 건 여성여러분의 책임이자 축복입니다. 홀로 겨울을 봄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이 바꿔 논 과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짐을 서로 지울 수 있답니다. 차가운 겨울의 짐도 같이 지고 따스한 봄빛도 함께 나눌 수 있답니다. 이걸 가리켜서 자유하는 신앙이라고 이름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인생 여정 동안에 여러분에게 맞는 여러분에게 주어진 짐을 지십시오. 홀로지지 말고 나와 함께 나누어지십시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께서 직접 얘기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면서 세상에 속해서 사는데 여러분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지만 세상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축복이 여러분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살고 세상에 몸담고 있으나 세상을 넘어서 사는 지혜와 결단. 우리 먼저가신 강원용 목사님이 평생 자기 신학 철학 역사 인생관을 총 정리하면서 영어단어 두자로 이렇게 정리하시고 가셨습니다. 인생은 세상에 와서 사는 것이다. 세상에 있으면 어차피 함께 사는 거다. 그래서 between. 그런데 살아가면서 우리끼리만 사는 게 아니고 보다 높은 깊은 우리 창조주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beyond. 저는 목사님의 철학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 모두 세상에 있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북적되는 것만으로 인간의 행복이나 삶의 목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세상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으나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가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지혜 결단 그것을 신앙이라 이름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조금 넘어서는 결단. 넘어선다고 위로만 넘어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넘어서 있는 게 아니라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정도 반드시 위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옆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즐길 수 있는 모든 것 이것이 세상이라고 치면 세상과 함께 즐깁시다. 기쁨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고 다 나눕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위에 있는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과 행복과 아름다움의 뜻 그것을 우리가 버리면 이 세상 속에서 사는 삶은 그저 아름답지 못한 삶일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만져 볼 수 없다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 할 수 없다고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초세상적 가치 초속세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뭐냐고 물으면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을 넘나드는 넘어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축복을 받아들이는 것 저는 그게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걸 위해서 이렇게 우리한테 축복된 행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있는 그대들을 친구로 삼겠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씀하시고 아버지 명령에 따라서 십자가를 집니다. 예수님만이 질 수 있는 모든 세상의 고통을 다 지고 홀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친구의 고난에 동참 할 수 있는 것 엄청난 용기입니다. 이웃에 고난에 아픔에 서로 동정하고 동참할 수 있는 것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넘어서는 작은 발걸음입니다. 더 큰 게 있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신 울음바다의 십자가로만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를 위해서 짐을 지시되 친구의 성공과 친구의 기쁨과 친구의 왕성 친구 된 우리 모두의 부활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거 동정하는 거 어렵지만 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 나보다 훨씬 더 성공하고 이웃이 성공하고 이웃이 잘되고 나는 못되고 이웃사촌이 논사면 기쁜 게 아니라 배가 아프고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모든 세상의 역사를 보면 친구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도 축복이지만 친구의 기쁨과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친구라 보시고 그대들의 고난을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하신일. 두 번째 우리를 예수님과 똑같은 위치에 하나님의 성공한 아들과 딸로서 축복받은 부활자로서 우릴 성공시키려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예수께서 십자가 지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진 십자가의 예수가 너무 고맙습니다. 즐거움을 더 드리려고 세상 속에 있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세상을 넘은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니 그래서 이분이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부활과 생명의 길로 가자. 보이지 않지만 가자. 약속받은 세계. 약속받은 미래를 향해서 가자. 이것이 작지만 큰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오늘 여러분의 삶에 앞길의 안내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우리 여행하는 우리 목표를 향해서 믿고 전진 하십시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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