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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해 속에서도 거침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 (느 4: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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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설날의 명절이 다가오게 됩니다. 설날이 되면 우리는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연고 없이 애매한 말을 듣기도 하고 또 마음에 상처받는 일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깊은 상처를 받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고까운 생각을 가지지 말고 오히려 그와 같은 일들을 당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말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바른 일 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애매한 소리도 듣게 되고 또 마음 상하는 일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그와 같은 것을 이겨내는 과정과 삶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견고한 주의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원함대로 되고 아무런 어려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도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을 배격하는 모든 세상의 어두움의 세력 때문에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겪고, 핍박을 받고,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수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릇 경건히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때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어려움도 겪지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겪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바른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왜 바른 일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까? 그것은 오늘 우리가 성경을 같이 나누어보면서 생각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3주째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는 슬픈 소식을 듣고 회개하며 애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받는 믿음과 승리의 출발점에 서는 느헤미야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는 하나님 앞에 사명을 깨달았을 때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철저히 준비하며, 또 많은 조롱과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계획하고 생각한 것을 시도하는 추진력 있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세 번째 주는 대적들의 거친 방해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대적들의 많은 방해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위한 느헤미야와 백성들의 단합된 마음속에서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각 족속대로 각 사람대로 자기 자신이 해야 될 몫을 가지고 와서 성심껏 마음을 합해서 성벽을 수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게 될 때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들은 방해하며, 분노하며, 비웃으며 여러 가지 훼방을 놓게 됩니다.

<3절>을 보면 산발랏의 부관 도비야는 ‘너희들이 건축하는 저 성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라고 조롱하면서 그들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일을 지속적으로 진행합니다.
그러자 이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사마리아 일대를 총괄하고 있었던 이 산발랏과 주변사람들은 예루살렘도성이 재건되고 유다백성들이 영적으로 흥왕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가지게 될 때, 그들이 필연적으로 약화될 것을 생각하여서 그냥 있지 못하고 분노하며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서 쳐서 요란케 하자’ 라고 그들은 선포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파수꾼을 세워서 방비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유다사람들은 이일을 듣고 마음이 놀라 무거워지게 됩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동요 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느헤미야여 우리가 이제까지 많은 수고를 해서 힘은 다 쇠진했는데, 해야 될 일은 너무 많고 건축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더구나 우리의 방해자들은 우리를 쳐들어와서 우리를 살육한다고 하니 우리가 거기에 많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방비책도 없고 지금 대책도 없는데 어떻게 이 일을 계속 하겠느냐.” 라고 그들이 마음에 흔들려 느헤미야에게 간청합니다.

더욱이 산발랏 일당은 어떻게 하느냐하면 사마리아 근경에 있었던 유다사람을 포섭하여서 그들에게 이 유다백성들에게 유혹을 합니다. “산발랏과 주변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너희를 죽이고 성벽 건축하는 것을 방해할 터인데, 너희가 큰 어려움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너희는 이 일을 중단하라.” 하고 사람들을 보내서 유다 백성이 유다백성에게 어지러움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무려 열 번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집요하게 산발랏과 도비야와 방해하는 일당들이 유다백성들을 어지럽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은 민심이 기울어지는 것 같은 것을 느꼈을 때 백성들을 모아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나님이 방해자의 꾀를 폐하실 것이라.” 마침내 하나님께서 방해자의 꾀를 폐하시고 성벽수축의 지속적인 역사를 진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절반을 역사하고 절반은 지키는 일을 하게 됩니다. 즉 백성들 가운데 절반은 그들이 쳐들어왔을 때 방어하고, 절반을 그 역사를 계속합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는 일을 하면서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다른 한손에는 일하는 도구를 들고 일을 합니다. 전력을 기울여서 그 일을 해도 힘겨운 판에 절반이 방어하고, 절반이 일을 하고, 절반은 그 가운데서 한손으로는 방어하면서 한 손으로는 기계를 잡고 일을 하니 일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음에 단호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이 커서 우리가 어떤 쪽에서 공격을 받던지 한꺼번에 대처할 수 없으니 내가 나팔을 불면 그 나팔 부는 데로 다 몰려오라. 그리고 우리가 거기서 전투하리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하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리의 절반은 동 틀 때부터 일어나서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방어하며 그들의 일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모읍니다.

“너희 종자들까지 다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성안에서 거하게 하라.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말하자면 그 모든 종자까지 성안으로 다 들여오니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을 방어해야 되는 배수의 진을 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옷을 벗지 않고 물 길으러 갈 때도 기계를 잡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밤낮 철저한 대비죠.

군대에 가면 ‘5분 대기조’라는 게 있는데 내무반에서 몇 명씩 차례대로 순번을 정해서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뛰어나갈 수 있게 준비해서 밤에도 군복 같은 것을 하나도 풀지 않고, 그대로 입고 자는 겁니다. 옆에 총도 놔두고, 심지어는 군화까지도 신고 자는 겁니다. 저도 순번이 되어서 해보면 옷 입고 자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신발신고 자는 것은 어렵더군요. 신발이 무거워서 잠이 잘 안 옵니다. 그것도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하니까, 나중에는 피곤해서 자기는 하는데 마치 그런 겁니다. 언제든지 수시로 명령만 떨어지면 즉각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은 옷을 벗지 않고, 심지어는 물 길으러 갈 때조차도 그들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물 길으러 가는 순간 까지도 열심히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격렬한 영적인 전투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도 하나님의 역사는 수많은 방해 중에서도 거침없이 진행되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수많은 방해에도 거침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내용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곳에는 방해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가 있거나 잘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영구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원하시고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신다면 우리가 하는 일에 어려움 없이 잘되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어려움이 생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이 잘 안되기도 하고 마음 상심하는 일까지 생깁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이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그것을 언제나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도 배양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 일을 수년 동안 하게 한다면 우리는 그냥 그 일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잘 극복하며 해결하고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그 일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그 일을 감당하는 사이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겸비하여 생기게 됐을 겁니다.

어려움을 겪으며 그 일을 했을 때 우리는 더 큰 능력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빵 하나만 하늘에서 떨어뜨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빵을 얻을 수 있는 능력까지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빵을 하나 주세요.’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면 우리는 빵을 얻어서 먹을 것입니다. ‘하나님 빵을 하나 주세요.’ 하고 기도했는데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일거리를 주셨어요.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빵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게 됩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과정 속에서 돈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습득 했어요. 다음에는 ‘하나님 빵 하나 주세요.’ 하는 기도를 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 생활 속에 그 심정으로 나가 일하면 빵을 얻을 수 있는-하나님의 응답을 얻을 수 있는-생활 속의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빵 한 개 주시지 않고 평생 동안 빵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하면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애씀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일을 했을 때 우리들에게 그 능력이 습득되어서 한 번 한 것은 우리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 능력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떤 일을 이루어주셔도 새로운 일도 이룰 수 있도록 용기도, 지혜도, 은혜도, 모든 능력도 축척시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먹여주셨습니다. 일하지 않아도 하늘에서 아침마다 만나가 널려져 있어서 광야에 가서 그것을 거두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게 됩니다. 가나안에 입성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첫 번째 소산물을 먹게 될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다음날로 끊으셨어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슴에 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익숙했던 만나가 끊겨졌다는 것은 이들의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었던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끊으신 것은 그들을 굶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소산물을 먹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로 다가오십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 같지만 그 어려움을 넘어서시는 새로운 역사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왕이면 일하지 않고 먹는 것보다 수고하고 애써서 먹는 것을 더 큰 축복으로 여기십니다.

<시편 128편>을 보면 ‘네 손으로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우리 손으로 수고하고 먹는 것을 복되고 형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동을 축복하십니다. 수고하는 것을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우리가 먹고 지내는 것보다 우리 손으로 수고하고 애쓰고 땀 흘려 먹고 지내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이들을 무기력하게 광야의 만나로 먹이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만나는 이들이 그 자리에 정착할 수 없으니까-씨 뿌려 거둘 수가 없으니까 이들에게 비상한 방법으로 주시는 것이고 가나안에 정착할 때 첫 번째는 뿌려져 있는 소산물을 먹고, 두 번째는 그들 스스로 밭 갈고 씨 뿌리고 잡초 뽑고 그것을 거두어서 먹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죠? 이들을 가나안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들에게 능력을 부여해서 이들이 얻어먹는 사람이 아니라, 이들 스스로가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어려움이 있을까요? 어려움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능력을 부여하시기 위함입니다.

노동의 수고의 결과로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기를 쓰며 발악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사단의 역사도 흉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세력들이 약해지거든요.

여러분 예루살렘이 강해지면 예루살렘 주변에 있던 사마리아지역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약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산발랏과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힘을 얻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분해하며, 마음에 근심하며, 그 마음속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무너뜨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분열을 일으켜서 자신들의 활동공간을 넓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해서 분개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움가운데 굳건히 서 있거나 그들이 결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때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져요.

그러니 그들 사이에 이간을 시키고, 그들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게 하고,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 미혹이 일어나서 분개되어 서로 간에 혼란하게 만들고, 마침내 무너지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노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협박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일부가 무너지게 되면 그것을 따라서 틈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활동공간을 넓히고 하나님의 백성을 다 분개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산발랏과 그 일당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가 예루살렘에 쳐들어가서 저들을 죽이자 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백성들이 마음에 동요가 됐어요. 또 산발랏 주변에 있었던 유다 백성들을 포섭해서 백성들에게 가서 “산발랏과 그 일당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죽는다.” 이런 말을 한 두 번이 아니라 무려 열 번이나 반복해서 백성들을 미혹하니까 백성들 가운데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힘도 쇠진했고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저들은 쳐들어와서 우리를 죽인다고 하니 우리가 많이 살육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성은 그만 합시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기에 단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고 분명히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단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기를 쓰고 발악합니다. 그러나 그것일 뿐입니다.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요.

사단는 우리 속의 맹수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늘 으르렁 거리지만 우리를 해치지 못해요.
여러분 보세요. 사단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체적으로 해친 일은 없습니다. 협박만 했을 뿐입니다. 느헤미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봐도 그들이 칼 들고 달려온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이와 같은 협박 몇 마디에 그 백성들이 무너지는 겁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도 말 몇 마디에 그들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곳에 방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 백성을 달아보시고 견고케 하십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그 기회를 통해 사단의 세력의 간악함과 끈질김도 깨닫고 대처 능력도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능력입니다. 우리가 책을 보아서만 학습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과정 속에 그 과정을 거치며 우리에게 학습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이래야겠구나!’ 하는 학습의 능력이 생기는 것이지요. 학습속도도 우리에게 있어서 진보하게 됩니다. 전에는 똑같은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습득을 못해서 다음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다음에 실수하고 또 실수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게 아니다.’ 라고 느끼게 되면 같은 어려움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분명한 학습의 능력이 이루어지고 학습속도가 빨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학습시켜 주시고, 그 백성을 달아보고, 견고케 하신다는 겁니다.
이 방해하는 자들의 심정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4장과 그 전후를 다 통 털어서 그들은 분노합니다. <4장 1절>을 보면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루시는 곳에는 사단의 세력이 분노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다니’ 하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비웃습니다. ‘암몬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라고 비웃습니다. 조롱하고, 비웃고, 분노하고, 그리고 구체적인 방해를 합니다. 모함을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의 민심을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모습 보세요.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해서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다 불타버린 돌을 흙무더기 속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이와 같이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까요? 실제로 행동은 없었어요. 없는 일을 만들어서 유포합니다.

<2장 19절>을 보면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느헤미야는 왕을 배반하고자 하는 생각을 해본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을 배반하고자 한다고 그들에게 이와 같이 위협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하는데 사단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를 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럼으로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전혀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유포한다는 말입니다. 위협을 주고 협박함으로 실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을 중단하거나 그르치게 합니다.

<4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이 말을 듣고 정말 미혹되는 사람이 있었어요.
<4장 11절>을 보면 우리가 힘도 쇠진하고 해야 될 일도 많고 저들이 달려들면 우리가 많이 죽게 될 텐데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여기서 그만 둡시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괴롭힌 적은 없었습니다. 느헤미야서 전체를 통해서 그들은 행동 하지는 않았단 말입니다. 왜죠? 하나님이 막아주시니까.
그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군사에게 달려와 봤자 일거에 무너지므로 그들은 달려올 수도 없고, 달려와 봤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아주신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자체를 막아버리십니다.

여러분 야곱이 세겜 땅에 머물 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족속들을 그의 동생을 디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으면 내 동생 디나와 결혼하게 해 주겠다 해서 그들을 할례 받게 하고 그들을 디나를 겁간한 것에 대해서 원수를 갚아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그러니 세겜 족속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 불 일어나듯이 일어나서 야곱의 족속들을 다 죽이려고 달려들어요. 야곱의 족속들을 몇 명 안 됩니다. 그러니 그들이 도망갑니다. 하나님 앞에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가 모든 이방신을 섬기던 것을 다 회개하고 의복을 갈아입고 벧엘로 올라가자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통곡하며 기도하고 벧엘을 향해서 올라갑니다. 세겜 족속들이 죽이려고 쫒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려운 마음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쫒아가려는 마음을 없애주셨어요. ‘쫒아가다가 아이, 쫒아가기 싫다. 그냥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가 안전한 것은 우리를 해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던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버려서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제거하려고 하고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해서 합심을 흐트러뜨리려고 하는 것이지요.

<6장2절>을 보면 느헤미야에게 오노평지로 오라 기도하고 협력하여 같이 어떤 조약을 맺자. 그런데 실제 그 이유는 무엇이죠? 오노평지에 오면 느헤미야를 암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느헤미야는 미혹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안 갔습니다. 갔으면 죽었죠. 죽었으면 느헤미야가 무너지고 백성들은 아무 일도 못하고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6장 10절>이하를 보면 스마야라는 사람을 매수합니다. 스마야는 전후 사정을 볼 때 제사장이었어요. 그런데 이 산발랏 일당에게 돈을 받고 매수되어서 거짓예언을 하게 됩니다. 두문불출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이 느헤미야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스마야여 어쩐 일입니까? 몸이 편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하고 찾아와서 문안을 드리지요. 그랬더니 스마야가 무어라고 하느냐면 “내가 이와 같은 계시를 봤는데 오늘 밤에 네가 적들에게 죽임을 받게 된다. 그러니 너는 성전 외소로 들어가서 문을 꽉 닫고 피하여 살자.” 그랬더니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하죠? 가슴에 큰 충격이 있었겠지요. 그것도 제사장 스마야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믿음 안에서 그의 분명한 길을 결정합니다.
“스마야여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성전 외소에 들어가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제사장이 아니었거든요.

<민수기 18장7절>을 보면 성전외소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 다른 족속이 들어가면 다 죽게 되어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 하나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사람 손에 죽는 것이 더 낫겠나이다.’
이건 이중적인 계약이었어요. 만약에 이 느헤미야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성전 외소로 들어갔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손에 죽죠.
하나님이 살려주신다고 해도 백성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느헤미야는 율법을 어긴 자입니다. 지도자로서의 모든 위치와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의 모든 공적인 삶은 끝나는 겁니다. 그러니 느헤미야가 거기 가서 목숨을 부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웃시야가 분양하러 성전에 들어갔다가 문둥병에 걸린 게 역대 <26장16절> 이하에도 나오잖아요. 느헤미야는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나는 내 목숨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대한 내 믿음과 율법을 버릴 수가 없나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성전 외소에 들어가겠습니까?” 하고 스마야의 거짓 예언을 물리칩니다.
이 스마야는 산발랏에게 매수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얼마나 슬픈 일이 있겠습니까? 제사장을 맡은 사람도 이와 같이 매수당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백성들 사이를 이간하려고 하는 겁니다. 합심된 것을 흩어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사단의 역사는 너무도 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가운데 믿음의 원칙에 따라서 그의 길을 소신 있게 결정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했습니다. 오노평지로 오라고 할 때 미련해서 ‘오, 그런가보다.’ 라고 그저 순박한 마음에 갔다면 느헤미야는 죽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 왔어요. 내가 거기가면 저들이 어떤 계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서는 이와 같은 영적인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또한 우리는 냉철한 의지,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냉철함을 잃게 되면 모든 정세를 판단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추진력을 가질 수가 없어요. 우리는 뜨거운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써 그 모든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한 손에는 사랑을, 한 손에는 공의를 가지고 우리 인간을 치리하시는가요. 하나님께서 공의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람은 무기력해져요. 또 하나님께서 사랑이 없이 공의만 실행하시면 우리 인간은 헤어날 기회가 없이 모두가 멸망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가지시며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롭지만, 우리에게 비둘기 같이 순결함을 동시에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지혜를 동시에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되 따뜻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주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무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냉철하게 분별해서 추진력 있게 달려 나가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따뜻한 마음으로 순박하고 순결한 사람이 되어 우리는 어리석은 사단의 꾀에 말려들지 않는 뱀처럼 지혜로운 지혜를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열정을 가지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분명하고 냉철한 판단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단의 역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진행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는 방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거침없이 진행됩니다. 방해가 있다는 것이 그 일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방해 때문에 더 견고해 질수 있고 더 굳은 동기유발이 이루어집니다. 방해는 그들의 사명을 더 굳게 합니다. 물러설 수 없는 겁니다. 이들이 방해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 맞아, 내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진데 내가 또 다른 어려움을 극복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거야. 방해는 더 큰 의지와 영적 각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어려움은 우리들에게 영적각오를 더욱 더 큰 승리를 향한 징검다리를 삼게도 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하나하나 딛고 나가다 보면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는 겁니다. 오히려 어려움이라는 것은 그것을 극복함으로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니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이거 극복하면 목적지에 다다르리라는 소망을 더 굳세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어려움을 딛고 가면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에 이를 것입니다. 방해를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백성을 규합하여 힘을 합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어려움을 당했을 때 느헤미야는 기도함으로 힘을 얻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룹니다.

<4절>을 보니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절>을 보니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려움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어떤 종류라면 한번 따라서 합시다.
‘악한 세력을 꺼꾸러지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였어요. 여러분 굉장히 무섭죠? 너무 잔인한 것 같죠? 느헤미야의 기도는 그겁니다.
‘하나님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서 이방인에게 사로잡히게 하소서 악을 덮지 마옵시고 죄를 도말 하옵소서’

왜 느헤미야가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 느헤미야가 잔인해서 이런 기도를 한 게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사단의 세력은 분명히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목상 섬기는 자와 더불어 대전투를 이룹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멸하라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칼을 들어 시냇가로 가서 한명도 빠짐없이 다 죽여 버렸어요. 얼마나 잔인해요.

여러분 성지순례에 가시면 엘리야 기념교회당 앞에 보면 엘리야 동상이 있는데, 칼을 들고 선지자가 사람을 죽이는 이런 동상입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몰라요. 표정도 무시무시합니다. 왜 그렇게 해놨을까요? 하나님께서 죄악을 그렇게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했을까요? 하나님께 항거하던 모든 사람들을 광야에서 다 묻어버렸어요. 여호수아 갈렙을 제하고는 모두 새로운 세대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여보낼 때 모든 죄를 씻고 들여보내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악은 깨끗이 척결돼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했습니다. 갖은 만신 고통 끝에 여리고성을 점령했어요. 너희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은 욕심 때문에 다 훔쳐서 숨겨놨어요. 아이성에 진격하니까 주민이 한 삼천 명 되는 너무 하잘것없는 성이었어요. 전투에 대한 계획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다 이길 꺼야 하며 갔더니 대패하고 말았어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교만했던 거지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뭐죠? 아간이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겼지요? 아간과 그의 가족을 다 찾아서 죽이고 불살라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아이성을 정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하나님이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있어서 악을 뿌리째 뽑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악은 계속 살아나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그들 전체를 무너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고 이방인에게 사로잡히게 하옵시고 그 악을 덮어두지 말고 도말하지 마옵소서” 우리는 이와 같은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사단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대신 싸우심을 믿음으로 담대해지는 겁니다.

<4장 20절>을 보니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힘을 합했습니다.
<4장 22절, 23절>을 보면 ‘백성들을 구해서 너희 종자까지 다 들어와라’ 이제 성안에 다 들어오는 겁니다. 어차피 성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쫒아 파수하는 사람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 일어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물 길으러 갈 때도 기계를 잡았으니 그들은 어떤 순간에도 방비하고 수고하고 애썼던 모습입니다. 방해를 극복하는 일을 이루는 최종적인 요소는 무엇이죠? 결코 중단하지 않고 그 일을 끝까지 이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단호한 의뢰와 의지죠. 하나님의 백성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분명한 것이 있지요. 하나님께 대한 단호한 의지예요.

여러분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요? 단호함입니다.
믿음의 진리에 선 것은 단호하게 확신하고 거기에 대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흔들립니다. 잔가지는 흔들려요. 굵은 가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큰 나무의 뿌리와 기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아서 일시 휘청거릴 수 있으나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분명한 의지와 의뢰와 신뢰를 가지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끝까지 중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음을 단합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끊이지 않고 그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과감히 배격합시다.”
“끝까지 하나님의 일에 중단 없이 달려갑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단호한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세 번째는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인간들의 뜻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두 가지 물결이 흐르죠.
하나는 산발랏의 일당이 끝없이 방해해요. 느헤미야와 이탈리아 백성이 끊임없이 방해를 받으면서도 그 일을 극복해서 결국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느헤미야의 물결이 방해하는 물결을 다 덮어서 흘러가게 하는 겁니다. 이게 세상의 물결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늘에서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어요. 유유히 흘러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산꼭대기에서 물을 흘리면 결국 그 물은 산 아래로 흘러내립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섭리로 결정하면 인간의 일은 이러저러한 과정과 절차가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하신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욥기를 보면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게 있죠? 내가 아무리 잘 한 듯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너희가 아무리 못한 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
그래요. 하나님은 너무나 큰 분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우리가 아무리 못해도 그것에 영향을 입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좀 실수해도, 내가 좀 잘해도, 내가 좀 못해도, 그것에 결정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역사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럼 반대로 하면 어떻게 돼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못하는 나를 잘 하게도 만드시고, 실수하는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도 하고, 우리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어떻게 흐르는가를 봐야 합니다. 땅에서 어떤 역사와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역사와 흐름을 이루시는가를 우리는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을 봅니다. 느헤미야의 마음에 사명을 주었어요. 백성들이 느헤미야를 통해서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어떤 의도들을 보여주지요?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방해하는 세력들은 무엇이지요? 방해로 끝날 뿐입니다. 그 방해가 끝까지 다 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시작하셨으면 하나님이 이루시겠지요. 그 말은 방해가 있어 휘청거리나 시간 지나면 소멸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죠. 방해자들의 방해를 볼까요? 실제적인 역사가 없는 위협이에요. 분노해요.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없는 일을 만들어냅니다. 모략을 합니다. 실제가 있어도 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참 신기하잖아요.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이 한 것은 말뿐이었어요.
그런데 백성들은 거기서 흔들린 겁니다. 느헤미야가 아니었으면 백성들은 흔들렸을 겁니다. 한 일이 무엇입니까? 말밖에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계략부린 것밖에 없어요. 실제적인 실력행사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흔들렸던 거예요.
단호하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나가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흔들려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일이 잘되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분노하고, 비웃고, 계략을 부리게 됩니다. 여러분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때 분노하며 얘기하는 사람들 있습니까? 결정하시면 됩니다. 분노하고 일하는 건 결국 사단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평안함과 기쁨이 있어요. 여러분 앞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분노하고 화내고 그럴 수가 있느냐며 하는 것은 사단의 일입니다. 그건 간단해요.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며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하면 그건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을 들었는데,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하는데, 만남이 있는데, 마음이 평안해지고 기쁘거나 ‘참 감사하다,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이루어지는구나.’ 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이 분요해지고, 분노가 생기고, 그 사람도 분노하면 그건 영락없는 사단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면 그들이 기뻐할까 슬퍼할까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죠?

하나님의 역사가 흐르는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역사가 흐를 수 있도록 돕는 자가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가 흐르는데 가로막는 돌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저는 목사로서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늘 제 마음에 두렵고 조심스러운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전해지는데 내가 설교자로 그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제게 있어서 제일 두려운 것 같아요. 내가 이 말씀을 잘못 전하고 잘못 해석하고 또 성도들에게 내가 그릇된 말씀을 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늘 제게 무거운 돌과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는 가로막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내가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자는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애쓰고자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의 일이 흐르도록 유통하고 하나님의 일이 흐르도록 여러분들은 돕는 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이 흘러가는 것을 가로막는 이들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다보면 어떤 일이지요? 물이 흐르는데 가운데 돌이 가로막고 있으면 그 물은 자꾸 흐르면서 돌에게 깎이죠. 돌은 자꾸 부담을 받고 어려운 겁니다.
막아봐야 물은 결국 옆으로 흘러가서 흐르게 되는 겁니다. 우리만 괴로운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흐르게 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사람들과 두 무리는 분리되게 되는 겁니다.

양과 염소는 언제나 공존합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언제나 공존합니다. 마지막 타작마당 때 결정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방해자의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의 모습인가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 속에서 주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일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흘러갑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당한가?
우리는 때로 거꾸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최선의 모습이 될 것인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우리는 그의 일을 이루는 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방해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흘러갑니다. 산 위에서 물 부으면 그 물은 산 밑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막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방해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더 강해집니다. 문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가 아닌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맞다 라고 하면 방해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더욱 더 강해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뿐입니다.
오히려 방해의 역사가 있을수록 더욱 더 강해질 뿐입니다.

성도님들 세상 살아가는데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이루려고 하는데 쉽지 않을 겁니다. 사람 때문에 어렵고, 상황 때문에 어렵고, 여러 가지 구조 때문에 어렵고,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어려움을 극복하는 기쁨을 누리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활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고 그들이 예루살렘 수문 앞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를 모아서 대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들이 성벽을 수축했다면 그런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이 성벽을 수축하고 있을 때, 그들은 이미 은혜를 받을만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있던 겁니다. 우리가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이런 위협과 협박과 여러 가지 모략과 그리고 방해 속에서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침내 이루었다는 감격이 그들이 벌써 마음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마음 밭을 가꾸어 놓았던 겁니다. 거기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던질 때 그들은 모두가 통회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누리고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내가 이것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고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능력을 소유하리라는 마음의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를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어떤 일을 하시건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방해 속에서도 거침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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