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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받을 만한 믿음 (행 1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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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걸어가실 때,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이렇게 앞 못 보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어려운 일들을 당할 때 그것도 내가 감당할 길이 없는 고난이 계속해서 밀려올 때 이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 우리는 묻습니다. 또 “내가 얼마나 죄가 많기에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울부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시련들은 다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슬퍼할 까닭이 없습니다. 염려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감사함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루소서” 고백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과연 누구의 생애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로 옮겨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지금까지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를 통해서건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까지 나와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니 그에게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신 발로 똑바로 일어나 서시오.” 하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미문을 통해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 걸인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마음이 불같이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을 하면서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두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 루스드라에서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예루살렘 성전 미운 앞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과 그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이 강권적으로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였다면 지금은 바울의 믿음이 아닌 걷지 못하는 사람의 믿음이 이 모든 역사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까? 그것은 먼저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곳까지 찾아 나온 열심입니다. 이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를 찾아온 것은 바나바와 바울이 많은 병자를 고쳤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직 바나바와 바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통해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는 그 말씀을 자기의 귀로 직접 듣고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도 좀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였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믿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 말씀을 자기의 귀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자기의 마음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 나도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바로 그때 바울이 그 사람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성령의 알려주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은사가 아니겠습니까? 성령께서 바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사람이 눈에 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바울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아하 이 사람에게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이 있구나!” 그래서 바울은 마음에 주신 감동대로 선언합니다. “당신 발로 똑바로 일어나 서시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오늘 누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나타납니까? 누구에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함께 합니까? 주님께 대한 뜨거운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열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귀담아 듣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열정적으로 귀담아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의 영, 주님의 영, 말씀을 깨우쳐 주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믿음이 생기게 되고 우리의 입을 열어 아멘 함으로 그 믿음을 확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되면 그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내 안에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말씀의 자리에 열심을 내어 나아와야 합니까? 왜 우리가 말씀 듣기를 그것도 귀담아 말씀을 듣기를 힘써야 합니까? 그 열심을 내어 함께 모여 귀담아 말씀을 들을 때 주 성령께서 내 마음에 그 말씀이 믿어지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이요 내 안에 믿음이 생기게 될 때 그 믿음을 통해 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에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에게 주를 향한 열정이 솟아오르게 만드시고 말씀을 듣는 열심을 내게 만드시더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우리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말씀은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들려지는 말씀이 믿어짐으로 내 안에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생겨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여기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믿음이 생겨져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에 이 말씀을 들려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과 모든 질고로부터 우리를 고쳐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채찍에 맞아 주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 고침을 받았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고통과 질고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여 주시기 위해서 내 대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나음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때 이 시간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 능력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가 모든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시간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자, 루가오니아 말로 “신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왔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불렀고, 말하는 일을 주로 하는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도시 외곽에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을 섬기는 제우스의 제사장이 소 몇 마리와 꽃을 성문으로 가져와 군중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는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군중 속으로 뛰어가면서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어찌하여 이런 행동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이 헛된 일들에서 돌이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지나간 세대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이 자기 방식대로 살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도 자신이 어떤 분인지 알리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때를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는 등 여러분에게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풍성히 주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말로 무리를 겨우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 자기들을 신으로 모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일입니까? 누가 나를 신으로 섬겨준다는데 싫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내가 이것을 이루어냈다고 하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깊이 속을 들여다보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잘 나서 내가 무언가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무슨 일을 이룬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셨음을 우리는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듯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더 이상 나를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신 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모든 복도 더 이상 내가 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과 함께 누려야 될 것들이 되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섬겨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웃을 섬기고 이웃과 함께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연약하고 부족한 자를 돕는 것이 곧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갚으시리라고 했으니 그것이 더 큰 복으로 연결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받아 누리는 것으로 우리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그것을 가지고 또한 이웃을 섬기고 이웃을 격려하고 세워나가는 일에 사용하며, 재산을 팔아 사도들 발앞에 두어 모든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하였던 바나바처럼 가진 소유를 인도자 앞에 두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게 하며, 또한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인도자들을 섬기며 대접하는 일에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100배, 60배, 30배로 더 넘쳐나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나만 위해서 쓰게 되면 오히려 그것은 한 알 그대로 남는 밀알일 뿐이요 오히려 그것조차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고 마는 것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가 주신 것을 가지고 허랑방탕하다가 빈껍데기만 남듯 그렇게 허물어지는 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이루어 놓았다고 해도 나는 무익한 종이요 단지 맡겨 주신 일을 하였을 따름이라고 하는 고백이 또한 우리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온 맘과 뜻 다해 주 사모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이 찬양의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 날마다 넘쳐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에 머물러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보너스를 주십니다. 상급을 주십니다. 내 입술로 구하지는 않았어도 내가 마땅히 있어야 될 것들, 세상이 그토록 갖기를 바라고 누리기를 바라는 것들을 내게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오직 주의 백성들을 다스릴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부귀와 재물과 권세도 더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영광을 내가 가로채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의 날들, 괴로운 시간들의 연속, 무엇하나 제대로 되지도 않고 풀리지도 않는 고통의 시간들, 몸도 마음도 다 지쳐버려 그저 주저앉아 쉬고만 싶을 때, 우리는 탄식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은 그것은 우리가 탄식할 일이 아닌 감사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힘들고 지쳐 있기에 고난과 괴로움이 있기에 주님을 바라볼 수 있고 주님께 엎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주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들려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믿음이 생기게 하시고 우리 입술로 아멘하게 하시고 그 아멘의 믿음을 따라 놀랍도록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온전케 하시고 그리하여 새 삶을 살게끔 만들어 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들수록 더욱 섬기십시오. 힘들기에 더욱 엎드리십시오. 힘들기에 더욱 주님의 맡겨주시는 일에 온 힘을 다하십시오. 특히 주님의 말씀을 듣기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십시오. 그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이 사람이 고침 받을만한 믿음이 있도록 하시고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저를 고치시듯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마음에 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을 허락하시는 귀한 역사가 있도록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섬김의 사람, 순종의 사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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