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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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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27-39) 

우리 주변에는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는 믿지 않아도 교인들보다 훨씬 착하고 성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거짓말을 덜하고 성실하게 산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평가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절대적 평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가장 큰 죄인은 하나님과 구세주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자기의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이 가장 큰 죄인입니다.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것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바닷가로 나가셨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항구에 있는 세관 앞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곳은 시리아와 이집트로
나가고 들어오는 모든 무역 상품에 세금을 메기고 거두는 곳입니다.
세관의 세리는 요직 중에 요직입니다. 관공서의 세리는 푼돈이 왔다갔다 한다면 세관의 세리는 돈 다발이 왔다갔다하는 자리입니다. 모든 세리들이 앉고 싶어하는 자리입니다.
주님께서 그 세관 앞을 지나가실 때도 어떤 세리가 빙긋이 웃으면서 열심히 돈 다발을 세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세리를 보셨습니다. 이 때 보았다는 말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유심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마음 중심을 감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Follow me,"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세리가 바로 마태라는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레위라고 소개되고 막 2:13에는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으며
마 9:9에는 마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합하면 알패오의 아들 레위 마태가
됩니다.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 버림받고 따돌림 당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찾아온 예수님을 순수하고 담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마도 마태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의 예수님이 붙여준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던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남들은 그를 세리라고 무시했지만, 주님은 마태라는 이름을 통해서 그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마태라고 불러줄 때 대단한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를 소개할 때는 항상 세리 마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항상 자기의 분수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같은 죄인을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한번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 후에 마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처럼 핵심 제자는 되지 못했지만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11명의 제자가 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옛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냥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자기를 무시하고 죄인 취급하며 자기를 버렸던 그 유대 사람들을 위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한 마태는 지금까지 자기가 지켜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했지만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과 같은 죄인을 영접해 준 것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큰 잔치를 베풀고 자신과 같은 입장에 있는 세리들을 많이 초대했습니다.
이 잔치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였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보여 주는 모습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는 것보다 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것만 아니라 죄인들과 아무 거리낌이 없이 식사를 하시며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밖에 있었습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고 죄인의 자리에 앉지도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에 놀라고 분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갈 무렵 나오는 제자들을 붙잡고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이 볼 때 세리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식사를 한다고 원망했습니다.
-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불평했습니다.
-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눅 18:11】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이 기도에서 세리는 도둑놈들, 악행자들, 간음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바리새인들에게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여기서 의인은 진정한 의미의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의인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자기 의를 내세우는 죄인과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애통해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구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심각한 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병원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구원도 필요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레위와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고민하고 근심하는 자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셔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회개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같이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 죄에 대하여 조금도 고민하거나 근심하지 않는 자들, 자신이 건강하기 때문에 의원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고 은혜 안에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보다 의인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보다도 죄인을 기뻐하시고 죄인을 찾아 회개케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죄로부터 치유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죄인입니다.
마태는 그런 마음을 가진 죄인이었습니다.

명륜 교회 성도님들은 항상 자비하신 주님 앞에 우리의 죄인 됨을 인정하시고 겸손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가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고백할 때 죄인들을 살리고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구원받은 기쁨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삶이 계속 될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의 삶은 주님께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삶은 바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주님께
회개하고 구원하시는 주님께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겸손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여서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정작 자기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두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눅 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눅 5: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하나는 새 옷에서 천을 떼어내어 헌 옷을 깁는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낡아서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헌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의 공통점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 천으로 헌 옷을 깁는 행동과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이 두 가지 행동은 다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지혜롭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눅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논쟁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으면 포도주의 왕성한 발효 때문에 부대가 견디지 못합니다. 결국 가죽부대를 터뜨려 가죽부대와 포도주를 둘 다 못쓰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신 복음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부대는 우리의 생각을 의미합니다.
낡은 부대는 우리의 고정관념, 율법주의, 외식주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사고방식, 습관을 의미합니다.

부대는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습관이 새로워져야 예수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지면 새 포도주는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새 포도주,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을 운행하시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문제는 부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대입니까? 낡은 부대입니까? 새 부대입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면 성령님께서 활동하실 수 없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먼저 마음의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우리는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모시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의 친구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네 사람은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 중풍병자를 침상 채 달아 내렸습니다.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새롭게 하면 새로운 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새 생각이 새 사건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이 새 가죽 부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담기에 합당한 가죽 부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담기에 합당한 가죽 부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을 담기에 합당한 가죽 부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낡은 것을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새 것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겉 사람은 날이 갈수록 늙어져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주님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하나님의 새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자주 듣게 되는 말 가운데 이것은 우리 교회의 전통입니다. 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어긋남이 없는 것이 우리의 새 전통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삶을 매마르게 합니다. 외식과 위선에 빠지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전통과 형식만 고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심으로 매일 매 순간 새 부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 미국에 예수 잘 믿는 아내를 둔 술주정뱅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 나서 취중에 하는 말이,
"내 아내는 아무리 술 취해서 오밤중에 들어가도 친절하게 맞아주고 술상도 차려달라면 차려주고 발도 씻어 주고 아주 친절하게 서비스를 잘 해준다" 고 자랑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그럼 우리 한 번 가서 시험해 보자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술이 잔뜩 취해서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술상을 봐와라, 음식을 다시 차려라, 별별 요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내는 웃으면서 친절하게 다 해주더랍니다.
충격을 받은 친구하나가 다음날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귀찮은 일을 얼굴 한 번 안 찡그리고 친절하게 다 해 줄 수가 있었습니까?
"저와 제 남편이 예수 믿기 전에 결혼했는데 후에 저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
제 남편은 저렇게 예수 안 믿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저대로 살면 내 남편은 영원히 고통을 받는 지옥의 형벌을 받을 터인데 이 세상사는 동안에라도 즐겁게 해 드려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 말에 그 친구도 감동을 받았고 남편도 감동을 받아 술도 끊고 예수 믿고 좋은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면 우리 가정도 변화되고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말씀을 정리하면서 두 가지의 권면을 하고자 합니다.

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께 우리의 죄인 됨을 진심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날마다 고백하며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② 날마다 새로운 가죽 부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날마다 새롭습니다. 그 역사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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