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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소망, 우리의 소망 (행 2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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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설입니다. 좋은 날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기쁜 일, 좋은 일이 넘치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전도여행 끝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어 왔습니다.
로마에 와서는 감옥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셋집을 얻어 지키는 한 군인과 같이 지냈습니다.
로마로 올 때 바울 일행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서 모두 죽을 번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앞장서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모두 구조 받도록 했습니다.
그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이런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20절을 보세요.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지키는 군인과 함께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어느 성당에 가면 당시 바울을 묶었던 쇠사슬이 유리 상자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쇠사슬을 들어보이며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이스라엘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바울이나 유대인들의 입장이 같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바울은 ‘메시야는 이미 오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분이다. 우리는 그 분을 믿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목수의 아들이 어떻게 메시야이냐? 그것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모독이다’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고발해서 바울은 쇠사슬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는 말은 ‘나는 이스라엘의 소망이 성취되었다고 외친 결과,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결박당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야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내 소망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 데요’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내 소망이요? 돈 많이 벌고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지요.’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참 시시하게 사는 분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대답, 절대로 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른 소망, 좋은 소망, 나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런 소망을 강하게, 뜨겁게 가지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 치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이 사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무엇인가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존경을 받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나의 소원’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한국 근대 명문장의 하나로 꼽히는 글입니다.
그 글의 시작 부분은 이렇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 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 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

김구 선생은 차원이 높은 소망을 강하고 뜨겁게, 그리고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는데 자기의 생애를 바쳤고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보람 있는 삶을 보낼 수 있었고 변함없는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김구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라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느냐,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표준말로는 ‘하느님’이 맞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입에 익어서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김구 선생이 쓴 글의 원본에는 분명히 ‘하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자료들은 이 글에서 이 말을 ‘하느님’으로 슬그머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 설교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에 “충성하라 죽도록 충성하라 주님께”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381장이지요.
이 찬송은 “충성하라”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3절 끝에 가서는 “충성하리 끝까지” 이렇게 하고 끝납니다.
“충성하라”와  “충성하리” 비슷한 것 같지만 하나는 명령이고, 하나는 결단입니다.
아주 다릅니다.
이 찬송은 이렇게 끝나는 것에 묘미가 있는데 어느 사이에 3절 끝도 ‘충성하라“로 슬그머니 바뀌어졌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찬송가 가운데도 이렇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도 그렇습니다.
지금 새로운 찬송가가 나와서 보급되고 있고 우리 교회도 빠른 시일 안에 이 찬송가를 써야 합니다.
이제부터 교회의 상품이나 선물은 이 새로운 찬송가로 하려고 합니다.
새로 나온 찬송가를 보니까 “충성하라 죽도록” 이 찬송이 333장인데 끝을 “충성하리” 이렇게 바르게 잡아 놓았습니다.

자,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이요? 그야 통일이지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저도 참 좋아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소원이 통일입니까?
정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겉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하면서 속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안 통일, 꿈에도 소원은 안 통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 가운데 많습니다.
젊은 세대는 속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드러내놓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는 분들은 ‘통일이 되면 북측의 어려운 경제 형편 때문에 우리가 허리를 졸라매야 할 판인데 왜 그래야 돼? 그리고 여러 가지 갈등과 마찰이 일어날 텐데 난 싫어! 그것이 싫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이 싫어서 이대로가 좋아!’ 합니다.
이제 탈북자 만 명 시대가 되었는데 그 만 명을 남한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면서 함께 살도록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통일이 되어 그 수천 배가 되는 북한 주민들과 함께 사는 것, 사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우리는 통일이 되기를 바라야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좀 불편해도 통일, 손해가 많이 되어도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할 수 있게 되기 바랍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말을 읽으면서 우리의 소망은 통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성도로서 우리는 또 다른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무엇일까요?
대답은 다섯 글자입니다.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민족복음화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야, 한국교회의 소망은 민족복음화’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그런 인식이 없이 그저 개인적으로 복 받는 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교회들이 그런 인식이 없이 우리 교회의 교인 숫자 늘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면 한국교회, 계속해서 지금처럼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교인들을 그렇게 이끄는 교회, 빛의 사명, 감당하지 못합니다.
소금의 사명, 더욱 감당하지 못합니다.

‘설에는 며느리 증후군이 심해진다.’고들 말합니다.
설이 되면 일가친척들 모여서 즐겁게 놀고먹는데 며느리들은 그 뒷바라지 하느라고 부엌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시누이가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는데 시누이는 모르는 척합니다.
여선교회 회원들, 그런 시누이들 되지 마세요.
자연히 며느리들, 스트레스 많이 받지요.
그런데 ‘불신 가정의 신자 며느리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사 문제가 있습니다.
일가친척들, 모여서 먹고 마시는데 술자리가 벌어집니다. 술상 부지런히 차려내야 합니다.
이거 대단한 스트레스입니다.
그런 형편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면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민족복음화가 되면 ‘불신 가정의 신자 며느리 증후군’ 사라집니다.

'민족복음화가 무엇이냐?’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좀 복잡합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가 이 나라의 국교가 되고, 5천만 인구가 모두 기독교를 믿고, 아이가 태어나면 생후 몇 달 안에 반드시 유아세례를 받아야 하고…, 이런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진정한 민족복음화인가?’ 하는 의문도 갖게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김준곤(金俊坤) 목사님이 계십니다.
민족복음화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는 분인데요 김준곤 목사님이 쓰신 민족복음화를 위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너무 이상적인 것 같으면서도 민족복음화의 그림이 어떤 것인지 잘 알려주는 기도문입니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같이 아픈 내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 환경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젖줄, 말씀의 핏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사장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 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의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도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시장에서 한국제 물건들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 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민족의식과 예수의식이 하나 된 지상 최초의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 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참 감동적이지요. 이 나라가 이런 나라가 되도록 힘써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민족음화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 다음에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의 소망인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민족복음화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말을 쓴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야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설교는 설명이 아닙니다. 설교는 설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메시야는 이미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분입니다. 로마의 유대인 지도자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래서 구원을 받으세요.’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다음의 23절을 보세요.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예수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바울 역시 민족복음화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에 오기 전에 가이사랴의 총독부에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아그립바 왕이 총독을 방문했는데 바울이 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자기의 입장을 말하는데 먼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에게 메시야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들 열두 지파는 그것을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6장 7절 후반부에서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오늘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게 자신의 신앙체험을 들려주고 마지막으로 ‘아그립바 욍이여,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행 26:29b)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민족복음화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수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9장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은 무엇을 말하려고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참말이다!’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까?
그의 양심은 무엇을 증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3절과 4절 앞부분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도 이스라엘 사람이라
같은 피를 받은 형제, 일가친척, 이스라엘 사람들, 민족복음화를 위해서입니다.
동족들이, 형제들이, 골육의 친척들이,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간단하게 말하고 있지만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겪은 일을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후반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예수님 다음으로 우리가 본받아야할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애썼습니다.
그리고 쇠사슬에 매었습니다.
끝내는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있습니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물질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이 땅의 교회들은 이 일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고 있습니까?
교회마다 부흥을 원하고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원하고 성장을 말하는데 그 바탕에 민족복음화라는 것이 깔려 있습니까?
한국교회에는 민족복음화를 위해 수고하는 분들과 단체들이 참 많습니다.
생각나는 대로 들어봅니다.

신현균(申賢均)목사님이라는 유명한 부흥사가 계셨습니다.
이 분은 민족복음화운동본부라는 기구를 만들어 자기의 모든 활동을 민족복음화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30년 전인 1977년에 여의도에서 신현균 목사님을 중심으로 대형전도대회를 열었습니다.
1907년대부흥운동 70년을 기념하기 위한 집회였는데 집회 이름을 77민족복음화성회라고 했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십자가를 전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 이런 표어를 늘 외치고 있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내가 만일 혀에 암이 생겨 혀를 잘라야 할 형편이 되었는데 의사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라고 하면 ’민족복음화‘ 이 한 마디를 하고 싶다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국민일보」가 작년 12월에 창간 18주년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예배에서 제일 많이 나온 말이 ‘민족복음화 정론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장교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영문 약칭으로는 OCU라고 합니다.
현역과 예비역  크리스천 장교들의 모임인데 이 단체는 ‘군선교를 통해 민족복음화의 초석을 놓는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 이런 기관들이 더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세 비전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경건, 북한선교, 기독교문화입니다.
이 세 비전은 모두 민족복음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경건의 중요한 항목입니다.

‘민족복음화’ 여기의 ‘민족’에는 북한도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북한동포들도 분명히 우리 민족입니다.
북한선교도 민족복음화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으면 여러 가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향민들은 ‘아, 오늘 같이 사람들이 고향 찾아가는 날 우리도 고향에 좀 갈 수 있도록 되기 위해서 통일이 되어야하지요.’ 대답할 것입니다.
정치가들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오명을 씻고 남과 북이 합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통일이 되어야 하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경제인들은 ‘남의 자본력과 북의 노동력이 합해서 경제를 발전시켜 잘 살기 위해서 통일이 되어야 하지요.’ 대답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와 같은 대답을 인정하면서 ‘북한에 복음을 전해 동포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반쪽짜리 민족복음화가 아니라 온전한 민족복음화를 이루기 위해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북한이 2003년 이래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야 가난이지요!’ 하실 것입니다.
그것도 맞는 대답일 것입니다.
정확한 답은 기독교박해입니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라는 공신력 있는 선교기구에서 매년 그 나라의 종교상태를 면밀하게 조사해서 기독교박해국가리스트를 만들어서 발표합니다.
북한이 5년 동안 계속해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위는 회교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중국에는 신앙의 자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실상은 다릅니다.
중국도 매년 10위 안팎에 머물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 크리스천 컨선(ICC)라는  단체에서도 비슷한 조사를 하는데 거기에서도 북한이 기독교박해국가 1위입니다.

북한에 이런 상태이어서 같은 민족인 북한동포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저희 교회가 이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화요일에도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머무는 기관 안에 세워진 교회에 가서 집회를 인도합니다.
이번에는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 있는 분들 모두를 위해 떡을 수백 덩이 마련했습니다.
나이 많은 탈북자들 성경 읽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 돋보기  마련하고, 성경 읽으면서 은혜 받은 구절 표시하라고 형광펜을 마련해 가지고 갑니다.   
저는 통일이라든가, 북한선교가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잘 알고,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하고 알리기만 할 뿐 ‘같이 갑시다’ 하는 일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안에서도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그 시대의 옷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단정한 옷을 입고 있습니까, 보기 민망한 옷을 입고 있습니까?
문화는 그 시대의 옷일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혈관에 흐르는 피이기도 합니다.
혈관에 탁한 피가 흐르다보면 혈관이 막히고 심근경색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혈관에는 맑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탁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너무 탁한 피가 흘러 심장마비를 일으키기 직전입니다.

기독교문화는 우리 민족이 로마서 13장 14절의 말씀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혈관에 그리스도 중심의 맑은 피가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코카콜라 회사를 만든 분은 ‘내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의 혈관에 성서의 가르침이 흐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더욱 힘써야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야가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민족복음화입니다.

오늘, 설과 같은 전통 명절에는 이런 사실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을 위하여, 또 동족의 복음화를 위해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우리는 민족복음화를 위해 더욱 많은 기도를 하고, 더욱 많은 수고를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기 이 쇠사슬에 매였노라” 하였는데 ‘우리의 소망인 민족복음화를 위해 우리는 이런 일을 하고 있노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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