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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회를 사라 (엡 5:1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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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기회를 사라 
♡ 본 문: 에베소서 5:15-16

설 명절이 지났으니 이제 우리는 모두 양력으로나 음력으로나 한 살씩 나이가 더 늘어났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은 참 기쁘고 즐겁습니다.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노라면 믿음직하고 마음 든든합니다. 성인이 되어 당당하게 자기 몫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고생하며 자식 키운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중년이 되고, 흰 머리카락이 생기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잠간 지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흐르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이러한 시를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드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또 어떤 분은 세월의 빠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0대는 기어가는 듯하고
20대는 걸어가는 듯하고
30대는 뛰어가는 듯하고
40대는 수레를 탄듯하고
50대는 말을 탄듯하고
60대는 나는 듯하고
70대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듯하고
80대는 번개처럼 지나간다.

시간이란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공평하게 주신 자산입니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한 사람은 성공을 거둡니다.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셨습니다.“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기회를 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지혜는 세월을 아끼는데 에 있습니다.

이것이 세월이고 이것이 기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편의상 세월을 셋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순전히 사람의 편의에 따라 정해진 것에 불과합니다. 흐르는 시간 자체에는 그러한 구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새해, 새달이라 말하는 것도 사람들이 그렇게 정한 것뿐입니다. 떠오르는 태양이 새해나 새달이라 하여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해 놓은 시간은 물 흐르듯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 우리들의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들을 의미 있게 잘 활용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반면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와 불행의 늪에서 허덕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지나가는 세월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지혜이겠습니까?

1.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은 과거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모든 것은  과거의 일들로 인한 결과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고, 공부하며, 직업을 갖게 되고,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룬 것, 이 모든 것이 지나간 시간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 역시 과거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행하신 과거의 일들을 옳게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지난날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과거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세상에 태어나 살게 해주신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를 인도해주신 사실을 옳게 깨닫는 것 믿음입니다. 성경 말씀은 모두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과거에 일어난 일들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하신 과거의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깨달으라고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과거의 역사를 올바로 깨달을 때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삶의 자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두려운 마음으로 공경하게 되며, 순종하게 되고,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는 현재의 나를 있게 한 뿌리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분명히 깨닫는 것은 현재의 우리를 올바로 튼튼히 세우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60여년이 지난 오늘 친일파를 가려내 역사를 바로세우고, 매국으로 인해 얻은 재산을 환수하는 작업을 뒤늦게나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지난날 인간들에게 행하신 은혜의 역사를 바로 깨닫고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곧 삶의 기회를 바르게 사용하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과거의 태양이지만 날마다 새롭게 천하를 밝히며 만물에게 새 힘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와 같습니다. 과거의 하나님이시지만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들을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2000여 년 전 이 땅에 오셨지만 그 주님은 우리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주님으로 다가오십니다. 성경역시 그렇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고전중의 고전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날마다 새로운 힘과 생명과 끊임없는 지혜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난날 나를 위해 행하신 은혜를 성경을 통해 깨닫고 그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내가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가는 데에 큰 힘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힘이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하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불신앙이며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편 14:1)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도록 하셨습니다. 그 공로를 힘입어 죄인 된 우리들이 값없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진리이며 고귀한 깨달음입니까?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훗날 영원한 심판을 받아 지옥의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미련한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복음 7:24-27)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구별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과거의 일들을 깨닫고 시인하느냐 아니면 부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믿고 시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삶이 끝나는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거룩한 역사를 깨닫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지혜인 것입니다. 반면 부인하는 사람은 불신앙 인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습니다.

미래라는 시간은 어떤 것입니까? 미래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때입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가정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 교회의 앞날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국가나 이 세상의 앞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처럼 완전한 베일에 가려져 있는 시간이 미래입니다. 그래서 잠언 27:1의 말씀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하셨습니다.

이러한 미래에 대해 신앙인들은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 소망입니다.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누리며, 즐기며, 살아가는 편리한 모든 현대 문명은 꿈꾸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새처럼 날수 있는 날개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두되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두뇌로 새처럼 날아보려는 꿈을 꾼 사람들에 의해 비행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비행기로 새보다 훨씬 더 빨리, 더 멀리 지구촌 어디에나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짐승처럼 빨리 뛸 수 있는 발과 다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물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두되를 주셨습니다. 그 두되로 말처럼 뛰어보려는 꿈을 꾼 사람들에 의해 자동차가 발명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고속 전철이 등장했습니다. 꿈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테이트 미술관에는 왓츠의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수건으로 눈을 가린 한 젊은 여자가 지구위에 앉아 비파를 타는데 자세히 보면 비파의 줄은 다 끊어 졌고 오직 한 줄만 남았습니다. 그러지만 여인은 그 줄을 열심히 타면서 그 한 줄에서 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한 줄은 소망의 줄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의미심장한 그림입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때로는 삶의 줄들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건강이나, 재산이나, 사업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삶의 줄이 다 끊어진다 할지라도 소망의 줄까지 끊으면 안 됩니다. 소망은 마지 남은 비파의 한 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린도전서 13:13)라고 하셨습니다. 소망은 곧 생명입니다.

성경은 소망을 가리켜 적의 공격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에 비유하여 기록하기를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데살로니가전서 5:8)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소망을 가리켜 풍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배의 닻에 비유하여“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히브리서 6:19)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소망은 곧 생명과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소망은 지녀야 합니다.

3.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교체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우물쭈물 하다보면 어느새 과거가 되어버리는 덧없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만 이것저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는 지난 시간이니까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시간이요, 미래는 아직 내게 오지 않은 시간이니까 역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라는 시간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시간입니다. 현재를 허랑방탕하게 내어버릴 수도 있고, 값있는 일을 하면서 보람 있게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시라큐스” 지역에 이상하게 생긴 동상이 있습니다. 앞머리에 머리카락은 무성하고, 뒷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없어 반질반질 하며, 어깨에 있어야할 날개는 발에 붙어 있습니다. 동상 아래의 동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리스퍼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그대의 앞머리는 왜 무성한가?
“내가 왔을 때 사람들이 빨리 잡을 수 있게 하려고”
그대의 뒷머리는 왜 반질반질한가?
“한번 지나면 잡을 수 없게 하려고”
그대의 날개는 왜 발에 달려있는가?
“잽싸게 날아가려고”

그렇습니다. 이것이 시간이고, 이것이 세월이고, 이것이 기회입니다. 현재에 대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가장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무엇을 위해 사용하면 후회 없는 세월을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방대한 성경 말씀을 열 가지 조항으로 요약한 것이 10계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방대한 성경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7-40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하신 것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한 사람은 후회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지혜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사랑의 진리를 역행하는 타락한 삶이 만연된 세상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의 말씀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하셨습니다. 말세에 나타나는 타락한 인간성에 대한 정확한 예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진 상황을 우리들이 보고 있습니다.

말세에 나타날 인간성의 타락 현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자기중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중심, 아래로 이웃중심의 삶을 강조하셨으나 사람들은 철저한 자기중심의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현대 심리학자들은 “네 자신을 주장라”고 가르칩니다. 예술가들은“네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정치가들은“너 자신을 선전하라”고 말합니다. 교육가들은“너 자신을 일깨우라”고 말합니다. 휴머니스트(인도주의자)들은 “너 자신을 믿으라”라고 말합니다. 이런 여러 유형들의 공통점은 자신에 대한 집착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주장은 아주 독특합니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또 다른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를 버리면 하나님께서 되돌려주시는 새로운 은혜의 생명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풍요로움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죽었으나 그의 신앙정신은 지금도 살아 후대들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에 사로잡혀 살아갔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을 찾아 스스로 택한 곳이 멸망하기 직전의 성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를 부정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었고, 한 사람은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가롯 유다가 그 사람입니다. 자기를 부인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생명까지 주를 위해 버렸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누구나 죽게 되는 법, 지금도 베드로를 기념하여 건축된 베드로 대성당에는 그를 추앙하는 인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노예의 몸값으로 팔아 넘겨 자기 잇속을 채우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한 푼도 쓰지 못했고 그의 말로는 처참한 자살자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삶의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사랑의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자기를 포기한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진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진 삶은 사막위의 풀과 같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또는 의료봉사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의 일화 가운데 이러한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기자들이 찾아와서“당신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어느 때입니까?”하고 질문을 했을 때, 슈바이쳐 박사는 대답하기를“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다는 것, 그 이상의 보람과 행복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영국의 문필가인 칼 라일은 말하기를“이 세상 사회는 내가 영광을 누릴 처소가 아니라, 내가 쓰여질 처소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무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양보와 희생을 통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고, 발전되는 데에 기여하는 삶이 될 때 큰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젊은 신임 전도사가 칠순이 되신 병든 장로님 댁에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후 장로님이 “젊은 전도사님, 내가 권면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 주의 일을 하려 나선 것이 훌륭합니다. 공산당이 정치를 잡고 교회를 핍박하는데 일하시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드릴 권면은 세월이 나쁘다고 물러가지 마십시오. 내가 젊어서 교회 일을 할 기회가 많았는데 외정시대에는 세월이 나빠서 세월이 좋아진 다음에 하겠다고 미루어왔는데 좋아지는 세월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늙은 병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젊은 전도사님 나처럼 되지 마십시오.”하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를 위해 주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현재에 주님을 위해 사랑의 수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세월은 물 흐르듯 빨리 지나갑니다. 세월을 아껴야 하겠습니다. 즉 내게 주어진 기회를 잘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해야 하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은 믿음으로 어떠한 경우라도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의 삶은 사랑을 중심한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온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성도의 삶이며, 기회를 사는 지혜자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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