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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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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부끄러운 것인데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한국 사람들이 두 나라의 문화차이 때문에 겪는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에서처럼 무심코 어린 아이들을 집에 두고 부모가 외출했다가 경찰에 고발되어 벌금을 물거나 한국에서 한 것처럼 자식을 때렸다가 구속된 부모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서글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해 전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홀로 아들 하나만 데리고 살던 한국 어머니가 일을 나갔다 들어와 보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집안에서 사고로 죽어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경찰에 신고를 했고 출동한 경찰 앞에서 이 어머니는 "내가 죽였어요."라고 말했다가 아들 살해혐의로 구속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와 미국의 문화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다 내 탓이야, 내가 못나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특히 자녀들이 잘 못 되면 부모가 "다 못난 애비 어미 탓"이라며 가슴을 칩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이 한국 어머니는 자기가 일을 나갔다가 아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 나 때문"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그만 "내가 죽인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한국식 사고방식이 미국에서는 절대 안 통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서글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해프닝도 일어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이 참 좋은 전통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가 가슴을 치며 "다 내 탓"이라고 말합니다. 엄마 말을 지독히도 안 듣던 청개구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다 내 탓"이라고 가슴을 치면서 마지막 한 번 효도한다고 어머니 무덤을 강가에 만듭니다. 친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 이 못난 친구 때문"이라며 함께 아파합니다. 지난 주 설교내용처럼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남 탓하기 전에 내 탓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참 좋은 전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좋은 전통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뻔뻔스러워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죄를 짓고도 끝까지 내가 안 그랬다, 혹은 내 탓이 아니라고 우기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점점 더 죄에 무감각해지고 뻔뻔해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정말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죄 앞에서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TV에 보면 죄를 지은 범인들이 경찰서에 잡혀오면 옷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다 파괴되었지만 그나마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라도 아주 조금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양심 때문에 죄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이 죄에 대한 최소한의 부끄러움과 양심조차도 없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짓고도 당당합니다. 분명히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아니라고 우깁니다. 정말 큰일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신 예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고 또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중에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를 부르십니다. 레위는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을 쓴 제자 마태입니다. 아마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제자가 된 다음에 얻은 별명인 것 같습니다. 마치 베드로는 제자가 된 후 얻은 별명이고 본명은 바요나 시몬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뽑은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내 제자를 마음대로 뽑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을 뽑겠습니까? 요즘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들도 서로 공부 잘 하는 우수한 학생을 뽑으려고 난리인데 그 시대에도 다른 랍비들 같으면 제자를 뽑는데 기왕이면 좀 똑똑한 친구, 환경 좋은 사람을 뽑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 세리를 제자로 뽑았단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레위를 제자로 부른 후 그의 집에 앉아 식사를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먹습니다. 당시 세리와 함께 식사하는 것 자체가 꺼려지는 일이었는데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세리 레위 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수많은 세리들과 함께 밥을 먹은 것입니다. 학자들은 혹시 이 식사자리가 레위의 송별회였는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세리직을 은퇴하고 예수님 따라 제자로 나서는 레위를 송별하려고 그의 동료들이 많이 참석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본 양 얼굴을 찌푸리며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 선생이라는 자는 어떻게 저런 더러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 중에서도 가장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서기관들이 볼 때 세리와 함께 밥 먹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15절에 분명히 죄인과 세리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세리=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함께 밥 먹는 것만 보고도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세리에 대한 인식을 알아야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세리(稅吏)란 영어로 'tax collector' 즉 세금을 걷는 관리를 뜻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세청 직원쯤 되겠지요.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로마정부는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세금징수 청부인을 임명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삭개오 같은 세리장입니다. 이 세리장 밑에는 여러 명의 세리가 있어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문제는 이 세리들이 로마 정부에서 요구한 액수 이상을 걷어 들여 자기 주머니로 착복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덜 거두어서 모자라는 액수는 세리 자신이 고스란히 채워 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더 악착 같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지요. 같은 유대인으로서 로마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만도 미운데 이렇게 세금을 악착같이 걷어 들여 착복하기까지 하니 세리들은 유대인에게 민족 반역자요 도적으로 이중 삼중의 미움과 배척을 받으며 다 죄인으로 최급 받았습니다. 이제 왜 세리=죄인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이 죄인인 세리들과 식탁을 함께 한 것입니다. 옛날에 누구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밀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포항에 와보니 "밥이나 한 번 먹읍시다."라는 말이 단순히 밥만 먹자는 뜻이 아니라 좀 친밀하게 지내보자는 뜻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누가 손가락질 받는 죄인과 친하게 지내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당시에는 아무도 이 죄인인 세리들과 밥을 같이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밥 먹다가 부정을 탈 수도 있고, 사람들이 싸잡아 손가락질 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세리들과 함께 밥을 먹은 것입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과 말입니다. 그러니 당시 누구보다 세리를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이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요.

또 여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를 때 레위는 세관에 앉아있었다고 합니다(14절). 당시 자료에 보면 세리는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수입세와 인두세(人頭稅=사람 머리수만큼 걷는 세금=주민세?)를 걷는 세리와, 운하나 다리, 도로에서 통행세를 걷는 세리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통행세를 걷는 세리가 훨씬 더 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통행세는 액수가 정해져 있지 않아 그야말로 세리 마음대로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리가 다 도둑놈이지만 통행세를 걷는 세리가 훨씬 더 악질 도둑놈인 셈이지요. 그런데 레위가 앉아있었다는 '세관'은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쪽으로 가는 국도에 위치한 세관으로 이 도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통과세를 받던 곳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니 레위는 세리 중에서도 동족 유대인들에게 더 철저한 미움과 경멸을 받았고,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은 레위의 동료 세리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더 펄펄 뛰며 "어떻게 저런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냐?"고 따진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병든 자를 위한 의원 예수님

그런데 이제 오늘 설교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왜 너희 선생은 저런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느냐?"는 말을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가만 보면 예수님은 참 귀도 밝아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건강한 자와 병든 자란 남들이 봤을 때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칭 건강한 사람과 자칭 환자를 뜻합니다. 우리말에 "골골 80"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골골한 사람, 병치레를 많이 하는 사람이 오히려 80살까지 오래 산다는 뜻입니다. 골골한 사람은 자기가 아프다 싶으면 빨리 병원 찾아가고 의사 만나서 약을 먹기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래 산다는 것이지요. 자칭환자가 오래 사는 법입니다. 반면, "나는 건강하다. 감기 한 번 안 걸려봤다, 병원 입원 한 번 안 해봤다."고 큰소리치는 사람, 자칭 건강한 사람은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말 한 번에 가는 일이 생깁니다. 자기는 건강하다고 믿고 아파도 참고 병원 안 가고 의사 안 만나고 약도 안 먹다가 정말 큰 병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자칭 건강한 자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스스로 "내가 아픈 사람이다. 내가 환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즉 '환자의식'이 있는 사람이 병원도 필요하고 의사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법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도 '자칭의인'이 있고 '자칭죄인'이 있습니다. '자칭의인'이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들처럼 '자칭의인'이 많습니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회개할 일이 없다. 이만하면 죄 안 짓고 잘 사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습니다. '자칭 건강한 사람'이 병원도 의사도 필요 없는 것처럼 '자칭의인'은 자기가 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죄를 씻어줄 영적 의원, 즉 예수님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칭죄인'이란 "나는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더러운지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에 정말 간절하게 내 죄를 치료해 줄 영적인 의사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뼈저린 회개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는 당시 유대인 사이에 유행하던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반적인 격언을 예수님은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칭 건강한 자, 자칭의인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정말 영혼의 치유자요 의원 되시는 예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간절히 찾는 사람들, 즉 자칭 환자, 자칭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을 받아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다함께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봅시다. 여기도 자칭 의인의 대표인 바리새인과 자칭죄인의 대표인 세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어쩌다보니 성전에 함께 기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세리를 벌레 보듯 하던 바리새인은 11절에 보니 멀찍이 따로 떨어져 기도합니다. "내가 어떻게 저런 더러운 죄인과 함께 기도를 하겠냐?"는 것입니다. 이 태도도 태도려니와 바리새인의 기도내용이 더 가관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이 기도가 무엇을 뜻합니까? 자기 의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비교의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교만한 사람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어떻게든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 비교하면서 "나는 최소한 쟤보다는 낫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회개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남보고 회개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되고, 남과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거짓 회개입니다. 더군다나 바리새인은 아예 회개조차 안 하고 세리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이 받아주셨겠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반면, 13절에 보니 자칭죄인인 세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 스스로도 자기가 더러운 줄 알고 자칭의인인 바리새인과 멀찍이 떨어져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죄인이기에, 더럽다고 생각하기에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 가슴을 칩니다. 너무 죄가 미워서, 이런 자신이 미워서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통회 자복한 것입니다. 저는 이 세리의 모습을 보면 떠오르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입니다. 정말 이 세리는 죄인인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면서 내 죄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며 두 손 들고 나아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없으면 죄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죄인의식' '환자의식'이 없으면 참 회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최소한 더러운 죄인인 세리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최소한 교만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는 낫다고 보십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잘못 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깨달아집니다. "아, 내가 이 세리보다, 이 바리새인 서기관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가장 더러운 죄인이구나. 사도 바울이 아니라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구나." 하고 말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을 애타게 찾게 됩니다. 그제야 우리는 영혼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에게 나아가 "주님, 주님 아니면 제가 살 방법이 없습니다." 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지막으로 주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나 알려드리지요. 바로 '키리에(Kyrie) 기도'라는 것인데 지금은 비록 이 기도가 개신교에서는 사라지고 가톨릭 미사에만 남아있지만 동방교회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기도방법입니다. 바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아주 간단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키리에 기도'라고 부르는 까닭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희랍어로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이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공부한 분들은 중세시대의 레퀴엠 같은 미사음악에 꼭 '키리에'라는 악장이 있는 것을 아실 텐데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이 '키리에 기도'를 가톨릭에서 나온 것인지 알고 무조건 배척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닙니다. 바로 오늘 살펴본 누가복음 18:13에서 세리가 회개기도 할 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처럼 성경에서 나온 기도방법입니다. 이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지극히 가난하게 하고 주님 앞에 온전히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좋은 기도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다 함께 이 기도를 따라해 볼까요? 다함께 눈 감고 제가 먼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면 여러분도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면 됩니다. 아주 짧지만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모아 세 번 연속 기도합니다(실제로 한다). 우리는 흔히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해야 되는 줄 알지만(마 6:7)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기도가 더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공허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말 길게 하지 말고, 다른 생각도 하지 말고 집중해서 오직 이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은총을 가슴 깊이 느끼고 회개의 영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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