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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축복이란? (창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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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축복이란?
창세기 1:26~31

21세기가 되면 세상이 훨씬 행복해지리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뚜렷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첨단 과학의 발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인류의 불행에 사용되는 세기였다는 것입니다. 첨단 과학을 파괴 기구로 이용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을 비롯해 온 세계가 끊임없는 전쟁을 했던 20세기는 지칠 대로 지치고 절망하고 좌절했던 세기였습니다. 우리 한반도도 예외 없이 전쟁이 일어나서 300만 명 이상이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21세기가 되면 인류가 전쟁의 고통을 깨닫고 평화의 지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악순환의 역사만이 인류의 괴로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엇보다 심각해진 것이 문화 충돌로 인한 테러 공포가 온 세상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것이 터질지 모르는 테러 공포 때문에 이제 세계인에게 즐거운 여행이란 말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분이 나쁩니다. 신발까지 다 벗고 들어가라고 하고 검사를 받는데 의심이 나면 데리고 가서 바지까지 벗게 하는 여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성들은 수치감이 더 심합니다. 여성들의 브래지어까지 철저히 검색기를 갖다 대고 조사를 할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몸에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는데 계속 검색대에서 소리가 나니까 그 사람의 설명이 이렀습니다. “아마 오래 전에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에 금속 철을 붙여서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소리가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구차한 설명까지 해야 되고 앞으로는 금이빨까지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행 가기가 싫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항 지나가는 것이 끔찍하고 창피스럽고 무슨 죄를 짓고 조사받는 것 같이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산다는 것은 성취를 바라봄입니다. 그리고 그 성취란 곧 행복을 말합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행복감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잘 먹으면 두어 시간 행복합니다. 여인들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하면 하루 종일 행복합니다. 새 옷을 사면 한달 정도는 아주 행복해 합니다. 행복해지려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행복하려고 사랑도, 결혼도 합니다. 요즈음은 그러한 인간 심리를 이용해서 교회조차도 행복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 많이 오라는 말을 뭐라고 합니까? “행복에의 초대”라고 합니다. “여기에 오면 행복합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많이 광고합니다. 이제는 교회도 행복하려고 다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내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조건이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 첫째가 구조적 조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의 행복과 생명을 존중하는 국가 구조가 있습니다. 반대로 개인의 권리나 행복을 무시하는 국가 구조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피 땀 흘려 노력을 한다하여도 전체적인 구조가 잘못되어 있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요즈음 온 세계 가운데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라고 합니다. 모든 국민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아주 신바람이 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굶주리던 중국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등소평이 빛을 비추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경제 구조를 바꾸어서 개인의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장 경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돈을 벌면 모두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십 번 중국 여행을 갔고 갈 때마다 교육국에 있는 지도자들과 만나고 심양 대학교와 특별히 친분이 있어서 총장, 부총장을 여러 번 만났는데 모두 똑같은 말을 계속 합니다. 등소평이 우리에게 빛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그 빛을 보고 우리는 이렇게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학생 시절에 아테네 철학자 중에 빛을 발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돌아다녔다는 디오게네스를 우리가 매우 낭만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철학에서 인간의 행복이란 뭐냐? 자연스러운 욕구를 자연스럽게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흉한 것도 아닙니다.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자연적이며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살기 위해서 자기는 거지 같이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는데 그 소문이 알렉산더 대왕에게까지 들려져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내가 한번 봐야 되겠다.” 찾아가서 보니까 정말 그렇게 하고 다닙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인데 대왕께서 내 일광욕을 지금 방해하고 서있기 때문에 조금 비켜주시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알렉산더가 온다는데도 치장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가 그렇게 건방지게 구는 것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존중해서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디오게네스 일화가 유명해진 것입니다.

영국의 사학자 토인비 박사가 런던 대학의 교수 시절에 학생들에게 강조한 역사관은 근래에 가장 높게 평가받는 역사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창조적인 소수가 행복하게 만들고 파괴적인 소수가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다. 어느 한 공동체나 나라에 창조적인 소수가 발하는 빛 때문에 온 국민이 행복한 것이다. 반대로 파괴적인 소수가 있을 때는 그들 때문에 다 불행해 지는 것이다.” 여러분! 세상의 역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려면 빛을 비쳐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얼마 전 조선일보에 모건 스탠리 아시아태평양 수석 경제학자인 앤디시에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부활하는 일본과 급성장하는 중국 틈에서 필리핀 수준의 빈민국이 될 것이다.” 필리핀은 막사이사이 대통령 때 아시아의 흑진주라고 찬양을 받았는데 마르코스 대통령 때 빈민국이 되었습니다. 어느 역사관 안에서나 민중은 빛을 보고자 하며 그 빛을 통해 행복을 발견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신이 인류 구원의 빛이 되시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있으므로 세상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네가 있는 그 공동체가 행복하게 만들어져야 하고 네가 대한민국에 살므로 말미암아 너 때문에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가정에서도 우리가 빛이 되고 교회에서도 빛이 되고 사회에서도 빛이 될 때에 그것이 주님의 제자다.”라는 진리를 주셨습니다.

1920년대는 세계가 경제 공황으로 고통을 받던 때입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경제 공항이 가장 심각하여 경제가 파멸 직전까지 갔습니다. 국가 경제가 이렇게 되니까 사회는 자연 발생적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 갱단들이 수없이 생겨나서 어찌나 무서운지 은행들이 갱단이 무서워서 전부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니까 경제 활동이 완전히 마비가 된 것입니다. 약탈과 살인의 무정부 상태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절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들은 마피아 조직에 가담하고 있던 알카포네의 부하들만이 살맛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어두워질 때 뉴욕의 한 시민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 어두워져 가는 사회에 어떤 빛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그 길을 주십시오.” 기도하고 생각하다가 ‘아, 이렇게 하는 것이 뉴욕 시민에게 빛이 될 것이다.’ 자기 가족들과 온 친지들,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설명하고 “이 일에 협조해 달라. 이 사회에서 훌륭한 건물을 하나 지을 테니까 우리 다 같이 투자하자.”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다 함께 모아서 미국 사회가 바라볼 수 있는 건물 한 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은 10층, 20층 날마다 올라가는데 점점 높이 올라가는 빌딩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궁금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몇 층까지 올릴 것입니까?” “네. 좀 더 올라갈 것입니다.” 50층 이상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신문에 기사화 되어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80층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 이것은 미국의 희망이다!”라고 했습니다. 100층이 올라갈 때 “미국의 경제 공황은 이제 끝났다!” 그 빌딩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희망의 빛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02층 뉴욕 34번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입니다. 그 빌딩 하나에 고용 인원이 18,000명이나 되었고 그 빌딩 하나가 뉴욕 시내에 생김으로 말미암아 일자리 창출과 경제 순환의 동기가 되어서 빌딩이 완성되었던 1931년부터 사회는 새로운 역사의 변환점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누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가 결정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들은 잠시나마 황우석 교수가 이 민족의 빛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과학마저 거짓말을 할 줄은 누구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살던 중간기 역사의 히브리 민족이 어느 날 한줄기의 빛을 보고 요단강으로 다 몰려갔습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대하던 예언자의 음성과 빛이 이제야 나타났다.” 모두 몰려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들을 향해서 한 말은 책망입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그런데도 그 앞에 다 몰려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회개하고 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아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누가, 무슨 빛을, 어떻게 비추느냐 여기에 따라서 세상이 결정됩니다. 때로 우리는 대통령을 뽑으면서 “당신은 이 역사에 이 민족의 빛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의 갈 길의 방향을 가장 선하고 훌륭하게 정하시고 우리를 이끌고 그리로 가십시오.” 그래서 대통령을 뽑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라볼 수 있는 지도자를 가진 민족, 창조적인 철학의 구조를 가진 백성은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봅시다. 창세기 1장은 인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확실한 이유가 여기 나타납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구조와 노력은 하나님의 복이 사람에게 임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훌륭한 것입니다. 정치 철학도 하나님의 복이 백성에게 임할 수 있는데 초점을 맞추어서 결정해야 되고 경제 성장도 학문의 초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교회도 나라도 모두 하나님의 복이 사람에게 주어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빛을 발하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복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복이 대체 무엇인가? 성경에서 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는 “self-congratulation”이라고 자기가 자기를 축복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복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보십시오. “Who am I(나는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자기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오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시고 인간 삶을 시작시켜 주시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나님이 정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우리들의 관계성을 설명해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거룩한 결부의 생명체 원리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신,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곧 내가 되는 생명 결부의 원리!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그것이 “self-congratul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내 영속에 이 정체성이 확실히 자리를 잡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받는 복이란 첫째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됨의 영적 정체성이 있는 사람, 이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기독교 역사에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는데 도대체 젊은 나이에 왜 순교를 당해 죽고 마는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고통이 순교입니다. 왜 죽음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버리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복이라고 하는 마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죽으면서까지 지켜야 되는 하나님의 축복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다.”란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기독교인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외국 땅으로 다 흩어졌습니다. 당시 기독교 최고의 지도자 역할은 베드로였습니다. 외국으로 흩어져서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는 교인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것이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너희가 누구냐?” 옛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규정짓는 말을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보고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되는지, 아니면 벌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되는지는 자신의 신앙이 결정합니다. 비록 외국에 가서 나그네로 고통스럽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복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모두가 복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은 더하십니다. 날마다 하나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복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제일 귀한 복을 주셨는데 믿음이 없다보니까, 또 세속에 너무 물들다 보니까, 세상 기준으로만 복을 생각하니까 제일 귀한 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불행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내가 나를 축하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거기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의 복으로 내가 나를 객관성 있게 축하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의 기쁨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음 “blessing share”입니다. 그 복을 나누어주는 것이 복입니다. 왜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선민으로 택하셨는가? 너희가 수고하여 온 세계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역할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땅 끝까지 찾아가서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라.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지금 갈보리 교회가 세계 선교에 공헌하고 있습니다. 왜 하는 겁니까? 복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는가? 당시는 가나안 땅이 세계인이 오고가는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애굽 대륙에서 왔던 사람이 요셉을 인신매매하여 은 20에 사가지고 갔습니다. 남쪽으로는 애굽 대륙의 아프리카 땅을 연결하고, 동쪽으로는 끝이 없는 아라비아 대륙을, 북쪽으로는 소아시아 일대가, 서쪽으로는 지중해라는 해상 통로가 있어서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관문으로 무역의 중심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계인들이 오고가는 그 중심에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를 세워 빛을 발하므로 그 빛을 보고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가지라는 계획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의 이주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결국 거기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인류 구원의 메시야가 탄생하도록 하나님의 계획성 밑에서 되어진 일이 아닙니까?

내가 받은 복으로 또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러 가는 사람입니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가는 나라는 다 문화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복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어느 곳이나 문화와 문명이 향상되었고 교육 국가가 되었고 경제 성장을 하고 미신이 사라졌습니다. 만약 우리 한반도에 아직도 복음이 안 들어온 상태라면 우리나라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겠습니까? 기독교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들어와 준 것이 복이 되어 오늘 우리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의 복을 내어 쫓는 사람이 간혹 존재합니다. 그 나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 역사적으로 살펴봅시다.
기독교 핍박의 대부 역할을 하던 소련은 세계 땅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제적 파탄으로 나라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래서 소련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14개 독립국가가 세워졌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새로 탄생된 나라들이 이제 선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북한이 굶어죽는다는 소리만 계속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조차 희망의 빛을 찾아서 탈북하려고 남의 나라 영사관 담장을 필사적으로 기어 올라가는 뉴스가 계속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들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어디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한국입니다.” “왜 그곳에 가기 원하십니까?”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0년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도와준 것만 6조5899억 원입니다. 민간단체들이 도와준 것은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만 해도 5000명 식량을 4년 동안 계속해서 보낸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내어 쫒은 것이 곧 복을 내어 쫒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 자체시라.” 찬송가 28장에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복으로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복되게 하는 최대의 선물이고 이 복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빛을 남긴 사람들이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새해가 되면 첫 번 인사를 뭐라고 합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 말의 뜻이 뭡니까? “새해에는 내가 당신의 복이 되겠습니다. 내가 있으므로 당신이 행복하고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행복하여지는 관계로 이 새해를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그러한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교회들이 관료주의, 상업주의 원리 문화에 젖어들면 이기주의적 공동체를 만들어서 자기 것 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종교 개혁운동이 그렇게 거세게 일어났던 것 아닙니까? 만약 교회 공동체를 이기주의적 공동체로 만들게 되면 교회도 하나님이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46년 걸려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교회도 버림당하게 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사는 한 지역에 우리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피땀 흘려서 우리 갈보리교회 만큼이나 좋은 교회를 잘 짓고 목사님 사택까지 잘 마련하였는데 미국인들이 한사람, 두 사람 떠나고 한국인들이 많이 살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니까 그 교회 교인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피땀 흘려 건축한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셔서 잘 살았는데, 이 지역은 이제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지역이 되었으므로 우리가 계속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이 지역을 희망의 빛을 보기 위해 오는 한국인들에게 주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이다.” 결정을 해서 생전 보지도 못한 한국 교인들과 목사를 불러서 “이 교회를 가지십시오. 여기 목사 사택도 마련해 놓았고, 또 조금 수리하려고 은행에 10만 달러 헌금해 놓은 것이 있으니 다 가지십시오.” 한국 목사와 한국 교인들이 눈이 둥그레져서 “공짜로요?” “네, 공짜입니다.” “그러면 어떡하실 겁니까?” “우리는 또 조용히 떠나서 우리들이 가야할 교회를 찾을 테니까 이 지역이 복 받는 지역이 되도록 여러분이 이 지역에서 복을 받도록 가지십시오.” 제 친한 친구 가운데에도 그렇게 물려받은 교회가 LA에서 두 곳이나 됩니다. 그래서 한 때는 그 친구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기에 하나님이 저렇게 공짜로 주셨느냐?” 교육관 시설도 얼마나 좋고 목사 사택도 얼마나 잘 꾸며져 있는지 모두 부러워했습니다. 교회는 공짜로 주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지 말라. 그러려면 차라리 주지 말라.” 거룩한 명분의 아름다운 나눔! 그것이 교회입니다. 지금 갈보리 교회는 40개국에 선교비를 보내고 있습니다. 재정 보고를 매주일 하는데 1억 정도는 항상 마이너스 통장으로 운영해 가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남을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괜찮습니다.

제가 목회 생활을 하면서 5곳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없는 지역에다 교회 하나를 지어놓고 한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이 교회 와준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새벽기도도 나 혼자면 아예 아무도 안 나왔으면 그냥 자겠는데 한 사람이 뚜벅뚜벅 오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후다닥 일어나서 “기도합시다.” 이래가면서 다섯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는 일에는 피가 끓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선교 처소를 현재는 400군데인데 1,000군데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나눠주는 것이 복입니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공짜로 다 나눠주는 것입니다. “갈보리교회 교인들 모아서 뭐했는가? 다 온 세상에 나눠주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뭡니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많이 했기 때문에 교구 목사님들한테도 항상 권합니다.  여기서 교구 목사로 일하다가 때가 되면 그 교구 식구들과 교회를 하나 세우라고, 교구 식구들 다 모시고 나가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일곱 개가 되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좋으냐?” “그러면 갈보리교회 교인들 다 없어지면 어떡합니까?” “안 없어진다. 여기는 여기대로 있다.” 그래서 내년 1월부터 한 사람이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교인들 다 모시고 나가서 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싸움질 하고 갈라지는 것은 잘해도 거룩한 명분의 아름다운 나눔은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교회도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몸마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공짜로 다 가져가라. 내가 줄 것은 이제 이것 밖에 없어.” 피 흘리고 쓰러지면서 다 가져가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오늘 성경은 인류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끝나는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성경은 복으로 시작해서 복으로 끝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갈보리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이러한 복의 임재가 여러분 가정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진리,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면서도 복인 줄 모르는 불행을 성령님이 깨우쳐 주시고 나는 가장 귀한 것을 받고 있으니까 형제들에게 이 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믿음의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이곳에 이렇게 교회를 세워주신 것은 온 세상에 나누어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에 공헌하는 갈보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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