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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각 나팔 (수 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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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이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했고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출애굽한지 40년 만에 들어간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면 이제 고생 끝입니까?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서긴 했지만 아직 저들의 소유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앞에는 여리고 성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여리고성 뒤에는 또 가나안 칠 부족들의 여러 성들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 현실은 마치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 같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모든 문제가 다 끝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어야만 하나님의 약속이 나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은 이중 성벽이었습니다.
외벽의 두께는 2 미터 내벽의 두께는 4미터이며 두 벽의 간격은 4.5미터,     
높이는 약 10미터로 아파트 3층에 해당합니다.
한 마디로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이 난공불락의 성이 이스라엘 앞에 무너진 사건을 통해
내 앞에, 우리 앞에 가로 막고 있는 이중, 삼중의 장애물이 무너지는
  믿음의 역사에 눈이 뜨여지는 귀한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 수6장은 여리고성 무너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여리고 성이 왜 굳게 닫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1,2절)
1절 [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
여리고 성은 그 규모에 있어서는 보통 성읍과 비슷하지만
    가나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에 버티고 서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앞에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으로 말미암아
문이 굳게 닫혀 있어
    그 누구도 통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외벽은 내벽으로부터 35도의 경사지에 쌓아 놓았기 때문에
      접근하는 것조차도 아주 위험한 지형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리고성이 난공불락의 성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여리고 성이 난공불락의 성으로 성문이 꽁꽁 닫혀 있지만   
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이
[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노라  ]고 합니다.
비록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일지라도
    하나님이 붙여 주시면 무너질 줄 믿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이 나오면
    꼭 따라 나오는 말이 있는데 바로 붙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삿6: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통하여 미디안 135,000명과 싸울 때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포도주 틀 안에서 밀 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 고 하니
[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
그럴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는 말이
[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겠다 ] 하고는
[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였노라 ]
이렇게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붙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의 역사는 관점을 거꾸로 볼 때 일어납니다.
미래의 승리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설계도가 주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설계도대로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인생이 기초 공사를 하는 것같이 여기저기 다 파놓았지만,
    참고 인내하면 멋진 새 건물이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꽁꽁 닫혀 있는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대로 라면
  1절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2절에서 거꾸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붙여 준다고 하니 꽁꽁 닫힌 문일지라도 부딪혀야 열릴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아말렉, 미디안, 불레셋, 그 누구와도 전쟁할 때 수를 보지 않고
    [ 하나님 붙여줄랍니까? 말랍니까?
          올라갈까요? 말까요? ]
다윗은 하나님의 작전에 따라 출전하는 것이
    전쟁에 있어서 다윗의 관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한 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승리의 소식을 받습니다.
2절입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적들을 네 손에 붙였노라.
바로 이 표현이 여호와의 전쟁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적들을 너희 손에 붙였다고 선언했으니
    우리는 이미 승리를 보장받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실 때
[ 다 이루었다 ! ] 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승리는 반드시 내 것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어떻게 붙여 줍니까?
2.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붙여 주었습니까?(3-5절)
1) 3절 - 모든 군사는 매일 한 번씩 성을 엿새 동안 돌라.
2) 4절 -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 행하되
      제 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양각 나팔을 불라.
3) 5절 - 양각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불면
      백성들은 다 큰 소리로 외치라 고 합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좀 무모해 보이지 않습니까?
성을 빙빙 돌기만 하면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니요?
정말 황당한 계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부러 이런 황당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왜? 이 싸움은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바로 내가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도대체 여리고 싸움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성을 빙빙 돈 것뿐입니다.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법을 가르치길 원하십니다.
여리고성 전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의 첫 번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승리의 경험은 중요한 것입니다.
승전보가 없는 인생은 패배주의에 잡히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첫 번 전투에서 싸움의 모본을 보이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싸움에 내가 함께 함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을 돌라는,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인간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고전1:23-24절
[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명을 받은 여호수아는 어떻게 행했습니까?(6-7절)
하나님의 명을 받은 여호수아가 어떻게 행했습니까?
6절에 [ 먼저 제사장들을 불러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하라 ]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7절에 [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은 궤 앞에 행하라 ]
여기서 우리들이 할 일은 다만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였던 것도 침묵과 순종이었습니다.
10절입니다.
[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 
우리들의 생각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은 방법을 통해
      우리 앞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과 사람을 통해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십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전쟁에 임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분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한 번만 돌고 함성을 외쳐라
    그러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매일 한 바퀴씩 돌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두 13번을 돌게 만드십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대적과의 싸움에서 믿음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 전투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돌고 있습니다.
보통 전투에서는 소리도 지르며 기운을 북돋아야 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공격하는 측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여리고 성을 돌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처음에는 비장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믿음이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런 방식으로 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질까하는 불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매일 성을 돌면서 바라보아야 하는 여리고성은 보통 성이 아닙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여리고성으로 대표되는
    가나안 성읍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1:28절에
[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
더욱이 여리고 성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처음은 그들의 마음이 녹았을는지 모르지만
다음날부터는 아마 성위에서 화살을 쏘며 욕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신학자들은 여리고성 전투와 같은 싸움을
  ‘여호와의 전쟁’ 또는 ‘거룩한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신앙적 삶의 문제들, 내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주일학교 아이들이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한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 여리고 성은 누가 무너뜨렸니? ]
그러자 그 아이는 겁에 질린 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 아니에요, 저는 안 무너뜨렸어요! ]
이 대답을 듣고 기가 막혔던 목사님은 담당 교사선생님을 불러 이렇게 묻습니다.
[ 교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쳤기에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냐고 물으니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까? ] 
그러자 선생님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 목사님, 그 애 말이 맞습니다.
  그 애는 결코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에요. ]
더욱 기가 막혔던 목사님은 부장 장로님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자 부장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 목사님,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든지, 교회 예산으로 물어줍시다. ]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형편은 아니십니까?                 
성경에는 이 싸움은 내 싸움이라고 수없이 말씀하시는데
여전히 인생의 문제를 내 문제라고 하며
              내가 해결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단순히 하나님 말씀 따라서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삶에 기적이 없는 이유는
    우리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계산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은
    우리 계산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단순히 순종하면 기적을 체험할 줄 믿습니다.

오늘 성경은 세 번에 걸쳐서 이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5절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설명합니다.
6-7절에서는 이 명령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반복합니다.
8-16절은 그 말씀을 순종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왜 이렇게 성경이 반복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도 믿지 않고 순종할 것 같지 않으니깐 반복합니다.
우리는 듣고 또 듣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겨우 한 걸음 순종합니다.

이제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명을 따라 순종합니다.
순종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4. 여호수아의 명을 따라 여리고 성을 도는 이스라엘의 모습의 특징과
        우리 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입니까?(8-16절)
1) 8-10절에 보면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 앞에 나아갑니다.
백성들은 아무 소리도 말고
제사장들로 하여금 일곱 양각나팔만 불게 했습니다.
왜 여기에 양각나팔이 나옵니까?
본래 이스라엘 백성 전 회중을 모을 때는 민10:2절에 보면
    은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그리고 행군할 때나 대적을 치러 나갈 때도 은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특이한 경우에는
    은나팔이 아니라 양각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양각나팔이란 어린 양의 뿔로 만든 나팔입니다.
  불어봐야 빼~! 소리 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양각나팔을 불게 했습니까?
양각나팔은 성경에 히, 말로 ‘요벨의 나팔’이라고 합니다.
왜? 요벨의 나팔이라 했는가?
레15:에 보면 50년 만에 다가오는                     
      모든 잃었던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희년을 요벨의 해라고 합니다.
왜? 요벨의 해라고 하는가 하면 그때에 양각나팔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요벨의 어원을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요벨은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하는 나팔,         
바로 복음의 나팔입니다.
다른 소리는 일절 내지 못하게 했고
오직 양각나팔 소리만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의 승리는 오직 요벨의 나팔
    복음을 듣고 복음의 감격과 능력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도는 모습을 보면
  전사들이 아니라 마치 예배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제일 중심에 선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 앞에 일곱 제사장이 양각나팔을 불며 나갑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들릴 때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복음을 들어야 삽니다.
복음의 감격이 회복되면
    우리의 삶의 문제는 절로 회복되고 해결될 줄 믿습니다.
우리 싸움의 승부는 예배에서 결정이 납니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일의 승리는
  주일예배에서 하나님 임재를 경험해야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나팔 소리를 들어야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기에
    예배를 통해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복음이 내 귀에 듣기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바쁜 일이 많을수록, 중요한 일이 많을수록
    우리는 예배에 전념할 때 세상에서도 승리할 줄 믿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되
  6일 동안은 침묵을 하게하고 마지막 날 제 칠일에 외치라고 합니다.
여리고 성을 돈 것은 무장한 군대만 돈 것이 아니라
    10,20절에 온 백성이 다 따라 돕니다.
여리고 성을 돈 다는 것은 요단강에 들어서는 것보다
    더 무리한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상식이나 병법을 완전히 무시한 방법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리고 성 외벽은 비탈길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성 밑을 백주에 돈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모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절대 순종이 있다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외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라 외치라고 합니까?
16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가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
    여호와가 붙여준 주실 줄 믿습니다! 가 아니라
          붙여준 줄 믿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감격 속에
하나님이 붙여 준 줄 믿습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통해 반드시 경고사항을 지키라고 합니다.
5.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경고한 사항은 무엇입니까?(17-27절)
여리고성 정복은 여호와의 심판 전쟁입니다.
가나안 부족들의 죄악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하는 전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고 사항이 있습니다.
1) 17절에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
그래서 그 탈취물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18절에 [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 에서
      바치다 는 말은 히브리어로 ‘훼렘’ 입니다.
21절에 [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에서
    ‘멸하다’는 단어도 동일하게 ‘훼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여리고 사람들과
    그 소유의 살아 있는 생물들은 다 죽이고
19절에서와 같이
[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는 것 ] 이것이 바로 훼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영적인 의미를 취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악의 바이러스가 조금도 침투하지 말게 하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던 시대로                 
    우상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비록 우양이라고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조류 독감 사태와 마찬가지입니다.
조류독감은 닭이나 오리 등에 기생하는 병원균 바이러스입니다.
이 바이러스는 치사율이 거의 100%에 이르고 감염율이 매우 높습니다.
이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되면
인류에게 치명적인 질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조류독감이 발생한 지역은
반경 3km 또는 5km 안에 있는 모든 조류는 살처분합니다.
수백 마리의 조류를 진멸하는 모습은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어디 세상에 무균상태가 존재하나요?
우리는 세상 속에 살기 때문에 어느 새 죄가 침투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 씻어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훼렘이 되어야 합니다.

2) 17절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렇게 복음은 거역하는 자에게 심판이 되지만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구원과 축복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25절 [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     
복음은 이렇게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구원과 축복이 임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리고 성은 무엇입니까?
벽에 부딪힌 사업상의 위기나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건강이나 학업 성취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여러분 자신 일수도 있고,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가족 일수도 있으며,
우리가 전도해야할 불신의 세계 모든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복음의 감격 속에 이렇게 외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줄 믿습니다 !
그럴 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껏 극복할 수 없었던 상황을 극복하게 하시고,
넘을 수 없던 벽을 넘게 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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