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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정답입니다 (요 1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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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몸을 입고 태어나신 이유도 이 사랑 때문이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이유도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계명은 오늘 읽은 12절 말씀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 말씀에서는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무관심한 채 자신의 삶이나 여가를 즐기길 원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고, 또 자기 삶의 일정 부분을 내어놓아야 하는 작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인은 강도만난 자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것은 위험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이 일을 계기로 자기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위기를 각오해야 합니다. 그를 간호하기 위해서 자기 시간 계획표 상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루를 허비해야 했고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자기희생을 각오하지 않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 자의 대명사가 되어 오늘도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설사 사랑할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 사랑을 받아줄지도 의문이고,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기술과 방법을 모른 채 말과 입으로만 사랑하거나 마음만 앞서기도 합니다. 또 우리의 사랑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미워하고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면 그와 같은 고통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에 무능력하고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정말 우리의 본질일까요? 예수님의 명령은 단지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이 본질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사랑이 마치 낯 설은 것처럼 되어버린 이유는 타락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는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의 모습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조의 6일째 만들어진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6일째 만들어진 것은 가정이요, 인간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두 명의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공동체적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공동체를 묶는 것은 사랑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맞이했을 때의 고백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이라는 고백입니다. 그전까지 아담은 에덴 동산을 지키며,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노동을 했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을 보며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고 결심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이 하나님의 형상이 다름 아닌 사랑의 형상이라 생각합니다. 창세기 1장 27절의 본문도 분명 그런 해석의 여지를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도록 지음 받은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공동체적으로 존재하며 이 삼위일체를 하나로 묶는 끈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며 고통에 찬 절규를 하셨던 이유는 실상 사랑하는 성부 아버지와의 관계가 파괴되는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히 십자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이 파괴되는 실로 엄청난 신성 파괴의 현장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성을 본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그래서 사람은 이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때만이 행복합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이유는 우리를 힘들게 새로운 윤리로 묶으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우리 영혼이 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 안팎으로 표출되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언제 기쁘고 행복하냐 하면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기 직전에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많이 소유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사랑하고 또 십자가를 통해서 더 깊이 제자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과도 같다 할 것입니다. 엄마는 자기 아기를 통해서 거의 완벽한 사랑을 경험합니다. 엄마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를 볼 때마다 기쁨이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은 이미 어린 시절에 효도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엇을 주어서가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또 이렇게 깊이 엮여서 한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책임감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주님이 누리고 있는 이 행복 노하우를 제자들이 나누길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의 기본 원리는 사랑은 사랑을 받은 자만인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만약 내 영혼의 저수지가 말라 있다면 결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물이 흙탕물만 가득 고여 있다면 이런 사랑은 상대방을 괴롭게 하는 사랑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맑고 신선한 물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그러한 사랑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에게 흘러가고,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에게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라는 사랑의 저수지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예수님을 거쳐 우리에게 흘러들어왔고, 이제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이 받은 사랑을 서로 사랑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기를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같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십시오.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교회를 통해서 이 사랑을 많이 공급받아야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 경험이나 심리학적 통찰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은 부부관계나 자녀관계에서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중년층에 해당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랐던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대부분 분단과 6.25 한국 전쟁, 또 산업화라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사회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회사나 직장일로 바빴고, 그나마 집에 들어오는 날도 술에 취하거나 TV를 보거나 자기 일에만 하기에 바빴습니다. 살기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가정 폭력도 많았습니다. 어머니들도 남편의 무정함과 폭력 속에서 그 스트레스를 자식들에게 푸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당한 폭력을 자식들에게 화풀이 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식에게서 받으려고 했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기대나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었습니다. 아마 우리 시대 대부분의 중년들이 경험했던 어린시절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성격은 어딘지 모나고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그렇지요. 그분들은 그분의 부모님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들은 일제시대라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이유가 이처럼 받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그 사랑이 이기적인 되기 쉽습니다. 서로 짐을 나누기 보다는 자기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주기를 원합니다.

자녀들을 향한 사랑도 아마 원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기적일 정도로 자녀에 대해서 무관심한 부모가 있는 반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자녀 교육에 목메고 있는 요즘의 현상은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은 부부가 되어야 할 터인데 중심이 자녀가 되고 있습니다. 자녀는 부부가 행복하면 잘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들은 물질로 사랑을 대신하려 합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한국사회의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물은 계속 흘러가야 하고, 사랑을 받은 자만이 이 사랑을 흘러 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갈된 우리 사랑의 근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강 상류에 건설된 엄청난 수원지와도 같습니다. 끊임없이 그분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고 풍성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 본질을 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본 모습, 내가 바라는 모습을 알아줄 때 마음이 열립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상처, 왜곡된 성격, 지위, 외모 등으로 쌓여 있고 사람들은 그것이 다 인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드러나지 않는 우리 영혼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 안에 자기를 바꾸어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의 소원을 보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으며 뜨거운 한 낮에 물을 길러온 권태에 지친 여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창녀요, 버림받은 사마리아인이라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 여인의 중심에 있는 영혼의 갈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약속하십니다.

니고데모라는 한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 국회의원 신분에 랍비라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지만 그 속에는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한밤중에 사람들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의 중심을 보시고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삭개오라는 한 부자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리며 부자라며 삭개오를 멸시했지만 주님은 다 큰 어른이 뽕나무에 오를 정도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바라보는 시선은 비본질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마치 먼지와 쓰레기 더미로 뒤덮여 있지만 우리 주님은 그 속에 있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아름다운 우리 영혼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들 때문에 얼마나 속는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부유한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사랑에 굶주려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그 중심의 탄식을 듣는 분이십니다.

찬송가 483장의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라는 찬송이 이 주님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1절.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함을 너 받으라 (후렴)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2절. 주 예수의 은혜를 입어 네 슬픔이 없어지리 네 이웃을 늘 사랑하여 너 받은 것 거저 주라 (후렴)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3절. 주 예수를 친구로 삼아 늘 네 옆에 모시어라 그 영원한 생명 샘물에 네 마른 목 축이어라 (후렴)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4절. 너 주님과 사귀어 살면 새 생명 넘치리라 주 예수를 찾는 이 앞에 참 밝은 빛 비추어라 (후렴)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보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또한 예수님의 사랑이 풍성한 까닭은 우리 존재 자체를 그대로 받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라는 것은 우리가 잘나가거나 잘 났을 때가 아니라 상처 많고 추하고 아무런 자격이 없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가치가 있을 때만 사랑을 합니다. 이것을 에로스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그냥 사랑하십니다. 이런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에로스 사랑은 ‘무엇 때문에(because of)’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사랑입니다. 에로스 사랑은 그가 가진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조건에 매이고 물질화 된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그 가치가 없는 존재는 무시해도 되고, 또 그 가치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그런 부담감이 없는 정말 한 인격을 그대로 받아주지만 그 인격 안에서 위대함을 이끌어내는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가치 없는 것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 낸 사랑입니다.

우리 홈페이지 나눔터에 실렸던 글입니다. 어느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있었는데 이 부족에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추장의 젊은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부족민들의 관심은 추장 아들이 어느 처녀와 결혼할 것인지에 모아졌습니다. 이 부족의 결혼 풍속은 암소를 끌고 가 좋아하는 처녀의 집에 주고 청혼하는 것이었습니다. 대개는 암소 한 마리를 주는데 정말 훌륭한 신부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를 줍니다. 이제껏 이 부족이 생겨난 이후로 암소 세 마리를 받은 처녀는 단 두 사람 뿐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추장의 아들이 암소를 몰고 청혼하러 나섰는데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자그마치 암소 아홉 마리나 몰고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족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처녀이기에 아홉 마리씩이나 끌고 가나 하며 온 부족 사람들이 그 뒤를 좇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처녀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을 하고 말았습니다. 집도 허름하고 가난한데다가 그 처녀는 말라깽이에다가 키가 너무 크고 병약한 외모에, 마음까지 심약해서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 그런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족민들은 청년이 미쳤다고 수군댔지만 추장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처녀에게 암소 아홉 마리를 바쳤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래 이 곳에 거주하던 의사가 전했던 것이었는데 이 의사는 본국으로 돌아와야 했기에 결혼식도 보지 못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이 부족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오랜 만에 이제 추장이 되어 있는 그 아들 집을 방문했다 이 의사는 그 아내를 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의사는 이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흑인 여인을 본 일이 없었고, 그 아내는 우아한 자태와 주인의 친절함에 더해 유창한 영어까지 구사하였습니다. 이렇게 완벽할 여자가 있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추장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가 누구요?” 그러자 그 추장 아들은 “저 사람이 그때 그 심약했던 처녀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추장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제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얻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청혼의 순간에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의 자기 가치를 결정 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한 두 마리의 암소 값에 한정 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처음에 아내는 아홉 마리의 암소 때문에 무척 놀란 듯 했습니다. 아내는 그 후로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에 걸맞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공부를 하거나 외모를 꾸미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 해주었음 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점점 더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을 받자 우리 안에 있던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꽃을 피기 시작합니다. 오늘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무가치하고 연약한 자들을 주님은 친구라 부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친구라 부르니 우리가 마치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대우 받은 만큼 성장하고 자기가 받은 대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됩니다. 왕비로 대우 받으면 왕비가 되는 거고, 시녀로 대우 받으면 시녀가 되는 거예요. 왕으로 대우 받으면 왕처럼 되고, 옆집 아저씨처럼 대우를 받으면 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아주 존귀한 존재로 대우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아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오면 대우 받고 있으며 자기라는 존재가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에서 느끼던 그 허위의식과 지위에 의해서 자기를 포장해야 하는 공동체라면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다 내려  놓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런 사랑을 받은 연후에야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우리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해서라도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도 아버지의 계명, 곧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계명을 지킬 때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 새 계명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맛보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우리 신앙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은 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부모가 되어 보아야 효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값진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그 엄청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우리는 이제 서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여전히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그 안에 거하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주님의 방식대로 사랑하면 사랑이 쉽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우리 인간들도 이런 사랑이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눈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에로스 사랑처럼 그 사람의 가치 곧 유용성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곧 유용성이 떨어지면 거리감을 두며, 자기에게 방해가 된다 싶으면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방식이 이렇기 때문에 상대방도 그렇게 자기를 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피곤한 사랑이 되어 버리고 맙니까?

주님의 눈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사랑하는 것은 주님처럼 그 사람 영혼 그 자체를 그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그런 눈이 가능할 수 있는가? 저는 십자가가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하고 있는 한 사람은 나의 유용성에 의해서 평가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귀한 피를 흘렸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눈동자처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님의 시선으로 한 사람을 바라본다면 아무도 업신여길 자 없으며, 아무도 존귀하게 여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인색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받았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지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 형제나 이웃을 위해서 베푸는 사랑은 그 만분의 일도 안 되는 심히 작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의 음성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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