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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약한 인간·도우시는 성령님 (롬 8: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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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인간·도우시는 성령님 (롬 8:26-28)

I. 성령님 환영합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처음 왔을 때는 요즘의 승합차 비슷한 큼직한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어느날 할머니 한 분이 시장에 갔다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걸어갑니다. 선교사가 차를 세우고 "할머니 이 차에 타십시요." 그런데 할머니는 차에 타고 나서도 그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인채 내려놓을 줄을 모릅니다. 보다 못한 선교사는 "할머니, 짐 내려놓고 편히 가세요."하고 말하자, 이 할머니는 "나 하나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이 짐까지 내려놓는담"하며 미안해 하더랍니다.

괴롭고 험한 이 세상 내가 지고 가야 할 인생의 짐을 대신 맡아 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성경에 그런 분이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요.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연약한 인간·도우시는 성령님」입니다.

한국교회처럼 성령론에 관하여 많은 얘기를 하는 곳도 흔치 않긴 합니다만 또 성령론만큼 성숙하지 못한 부분도 많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나타나심을 믿지 않거나 제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 교회 안에서 성령받은 것을 귀신들린 점쟁이와도 같이 공연한 열정과 열심을 내며 광신적으로 날뛰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성품과 상식과 인격을 말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령은 우리의 상식과 인격을 말살합니다. 그럼으로 신접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행동을 하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악령과 다릅니다. ①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밝히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끔 역사합니다. ② 성령은 말씀의 영입니다. 성경 말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③ 성령님은 교회의 영입니다. 언제나 교회를 해치는 방향으로 역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④ 성령은 인격자이십니다. 그래서 인격을 말살시키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성령을 접신적 개념으로 설명한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을 받으면 정신이 더 깨끗해지고 온전해 집니다.
⑤ 성령은 불과 같아서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뜨겁게 합니다. 교회와서 감동이 없는 사람이 성령받아 예배를 드리게 되면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⑥ 성령은 비둘기 같아서 인간의 마음을 순결하게 하고 온유하게 합니다. ⑦ 성령은 기름과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⑧ 성령은 숨결과 같아서 우리 속에 새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⑨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우리 속에 신비한 능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역사하기는 합니다 만은, 구약시대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신약은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가 하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교회 시대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을 환영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역사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그분에게 의탁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역사를 제한하지 마십시요.

II. 인격이신 성령

성령님을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인격이 아니라 자신이 붙잡아 도깨비 방망이처럼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힘(power)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붙잡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붙잡도록 나를 맡겨드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 고민이 되고 이것이 우리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벌레와 같은 인간이 성령을 이용하여 산이라도 옮겨보겠다는 생각과 성령님께서 벌레와 같은 인간이라도 이용하여 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는 생각과는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인지요?

제가 퍽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마음대로 붙잡아서 내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큰 능력이 제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게 만약에 이런 능력이 있다고 하면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은 커녕 하나님 앞에 무서운 책망을 받는 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내 뜻대로 붙잡아서 이용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아닙니다. 그분은 나를 붙잡아서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스러운 뜻대로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자이시기에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과거를 알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기도 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기도 합니다. 때로 나 때문에 행복해 하시기도 하고 나 때문에 아파하시기도 합니다. 그분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 여기 또 다른 보혜사라고 했습니다. 보혜사가 먼저 계셨던 모양이지요. 돕는 이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분의 도움이 없이 우리는 천국에 다다를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멸망된 우리의 영혼을 건져서 영원한 낙원으로 옮겨주시는 보혜사이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어떤 문제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 가정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일거수 일투족과 함께 할 수 있는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그분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믿으십시요. 성령님은 당신의 수호천사로서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 주십니다.

III. 인간의 연약함 - 피조물 다움

제가 벌써 교회에서 전도사, 목사라 불리워지며 목회생활을 시작한지 33년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5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참 잘난 사람도 보았고 못난 사람도 보았습니다. 대단한 학식을 가진 석학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무식한 사람도 만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보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보았고 어린아이들과도 더불어 살아보았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인간의 연약함을 피조물다움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질그릇이 얼마나 허무하게 깨지는가 성경적인 진리를 철저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캄캄한 밤에 친구들과 모여서 숨박꼭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숨기 위하여 높은 담장에 올라가서 캄캄한 밤에 옆집으로 펄쩍 뛰어내렸습니다. 아뿔사! 뛰어내린 그 자리가 바로 장독 항아리가 있는 곳이 있는데 장독이 사정없이 퍽하고 깨집니다. 방안에서 누구야~ 소리를 지르니까 놀래서 뛰어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발자욱 옮길 때마다 장독이 하나씩 퍽퍽퍽 깨지는데 돈 꽤나 물어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질그릇은 허무하게 깨지는 것이구나.'

성경은 인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깨질 수 있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찍이 고백하길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지요.

전에 저희 아파트 옆에 어떤 분이 사시는데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약해 지셨던 모양입니다. 할머니가 돈 꽤나 들여서 좋다는 보약을 먼 나라에 가서 구해와서 1년을 대접해 드리고 2년을 대접해 드렸는데 어느정도 회복되는 것 같더니 몸이 자꾸 쇠약해 진단말이예요. 병원에 가서 종합진찰을 해보니까 그 약이 그 사람 체질에 맞질 않아서 간이 다 녹아버렸습니다. 설마 이럴 줄이야. 영감님 기력 회복하라고 보약 지어 드렸더니 간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멀쩡하던 사람 두 달만에 장례 치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체질을 알고 어버이는 자식의 체질을 아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여기 체질은 소음인, 태음인 하는 체질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인간의 연약성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넘쳐도 문제가 되고 모자라도 문제가 됩니다. 사랑이 너무 많아도 문제고 사랑을 못 받아도 삐뚤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타락합니다. 너무 적어도 비굴해 지는 것입니다. 분수에 넘치게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도 문제가 생기고 은혜를 못 받아도 비참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 은혜가 필요하고 언제 무엇이 필요하고 지금 이 순간에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보십시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체질을 가진 존재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 말 성경에는 "연약함" 단수로 되어있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는 분명히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연약함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연약함들" - 많은 연약함을 가진 존재. 이게 인간이란 겁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니까 배가 금이 가기 시작하니까 쥐새끼란 놈들이 다 기어나오더라구요. 쥐는 벌써 파선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멍하니 그 재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쥐새끼가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을까요? 개미란 놈은 홍수가 날 것을 미리 알고 집을 나무꼭대기로 옮긴다고 합니다. 인간이 홍수를 예측하지 못해서 큰 재난을 겪는 모습을 보고 개미가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을까요? 거미란 놈은 바람이 불기 전에 어디서 바람이 불어올 것인지 바람부는 방향을 알고 거미줄을 친다고 합니다. 한 마리 미물만도 못한게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일을 모릅니다. 한걸음 앞을 모르는게 인간입니다.

육체적으로 연약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 하나에 평생 병원신세를 지지 않았던 장정이 쓰러집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누군가의 눈짓 한번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조그마한 근심 걱정들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합니다. 오히려 강해 보이는 사람일 수록 정서적으로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이 집에 들어오면 그 고독을 견딜 수 없어 외로움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내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시험과 도전을 받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더란 말입니까? 그만하면 반듯한데 돈 앞에 가면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시험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는 아주 의로운데 이성 앞에 가면 꽈당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 앞에서는 깨끗한데 명예 앞에는 꼼짝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듯 보이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싶어서 쳐다보면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충성하는가 싶은데 물질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노랭이입니다. 그만하면 풍성히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 싶은데 언어생활에 날마다 실패합니다. 삶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성을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의 연약성을 통하여 오히려 더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연약성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낙담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연약성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십니까? 연약한 사람을 전부다 영웅으로 만들어 주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 아닙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천사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쓰시는 것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우시는 성령님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도와 주심으로 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IV. 쑨 안티 람바노마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 도운다는 단어를 성경 본문에 퍽 재미있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그 도우심의 사건이 얼마나 신비한지 그 당시에 사용되어지는 단어들을 가지고는 표현이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의 세 단어를 한 단어로 묶어서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도우심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쑨안티람바노마이.

「쑨 - 함께 내 곁에 계셔서 다정하게, 안티 - 반대편에서 건너편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곳에서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람바노마이 - 번쩍 들어 옮겨준다.」는 뜻입니다.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다정하게 계시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날 큰 통나무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는 우리가 한걸음도 꼼짝달싹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던 어느날 거대한 바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서는 내가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부딪혀서 그 앞에서 안타까와 합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내 힘이 도무지 미치지 못합니다. 능력의 한계 저 너머에 있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어떤 힘있는 분이 그 문제 저 건너편에서 통나무 저쪽 끝에서 바위 저쪽 끝에서 그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셨습니다. 갈 길이 보입니다. 다음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성령님은 우리를 이렇게 도와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쑨안티람바노마이"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쩔쩔매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성령님이 옮겨 주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실패한 자리에서 안타까와하며 당황해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날마다 반복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함으로 실패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쑨안티람바노마이.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 "도운다"라는 단어의 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우시나니" - 도왔다가 아닙니다. 과거형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날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도와 주실 것이다. 미래의 약속이 아닙니다. 미래형이 아닙니다. 도우시나니 현재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과거에 여러분을 도와주셨습니다. 미래에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성령님은 여러분을 도와 주십니다. 언제나 도와 주신다는 뜻입니다. 매순간 순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도와주십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이 괴로워하며 기도할 때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직장에서 여러분이 괴로워하며 안타까와 할 때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인생 살아갈 때 여러분이 커다란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성령님 바로 그 자리에 임재하셔서 여러분을 도와 주십니다.

이 시간에 부족한 종이 설교합니다. 저 혼자 설교하는 것 같지만 성령님이 부족한 종을 지금 도와주고 계십니다. 종을 사용하는 성령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통하여 선포하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찬송할 때에 그 찬송이 여러분의 찬송이 되도록 고백적인 찬송이 되도록 찬송 속에 성령님은 여러분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치료하는 광선처럼 아픔을 치료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여러분의 연약한 믿음을 강력한 믿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지금 이 시간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V. 빌바를 알지 못하나

어떻게 도우신다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기도를 돕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성령님은 여러가지 도움의 길이 있을텐데 기도를 돕는다고 얘기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만사를 해결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열이 조금만 올라 보십시오. 기도할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조금만 상심되는 일, 근심 걱정 문제에 부딪혀 보십시오. 기도할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영적인 실패의 가장 뚜렷한 징후가 뭔지 아십니까?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다 할지라도 내가 기도할 마음이 생겼다. 기도해야지. 당신이 지금 기도의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의 역사를 힘입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고서는 어떤 성령의 도움도 우리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그 다음에 뭐라고 이어지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마땅히 빌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그토록 무거운 짐 앞에서 왜 빌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줄 뻔히 알면서도 왜 빌지 않습니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기도도 성령님이 힘을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빌기로 결단했습니다.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될 지 알지 못합니다.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찾아오시면 기도의 제목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기도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마음을 주실 때 이미 문제를 해결 해 놓고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신학자들 가운데 이것 가지고 피투성이 나도록 싸웁니다. 말할 수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성령이 직접 탄식하신다고 주장하는 주경가들이 있습니다. 아니 성령은 탄식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탄식의 영을 회복시켜 주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 그것은 성서 신학자들이나 싸우도록 내버려둡시다. 우리가 싸워야 될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탄식의 영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내 대신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내 속에 탄식의 영을 회복시켜 주셔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슴속에 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울 때에 우리의 얼굴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웃으면서 기도할 때가 많지 못합니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요. 주님 찬양해요. 주님 사랑해요." 기뻐 뛰며 기도할 때가 있긴 합니다만 그런 기도는 대게 10%를 넘지 못합니다. 80-90%는 대게 탄식하는 기도입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마음을 쥐어 뜯습니다. 옷을 쥐어뜯습니다. 얼굴을 찡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괴로워합니다. 주님 날 좀 도와 주십시오. 야곱의 씨름 현장을 연상케 하는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그 순간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여러분을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얼굴이 웃을 때에는 근육 17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웃을 때는 얼굴변화가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괴로워하고 찡그리기 시작하면 43개의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많이 찡그려 지는 거예요.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웃으면서 기도하는 사람보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 사람 왜 그렇게 찡그리나, 무슨 걱정이 많은가, 왜 저리도 근심거리가 많지 그러지 마십시오.

성령이 지금 탄식의 영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 성령과 함께 탄식하고 나면 여러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입니다. 눈물이 변하여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실패가 변하여 승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탄식하게 할 때는 탄식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괴로울 때 나보다 더 괴로워하시는 분이십니다.

VI. 나를 도우시는 주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습니까? 내가 실패했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실망하며 좌절했습니까? 하나님 그것을 나무라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그 연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함을 인정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도와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쑨안티람바노마이, 이 시간 번쩍들어서 옮겨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그분 앞에 나아 오십시요. 그분께 당신의 인생을 맡기세요.
인생길 지치고 힘들 때 당신의 등 뒤에서 당신을 도우시는 손길을 느껴 보십시요.
당신의 한계를 느낄 때 힘있는 그 손길을 느껴보십시요.
쓰러져 일어날 수 없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요.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 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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