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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삼하 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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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도 범죄할 수 있나?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됩니다. 다윗의 부하 장수인 헷 사람 우리아에게 밧세바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다윗은 그녀에게 음욕을 품고 동침을 합니다. 그 결과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는데 다윗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계교를 짜서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고 아들까지 낳습니다. 사실 다른 왕들이 이런 짓을 했다면 크게 문제 안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군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남의 아내를 빼앗을 수도 있고 누구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충격적인 까닭은 바로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했고, 하나님도 그를 특별히 여기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다윗처럼 믿어라, 왕이 되려면 다윗 같은 왕이 되어라." 할 정도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요 모든 왕의 모델이 다윗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메시야도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신앙인 다윗이 이처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더 충격적인 사건이지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청교도 정신으로 세워진 국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목사가 존경을 받습니다. 그 가운데도 제시 잭슨(Jesse Jackson)이라는 흑인 목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이후로 가장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권운동가로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 여성 보좌관과의 혼외정사로 딸까지 낳은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들으며 그런가보다 했지만 미국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잭슨 같은 훌륭한 목사님이 그럴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의 혼외정사와 살인교사(殺人敎唆)는 이 제시 잭슨 사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충격적인 다윗의 범죄 사건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죄를 짓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하게 되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이 취소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려운 문제지요.

제가 부천에 있는 한 교회에서 청년부를 지도할 때의 일입니다. 청년부 회장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이 청년회장 옆에만 가면 담배냄새가 진하게 납니다. 여러분, 담배라는 것이 정말 얼마나 독한 것인지 모릅니다. 담배 피는 사람들은 손을 잘 씻고, 옷에다가 방향제 같은 것을 뿌리고 하면 사람들이 모를 줄 알지만 천만에요. 저처럼 담배 안 피는 사람은 금방 압니다. 특히 악수를 하고 나면 그 손에 밴 담배 냄새가 그대로 제 손에도 옮기 때문에 금세 압니다. 이 이야기 하면 혹시 저하고 앞으로 악수 안 할 분도 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이 청년회장은 담배냄새도 늘 나고 가끔은 토요일 밤에 과음을 했는지 주일 아침까지도 입에서 술 냄새가 나곤 했습니다. 제가 모른 척 했을 뿐이지 그 친구가 직장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뻔히 알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친구를 만날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끼어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늘 어둡고 근심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청년회장이 저에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저 참 괴롭습니다. 분명히 교회에 오면 기쁘고 즐거운데 직장만 가면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니 말입니다. 목사님은 눈치를 못 채셨겠지만 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술도 먹고 담배도 피고 별 짓 다합니다. 거짓말도 하고, 허위서류도 꾸밉니다. 그러다가 교회 오면 회개하고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데, 그 다음날 회사 가면 또 그렇게 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죄 지으면 안 되잖아요? 저 같은 놈도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까? "저도 형제가 술 담배 하는 것 다 알아요." 그 회장이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알았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왜 모릅니까? 그런데 제가 그랬지요. "그런데 술 담배가 문제가 아니고 지금 형제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 더 문제네요." 그 때 제가 들려준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일 수도 있지만 워낙 중요한 내용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 받고 의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다시 죄를 짓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번 구원 받고 죄 사함 받은 사람은 죄를 짓는다 해도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죄를 짓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제가 구원 받은 것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형제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좀 안심이 되세요? 하지만 분명히 알아 두세요. 구원 받은 사람은, 죄 사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 안 지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을 당연시하고 마음대로 죄 짓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3장에 나온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자 베드로가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10절에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은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다시는 구원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고 또한 목욕을 또 다시 할 필요는 없더라도 날마다 길에 다니느라 발이 더러워지니 발은 씻어야 하는 것처럼 이미 구원받은 사람도 날마다 이런 저런 죄 때문에 더러워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내 죄를 씻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설명을 듣고 그 회장은 상당히 안심을 하는 눈치였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회개하려는 자세도 생긴 것을 느꼈습니다. 꽤 세월이 흐른 후 그 형제를 신학교에서 우연히 만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되어 있더군요. 죄에 대한 고민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저는 그 친구가 목사가 된 것보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자유로워진 것이 더 기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죄와 회개의 문제를 분명히 깨닫고 해결하면 아주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죄를 판단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이 죄를 지은 다음에 시작됩니다.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왜 보냈을까요? 다윗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다윗은 자기가 죄를 지은 줄 모르고 있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다윗은 간음을 하고 그 범행을 은폐하려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실한 부하장수까지 죽게 하고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아를 죽인 후 태연하게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들여 아내로 삼고 죄악의 씨인 아들까지 낳아 잘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다윗인데,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요 영적으로도 최고의 수준에 오른 사람인데 어떻게 자기가 한 짓이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당시의 사회적인 통념 때문입니다. 이 시대 모든 나라의 왕은 절대자입니다. 심지어 왕을 신격화시켜 신의 아들이나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신 자신이라고 할 정도로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국가 자체가 왕의 소유물이고 백성들 또한 왕의 소유입니다. 주인이 종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왕이 백성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으며 백성의 재산이나 아내나 딸도 왕이 내키면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습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왕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부하 장수의 아내를 빼앗고 그 부하를 죽인 것이 당시로 보면 죄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그 당시 사회적인 통념으로는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한 짓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태연히 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죄의 기준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이 다윗 사건처럼 세상의 통념상으로는 죄가 아니라고 칩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죄 아니라고 해도, 세상의 기준으로나 법으로나 죄가 안 될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서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성공하고 돈 벌고 인정받으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박수를 받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너도 억울하면 출세를 해라" 하면서 그토록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성공하고 출세하려고 달려드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악하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인정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또 세상에서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들키지만 않으면 죄가 안 됩니다. 잡히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죄를 실컷 짓고도 안 잡혀서 안 들켜서 나 의인이요 하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아직 이 영화를 안 보았지만 요즈음 극장에서 <그놈 목소리>라는 이상한 제목의 영화가 상영 중입니다. 제목도 이상하지만 그 제목 옆에 더 이상한 말이 붙어있습니다. '현상수배극'. 이게 뭘까요?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1년 1월 29일, 서울 압구정동에서 유괴당한 9살짜리 이형호 어린이가 유괴된 지 44일 만에 한강 배수로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은 지금까지 잡히지 않았고 남은 것이라고는 범인이 부모에게 끊임없이 걸었던 협박전화의 목소리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2006년 1월에 결국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이제는 그 범인이 잡히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소시효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아무리 죽을죄를 지어도 일정 기간만 안 잡히면 벌을 안 받는다는 이상한 제도입니다. 살인범도 공소시효가 15년이기 때문에 이 유괴살인사건의 범인 역시 잡히더라도 벌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록 법적으로는 벌을 줄 수 없지만 지금이라도 잡아서 사회가 심판하자는 취지로 '현상수배극'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잡아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법적으로 죄가 안 되는데 세상이 뭘 어떻게 벌을 주겠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공소시효라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처럼 안 잡히고 시간만 보내면 저절로 공소시효가 되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 공소시효가 없다기보다 회개하고 죗값을 치루는 날이 공소시효입니다. 다윗도 죄를 숨기고 세월이 흐르다보면 공소시효가 되거나 죄가 잊힐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다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 다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해결할 때까지 말입니다. 진정으로 죄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판사가 아니라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죄가 아니라고 면죄부를 받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판단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11:27을 보십시오. 다윗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죄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 밧세바를 데려오고 아들도 낳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분명히 어땠다고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분명히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다윗의 죄를 깨닫게 하려고요.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음욕에 눈이 멀어 영안이 어두워지고 영적 판단력이 마비된 것입니다. 죄가 이래서 무섭습니다. 죄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멀게 하고 영적 판단력을 마비시킵니다. 뭐가 죄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판단 못하게 만듭니다. 다윗도 죄로 눈이 멀어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살아갑니다.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런 눈먼 다윗에게 간 것입니다.




내가 바로 죄인임을 인정하라

다윗을 찾아온 나단 선지자는 난데없이 이야기를 하나 들려줍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살았는데 한 사람은 부자라서 양과 소가 아주 많았고, 또 한 사람은 가난해서 자기가 사서 기른 암양 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그 암양을 얼마나 아끼고 귀하게 여겼는지 같이 먹고 품에 안고 같이 자고 딸처럼 키웠다. 그런데 그 부자가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을 대접한답시고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인 암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나단 선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잘 듣고 있다가 그만 크게 분노하고 맙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지라." 그런데 정말 이렇게 점잖게 말했을까요? 공동번역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다윗은 왜 이렇게 흥분한 것일까요? 남의 죄라서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 나쁜 놈, 죽일 놈은 바로 다윗 자신인데 다윗은 그 큰 죄를 짓고도 죄라고 생각 안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런 죄를 지었다고 하니까 흥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남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하면서, 정작 내 죄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이 지으면 '죽일 놈'이고 내가 지으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나단이 다윗 앞에서 뭐라고 소리칩니까?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요! 하나님이 당신에게 왕위를 주시고 그토록 많은 복과 은혜를 주셨는데 그 많은 처와 첩을 두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하의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았으니 그 '죽일 놈'이 바로 다윗 당신이란 말이요." 얼마나 매섭습니까? 참으로 서릿발(秋霜) 같이 서슬 퍼런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중요합니다. 13절에 보면 이 말을 듣고 다윗이 나단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그렇습니다. 이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그제야 다윗이 내가 죄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죄인이 아니라 '죽일 놈'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더 죄를 은폐하려고 당장 나단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키라고 했을 테지만 다윗은 안 그랬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릅니다. 다윗이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것은 그가 죄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한 반응이 달랐습니다. 그도 여느 사람들처럼 죄인지도 모르고 살았지만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 깨닫게 하신 순간 모든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죄를 하나도 짓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죄를 지었을 때 우리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인지 아닌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죄 아니라고 해도, 세상은 그 정도는 괜찮다고 남들도 다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연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해 그 죄를 지었다면 은폐하지 말고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나서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다윗도 비록 회개했지만 그 죄의 씨앗인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죽고 맙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도 참 너무하시네. 회개했으면 용서해야지 죄 없는 아이는 왜 죽이시나?"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를 회개하면 반드시 그 죄의 모든 결과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그 죄를 끊지 못하고, 죄의 대가로 얻은 것들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참 회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죄 짓고 주일날 교회 와서 한 번 회개한다고 기도한 후 세상에 돌아가면 또다시 죄 짓는 사람들, 말로는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죄의 생활을 단호하고 끊어버리지 못하고, 죄로 인해 얻은 대가와 즐거움들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 만나 회개하고 자신이 세리장을 하며 불의하게 얻은 재물을 포기합니다. 우리도 정말 예수님 말씀처럼 한쪽 손발이라도 끊어버리고 한쪽 눈이라도 빼어버릴 각오를 가지고(마 5:29~30), 아니 다윗처럼 아들이라도 죽일 수 있는 각오로 죄를 회개하고 끊어버리려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적당히 회개하고 "이 정도면 됐지" 하면서 여전히 세상의 것들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에는 결코 '적당히'라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회개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다윗이 이 아들을 잃은 다음 얻은 아들이 바로 솔로몬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아버지는 다윗, 어머니는 밧세바 똑같은 부모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부모에게서 낳은 첫 아들은 실패해 죽었고 둘째 아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차이가 뭘까요? 사람은 똑같지만 회개해서 새 사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도 참 못나고 부족합니다. 예수 믿고 회개하여 새 사람 된 후에도 여전히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상황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릅니다. 완전히 새 사람입니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을 벌어집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죽일 놈은 바로 접니다." 하고 고백하는 순간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의 능력입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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