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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생 라합의 간증 (히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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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 큰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인데,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좀 무료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을 향해 물었다. “당신은 혹시, 철학에 대해서 좀 아는 바가 있소?”

  그러자 사공은 겸연쩍은 듯이, “저 같이 무식한 사람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아는 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좀 안 되었다는 듯이, 혀를 ‘쯧쯧’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인생의 4분의 1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러면서 또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과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소?” 사공은 기가 죽은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 역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자 사공을 무시하는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안 됐지만 당신은, 절반이나 헛되게 산 것이요”라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돌풍이 불어, 나룻배가 뒤집혀졌다. 두 사람은 깊은 강물에 빠졌다. 이번에는 사공이 그를 향해 물었다. “선생님은 많이 배우셨으니까, 수영하는 법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허우적거리면서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나는 헤엄치는 법을 모르오.”

  그러자 사공은 혀를 ‘쯧쯧’차면서, 이렇게 일러주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선생님 인생의 전부를 잃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철학을 논하고, 과학을 논한다고 할지라도, 막상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믿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누리고, 착하게 살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 많이 누리다가, 영원한 멸망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영원한 생명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지식, 인간의 선행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가 없다.

  (롬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 밖에 없다. 본문은 주인공 라합은, 이 사실을 분명히 간증한다. 인간적으로 라합은,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 결코 아니다.

1. 나 같은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히11장을 통해, 믿음의 열조들의 신앙간증을 살펴보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믿음의 간증을 들었다. 그런데 본문은, 지금까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이 사람은 이방인이다.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요, 또한 여권이 존중되지 못했던, 어려운 때에 살았던 여인이다. 더구나 그녀는 기생이었다. 기생은 조금 미화된 번역이다. 창녀, 매춘부였다. 민족적으로는 민족을 배반한 매국노다. 이런 사람이 믿음의 기라성 같은 영웅들 속에, 같이 등장하고 있다.

  히11장에 기록된 사람을 살펴보면, 아무도 그 이름 앞에 수식어가 붙어있지 않다. “믿음으로 족장 아브라함은”이라고 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애굽의 총리 요셉은” 하지 않았다. “믿음으로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이런 표현도 없다.

  그저 단순하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요셉은, 믿음으로 모세는”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라합 만큼은, 그의 직업과 신분이 기생이었다고 말씀한다. 이처럼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우리의 계급장이 필요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나아만 장군처럼, 계급장으로 나오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계급장을 달고, 나올 수 없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라합은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창녀였다. 인간적 보면,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비천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라합의 이름이 별처럼 빛나는, 신앙의 위인들 사이에, 당당히 들어가 있다. 그뿐 아니라, 성경에 라합의 이름을 언급하는 성경이 4권이나 된다(수2장, 수6장, 마1:5, 히11:31, 약2:25).

  한 사람의 이름이, 신구약의 66권 가운데, 네 번씩이나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처럼 라합은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그녀의 부끄러운 과거를 뒤로하고, 자랑스러운 미래의 축복의 도구가 되었다. 라합은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는 표상이 될 수 있었다.

  기생 라합과 같은 표기법은 성경에 결코 낯설지 않다. “세리 마태” “셀롯인 시몬”이라고 나온다. 매국노의 대명사였던 손가락질 받던 세리가, 과격한 운동권이었던 열심당원이 변화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증거 하고자 이렇게 표현하였다.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후에, 라합의 변화된 인생은, 이웃들에게 얼마나 도전이 되었을까? 한때는 창녀로, 매춘부로, 여리고 어두운 뒷골목에서, 지나가던 남성들을 유혹하며 방황하던 여인이, 이제는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 되어,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다.

  과거의 잘못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하나님께 붙잡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성경을 보면, 인간적으로 보아서,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같이 십자가에 달렸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눅23장).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믿음 때문이다. 그러면 라합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수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며 신앙을 고백했다.

  라합은 어느 날,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온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게 되었다. 이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2. 믿음의 증거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고백에서 멈추지 않았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신저로 온 정탐꾼을 영접하고 보호하여 평안히 돌려보냈다. 이 일은 목숨을 건 행위였다.

  이스라엘 간첩들을 숨겨준 행위가 발각되면, 그녀는 민족반역자로 몰려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들을 숨겨 주었다. 그들이 무사히,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그녀는 담대할 수 있었다.

  후일에 야고보는, 이런 라합의 행동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맺어야 할, 전형적인 열매라고 소개한다. (약2:25-26)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합이 목숨 걸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던 이유는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 그 당시 여리고 사람은, 이스라엘과 싸울 준비를 했다. 그들은 우뚝 서 있는, 자기들의 견고한 여리고 성벽을 믿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벽을 믿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다. 이처럼 믿음에는 행함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행함으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장경동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침례식 때, “서도님은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 저는 지금 죽더라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그러면 또 “만일 공산당이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예수 믿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어떻게 하시겠냐?” 묻는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예, 저는 총에 맞아 죽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인가? 그러면 침례를 줘야 하나? 주지 말아야 하나요? 그런데 하나를 더 물어 본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하겠는가?”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조금 전까지 큰소리 뻥뻥 치던 사람들이, 아직 십일조만큼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강도가 나타나서, 우리 목에 칼을 들이대고 “돈 있는 것 모두 다 내놔. 그렇지 않으면 찔러 죽이겠다.” 그럴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돈은 다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라고 말해야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안 된다. 못 준다. 내가 비록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내가 가진 돈은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분명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서라면 순교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못한다면, 정상적인 믿음이냐고 하였다.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솔로몬의 동굴’ 이란 책이 있다. 값진 보물이 숨겨져 있는 솔로몬의 동굴로 가는 길은, 온통 숲이 아니면 사막인데, 숲 속에는 커다란 늪이 하나 있다. 그 늪을 건너지 않고는, 누구도 솔로몬의 동굴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늪을 건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그 늪에 있는 몹시 좁은 길을 찾아서, 따라가야만 한다. 그 길은 두어 뼘 밖에 안 되는 아주 좁은 외길이기에, 안내자가 없이는 아무도 찾을 수 없다. 안내자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섣불리 늪으로 들어갔다가, 늪이 빠져 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그 길을 아는 사람은, 오직 정글 속에서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굴속에서 사는 볼품 없는, 검둥이 노인 한 사람뿐이다. 사람들이 이 노인을 무시한다면, 늪을 건너지 못하고, 숲 속에서 굶어 죽거나, 맹수의 밥이 되고 만다. 이 노인은 이 숲의 유일한 구원자이다.

  늪을 건널 때도 안내자를 따라, 매우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야만 한다. 딴 곳에 정신을 판다든지, 옆이나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도중에 힘들다고 걸음을 멈추게 되면 발을 헛디뎌, 밑도 끝도 없는 수렁에 빠진다. 아무리 힘들어도, 안내자만 보고 끝까지 잘 따라가야만 살 수 있다.

  라합은 말씀대로 순종한 사람이다. 기독교인이 그런 사람이 되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기생 라합처럼 행함이 따르는 믿음,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살아 역사하는, 참 믿음이 되어야 한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란다.

3. 믿음의 결과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를 원했다. 그런데 여리고 성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며,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찾아 죽이려 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철저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지만, 기생 라합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다.

  그 결과 라합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살릴 수 있었다. 라합의 믿음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대로, 라합의 믿음은 자신을 살리고, 그의 가족들도 구원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영광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신다. 구원의 상을 주신다. 축복의 상을 주신다. 영광스러운 상을 주신다.

  그러나 믿고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야단맞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만드셨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하도록 하셨다.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당연히 호통 치실 수밖에 없다.

  라합이 하나님을 믿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간간이 들려온 소문, 단편적인 지식밖에는 믿음의 힘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라합은 천한 기생이었지만, 그런데도 믿고 구원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는, 완벽한 성경을 가지고 있고,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는 교회에서, 구원받도록 권면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래도 믿지 않다가, 후에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주님 앞에서 변명한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라합의 믿음을 보라고 하실 것이다.

  몰라서 믿지 않았다는 핑계는 댈 수 없다. 라합보다 몇 백 배 좋은 조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타오르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라합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구세주가 되시지만, 믿지 않던 여리고 성의 사람들에게는 심판자가 되셨다.

  그 심판이 얼마나 엄했는지, 그 성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은 다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구원받았다. 여리고 성이 모두 무너져 망하던 순간, 붉은 줄을 창에 매었던 라합과 그의 친족들이 모두 구원을 얻었다. 창에 매었던 붉은 줄은 십자가를 상징했다.

  십자가 아래 모였던 라합의 친족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다. 최후의 심판 날에도 이와 같다. 권력이 있다고 구원받을 수 없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구원받을 수 없다. 자기를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다.

  라합의 믿음으로 인해, 자신이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구원을 받았다.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갈 수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믿음으로 먼저 우리 자신이 살고, 우리의 가족이 살고, 우리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는,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이 축복의 통로, 축복의 샘물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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