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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느 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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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봄의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천지의 대세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제 봄이 오게 하셨으면, 그 어떤 겨울의 추위가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겨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기운이 대지를 덮고 파릇한 봄의 생명의 움돋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리 추워도 겨울추위라고 얘기하지 않고 꽃샘추위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겨울이 다시 왔구나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 삶에 함께 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당연히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겨울 지나 봄이 오듯이 고통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기쁨이 우리들에게 올 것입니다.
결코 고통만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를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이제 5주째 느헤미야서를 말씀드리고 있는데 더 정확한 것은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훌륭한 일을 했느냐 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느헤미야라는 사람을 어떻게 활용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는가라는 것을 우리는 더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느헤미야처럼 훌륭해지자라고 생각도 하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느헤미야처럼 사용해 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지난 4주 동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고통의 소식 속에 비탄해 하는 백성에게 슬픔 속에 탄식하며 회개의 눈물만 흘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소망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사명을 느끼게 하셔서 새로운 각오와 사명으로 그의 길을 달려가게 합니다.
예루살렘성이 황폐되고 민족의 모든 국운이 땅에 떨어지고 믿음이 어두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은 느헤미야의 마음에 회개와 통한의 눈물이 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는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의 도성을 재건하고 믿음의 새로운 역사와 상승을 이루어야 되겠다’라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를 자처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소망 속에 사명이 깨달아지고 승리의 출발점에 서게 된 느헤미야는 갖은 준비 끝에 드디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작의 역사를 이룹니다. 온갖 방해와 비웃음 속에서도 의지를 가지고 마침내 진득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 속에 그 성 건축의 역사를 진행합니다.
마침내 오십이 일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예루살렘 성벽이 수축됩니다. 오십이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대 역사가 이루어진 것은 백성들의 큰 단합과 집중과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짧은 기간에 이 일이 완성되었던 것처럼 사단의 많은 어려움도 집중적으로 공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와 은혜를 주시고 느헤미야의 단호한 믿음에 근거한 모든 생각과 결정과 실행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이 그 일을 완수해 냈던 것입니다.
조금 잘하면 사람이 칭찬받되 워낙 탁월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처럼 이 일이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셨음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단순히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곽을 건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루살렘 성곽의 완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곧이어 영적인 대 부흥의 역사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곽 자체를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백성을 규합하고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 앞에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를 이루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곽은 그들에게 있어서 성을 보호하는 성곽이 되기도 하지만 민족의 믿음의 회복과 국운의 상승을 이루는 하나의 귀한 과정이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이 예루살렘 성곽을 완성하고 나서 그들은 승리에 도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곽완성위에 그 수문 앞에 모여 학사 에스라를 초빙하고 모든 백성이 모여 영적 재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학사 에스라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할 때 그들은 모두 새벽부터 낮까지 다 일어서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말씀을 받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믿음의 절기를 회복합니다. 그들이 통곡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모든 가르치는 레위 족속들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지금은 성일이니 너희가 슬퍼하지 말고 살진 음식을 먹고 단 것을 먹고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들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 몇 가지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어떤 일에 승리하고 성공한다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이루어짐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회복과 영적부흥을 이루는 것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했다, 그 일이 완성되어지고 성공되어졌다, 그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또다시 2차적인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그 부흥된 심령을 가지고 우리는 새로운 또 다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며 그것이 순환되어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영적인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를 향하여 나아가게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일은 결국 영적인 사역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대표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악 속에 빠졌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모든 백성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의 세계 속에는 대표적인 원리를 가지게 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연인으로 평가받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으로 평가받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디가든지 목사로서 평가받는 것 같아요. 제 이름을 가진 자연인으로 평가받지 않고 ‘목사가 이래’ 라고 평가받는단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각각 자연인으로 어떤 일을 하지만 자연인으로 평가를 받다가 어느 날 문득 우리가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집사가, 장로가, 권사가 이렇게 행동한다, 혹은 그렇게 하는구나’ 라고 오히려 평가도 받고 비난도 받는 대표성의 원리를 가지는 것을 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표가 될 만하지 못해요. 나를 가지고 에수 믿는 사람들을 평가하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세상일이 아닌 영적 사역으로 이룰가를 생각합니다.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기도 하고 이 세상의 생계유지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더불어 하는 모든 일이 영적인 사역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돈을 벌거나,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들을 과제로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세상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또 우리는 수시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잘 될 때에도, 못 될 때에도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월드컵 축구 선수권 대회가지는 것을 보면 각국에서 열 몇 명의 선수들이 와서 경기를 하는데 그 나라 백성, 온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 같아요. 열 한사람이 뛰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뒤에는 나 한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믿음의 백성들이 있는 것이고 나 때문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다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나는 그렇게 원하지 않는데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도 하고, 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역사를 보며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될까 하는 것을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일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룬 후에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 있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잃었던 믿음을 찾고, 시들었던 믿음을 회복하고, 보존케 하며 새로운 영적 활기의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곽을 완성한 후에 백성들은 정말 승리에 도취돼서 무엇인가 방만하게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 성곽을 완성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곽을 완성해서 거기서 규합된 힘을 가지고 민족을 단합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을 상승하고 그것을 통해서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를 힘입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곽 완성 후에 수문 앞에 모이게 하셨어요. 그리고 수문 앞에 모인 백성들에게 학사 에스라를 초빙하여 율법을 읽게 할 때 그들은 잃었던 율법을 회복하고 절기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그들의 믿음의 새로운 전기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룬 작은 일을 통해 도대체 하나님의 어떤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가를 면밀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더 잘 한다면 어떤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잘 될 때 인간들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십시오” 하지만 정작 우리가 그 위치에 이르렀을 때, 그 일을 이루었을 때 그 다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에 감사하며 기도하겠지요. 그런데 사간이 지나면 그냥 그 위치에서 해야 될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 그렇게 애절하게 기도했던 때를 잊어버리게 되는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이 바쁘니까, 여러 가지 관계가 있으니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뜨겁게 기도했던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 자주 드리지만 제가 개업예배에 자주 갑니다.
목사니까 청빙하면 어느 모임이든지 꼭 갑니다. 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일이 잘되어 하나님 앞에 큰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문제는 그 일이 워낙 잘되다 보면 교회를 못 나오시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못 나오셨나요?”하고 물어보면 “제가 일이 너무 많아서요. 죄송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눈에 안 띄는 것 같아요. 더 바빠져서 눈에 안 띄는 것이겠죠?
그때마다 제가 고민합니다.
‘이 일이 잘 된 건가 안 된 건가’ 그래서 요즘은 “하나님, 될 만큼만 되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너무 잘되니까 교회를 안 나오시는 것 같아요.
교회만 안 나오면 그 믿음이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내가 어려울 때 기도했던 것처럼 잘 됐을 때 기도한 것을 그대로 실현하는 사람이 믿음의 인물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한 가지 이루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또 다른 목표가 설정되고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부흥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해 새 힘을 얻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하다보면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은 예루살렘 성곽 수축하는 것이 목적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목적의 일부고 지나가는 단계요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루살렘 성곽수축이 그들의 꿈이 아니라 그것은 과정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하다가 목적 자체를 잃어버리고 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숲을 없애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뛰어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숨을 쉴 수 없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영적 사역에 대한 사모함 없이 그냥 우리가 일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데 하나님과 상관없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잘 되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잘됨이 된다면 그건 아무 유익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상관없는데 축복을 받는다면 나중에 그것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을 이룰 때까지 어떤 자리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기도할지 모르지만 그 일을 이루고 나면 괜히 부담스러워질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독선적인 신앙이 되자는 말이 아니라 그 근본을 잊지 말고 믿음에서 시작했으면 당당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다니엘은 총리에 올랐어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의 정적들에게 올무가 되어서 사자 굴에 던져지는 위기에 빠져도 그는 그 일을 지속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큰 영광을 돌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저는 요셉을 보면 정말 대단한 인물 같아요. 모든 요셉의 주변의 사람들은 요셉의 출신성분을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의 노예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사람입니다. 감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감옥에 있다가 어떤 기회가 되어서 왕궁에 오게 되고 발탁되어서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좋아 하는 것 같아도 뒤에서 얼마나 요셉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다 극복했던 사람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오게 됩니다.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 만나서 모든 일들을 밝혀야 될 때 요셉은 그냥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복받쳐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 궁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요셉의 울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이 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지요? 그와 같은 요셉의 울음을 듣고서도 사람들은 요셉을 인정하고 요셉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던 거예요. 만약에 요셉이 아무리 마음이 슬프고 복받쳐 올라도 내가 여기서 이와 같이 울음을 울 때 내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히브리 사람의 정체가 다시 한 번 드러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나를 누추하게 생각한다면 적어도 총리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 그 정도 자제력이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모든 것 다 생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정도 되면 요셉은 자기의 모든 출신성분을 뛰어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는 히브리 백성입니다. 당시 애굽 사람에게 히브리 사람은 변방의 아주 누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에 당당히 자기의 아비를 모셔올 것을 요청했고 자기 아비를 모셔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던지 자기의 모든 과거의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디 가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겉으로 드러나도 우리는 두렵고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내 모든 일이 하나님과 관련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돌려지고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유익을 줄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숨기고 담대한 것이 아니라, 내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놓아도 담대하고 자신 있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을 수축할 때의 열정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받고 기뻐하는 것에도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 성곽 수축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따르기 때문이지요. 우리 성도의 승리의 삶은 세상에서도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받고, 실행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면-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균형이 무너지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효율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일은 시간이 없어서 잘 못하지만, 내가 이 일을 하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한 시간 봉사하느니 그 한 시간에 자기가 하는 일을 하면 열배, 백배, 천배의 효과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내가 한 시간 봉사하느니, 한 시간 더 일해서 여기서 봉사하리라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매우 효율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조금 더 다음 단계로 나가면 효율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바쁘고 시간이 없어요. 내가 그 시간에 다른 일 하면 더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 전에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내가 그 한 시간 내고, 내 몸을 드리고, 내 마음을 드리고, 그리고 내 시간을 드려서 봉사하고 헌신할 때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한 번 설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느헤미야가 승리한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그의 능력이 활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지나면 철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효율을 능가하는 철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왜 고도의 과학자가 운동을 해야 합니까?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왜 땀 흘리며 육체적인 노동을 해야 할까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일까요? 당연히 보이기 위해서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그 가운데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백성에게는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내가 정말 효율적으로 어떤 일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에게 헌신 하지만, 내가 몸과 마음과 시간을 드려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열배, 백배, 일을 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내가 그 시간에 시간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현직에 있을 때 수고하세요. 바쁘고 시간이 없을 때 수고하세요. 여러 가지일로 너무 시간에 쫒기고 어려울 때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야 합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정말 곤고하고 고통스러울 때 변함없이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이 모든 상태가 좋아도 더 수고하고 애쓸 수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여건이 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여건이 되지 않아도 그럴 수 있을 때 여건이 되면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 되는 일이 있습니다. 뭐죠?
밥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밥 먹어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해서 한 열흘 굶으면 일도 못해요. 아무리 시간이 없고 바빠도, 아무리 일이 잘돼서 한 시간이라도 더 활용하고 싶어도 잠자야 합니다. 열흘 정도 잠 안자면 사람은 모든 저항력이 떨어지고 기능이 마비돼서 결국 그 일 못하게 될 겁니다.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투자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밥 먹는 것, 쉬는 것, 잠자는 것,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도 마음과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여보,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요. 그런데 내가 바빠서 미안해” 하고 5년 동안 얼굴 한 번도 안 봤어요. 그러면 사랑하는 건가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겁니다. 손에서 멀면 그 일도 멀어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의 성도들과 교제하는 일에 우리는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할애 헤 놔야 합니다. 그거 할애하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고, 그 관계가 우리의 능력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우리의 삶을 잘 분석 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내 삶에서 어떻게 표현돼야 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어 그 다음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 생활에서 부흥은 다시 재투자되어 영적생활에 집중되고 그것이 다시 선 순환되어 믿음 생활 속에 그것이 생활의 은혜로 다시 부흥되어져야 합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이다”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드리고 나면 힘이 나야 합니다.
자동차가 가솔린이 없어서 다시 가솔린을 충전하고 나면 자동차가 잘 가지 않습니까? 바늘이 맨 마지막에 기름이 없다는 선까지 가면 마음이 불안한데 가득차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 마음이 충만해지고 왠지 모르게 흥건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드리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학습속도가 빠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학습속도가 빠른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학습능력에 의해서 모든 일이 결정됩니다. 금방 보고 배워서 그 다음을 능가할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학습속도가 빠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활가운데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입니다. 어느 날 그것이 짐이 되면 그 순간부터 우리 삶은 곤두박질치는 겁니다.
여러분 <예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징조라고 애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계속 잘될 것인가, 아니면 일이 잘 못 될 것인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즘 너무 너무 기쁘고 감사해요. 그러면 여러분은 하고 있는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 들을 때마다, 또 내가 생각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없고 자꾸 집중이 안돼요. 여러분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신을 차리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감격하며 하루 눈뜨고, 주님 때문에 감격하며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잠자기 전 취침기도 할 때는 누워서 기도합니다.
“오늘도 우리 성도들 잠잘 때 꿈속에서라도 주님을 만나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아침에 눈뜰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새로운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감격하며 눈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눈 감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주셨고 제가 비록 부족했지만 제 마음속에 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단 한가지라도 이룰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는 감격 속에 잠들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며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는 너무 마음에 감격이 없는 것 같아요. 마음이 기쁘셔야 합니다. 편안해지셔야 합니다.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살다보면 화나는 일 있지요. 속상한 일 있지요. 안 되는 일 있지요. 마음 상한일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충격을 받으면 그 충격 때문에 잠시 휘청거릴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의연하게 설 수 있는 백성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감격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8장 3절>을 보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전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은 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게 도대체 몇 시간 입니까?
그리고 또 <8장 5절>을 보면 학사 에스라가 백성들을 위해서 책을 펼 때 모든 백성이 일어서서 들었다고 얘기했습니다.
<8장 9절>을 보니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얘가하고 있습니다. 이게 은혜 받는 백성의 모습입니다.
<8장 6절>을 보면 에스라가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맨 아맨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여러분께 말씀 안 드렸는데 오늘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아멘” 하고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성경에 다 손을 들고 아멘하고 응답하며 하나님께 감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감격의 삶입니다. 내 마음속에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지요? 또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잖아요. 책을 읽을 때 이것 정말 좋은 책이다 하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 속까지 후련해지는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감동이 돼야 합니다.
이제 봄이 될 텐데 새싹이 파릇파릇한 것을 보면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의 세계를 볼 때 우리 다른 사람을 보면 마음속에 감동이 돼요.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기쁨을 줄까,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줄까,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 아멘 하는 주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 번째 오늘 <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우리 따라합시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다시 한 번이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라’ 믿음은 짐이 아니라 힘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눈물을 흘리며 울며 통곡합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사람이 말합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고 울지 말라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먹으라 혹시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네가 좀 나누어줘서 같이 먹으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눈물은 우리를 슬프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믿음은 우리를 슬프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줍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기쁜 일을 생각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만 생각하면 힘이 쫙 빠지면 안 됩니다. 아 지금 주님이 내 곁에 계시다면 내가 잘못해도 다 봐주시고 우리에게 힘이 되셔서 내 스스로 그 잘못을 고치게 해 주실 것 같습니다. 저는 주님을 기대합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라’ <시편 37편 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하는 일에 힘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당 나가시면 마음에 힘이 나셔야 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
내 힘의 근원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생각하세요. 주님 때문에 나와야 합니다. 잘못된 근원에서 힘이 나면 그것 때문에 낭패합니다. 어려워도 하나님께 힘을 얻으면 시작해야 합니다. 다윗에게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세요? 다윗이 강성할 때 가장 큰 특징은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면 시행했어요. 그때는 다윗이 강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묻고 응답받고 실행하는 것을 멈췄을 때 다윗은 하강기에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이건 뭐죠. 여호와께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그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묻고 행하던 여리고성을 정복하던 때와는 달리 아주 작은 아이성 전투에 ‘전략도 필요 없고 다 갈 필요도 없어. 삼천 명만 내려가면 일거에 물리칠 수 있어’ 하고 생각했지만 두 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간이라는 사람이 여리고성 전투에서 무엇인가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물건을 훔쳐서 숨겼어요.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간단하게 그들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받는다는 것은 여호와께 힘을 얻는 겁니다.
주님 때문에 힘이 날 때 새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삼손이라는 사람 보세요. ‘하나님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삼손이 민족의 사사로 평생을 살았는데 기도한 것은 이번 한 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도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이 일 때문에 삼손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반열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합니다. 그리고 민족의 이름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뭐라고 애기했느냐하면 “내 민족을 위하여 마지막 힘을 주십시오.”라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내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소서”라고 얘기했습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한심스럽습니까? 민족의 지도자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민족을 위해서 한 번도 수고하지 못했는데 내가 한 번 내 민족을 위하여 수고하리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개인사적인 감정에 빠져서 내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만하면 삼손의 인물됨을 아시겠지요? 큰 능력을 부여받았는데 그의 치졸한 가슴 때문에 민족을 위하여 수고하지 못하고 그 힘을 이와 같은 희화거리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어떻게 됐지요? 그가 죽을 때 죽인 사람이 그가 살아서 죽인 블레셋인보다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냐하면 결국 블레셋사람에게 이와 같은 큰 역사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힘을 얻어서 블레셋 사람을 물리치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삼손은 본인은 자기 원수를 갚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민족을 위하여 수고한 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손의 이와 같은 꼬여진 마음 까지도 활용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시고 그에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삼손의 좁은 마음에 비해서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를 베푸시는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어떠한 순간에도 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을 보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그 작은 기도 때문에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면 그것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저는 자다가도 이 말이 너무 좋아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여러분 믿으십니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믿으십니까?
여호와를 기뻐하셔야 됩니다.
저는 봄이 오니까 왜 그렇게 좋은지 모릅니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모르게 좋아하니까 더 좋잖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냥 좋은 일을 주실 것 같아요. 뭔가 좋은 일을 주실 것 같아요. 저는 우리 성도들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을 볼 때 ‘저분을 저렇게 살다 갈꺼야’ 하고 생각되는 분 아무도 없어요.

어떤 순간에도-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한번 은혜를 주셔서 그 이름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것같이 그런데 우리는 마지막 순간도 아니잖아요. 아직도 해야 될 일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은혜를 주실지 몰라요.
여러분 요새 기도하지요. ‘하나님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이렇게 1년 정도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어떤 느낌이 듭니까? 기도해 볼수록 나는 더 좌절된다 하고 생각되세요? 내가 무슨 수로 천명을 도와? 이런 생각 드십니까? 아니죠?
하나님,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 나로 말미암아 한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 되게 해 주십시오. 왜 이런 기도를 시키셨습니까? 그냥 스쳐가는 기도라면 굳이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라 라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실 줄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또 새 일을 이루고, 새 역사를 기획하며, 새로운 시도를 이루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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