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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지가 견고한 자 (사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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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가 견고한 자

(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1. 오늘 본문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You will keep in perfect peace him whose mind is steadfast, because he trusts in you.)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심지가 견고한 자”는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생활이 한결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날 북대서양을 항해하는 큰 기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은 아주 거대한 태풍으로 폭풍우가 휘몰아쳤기에 아무리 큰 배라도 속수무책으로 거센 바람에 떠 밀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근심스러운 승객들은 선장을 중심으로 갑판에 모여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때 참으로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배 옆으로 한 빙산이 폭풍을 거슬러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는 수만 톤이 넘는 기선임에도 불구하고 세찬 바람에 가랑잎처럼 떠 밀려가는데 저 빙산은 어떻게 해서 태풍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승객들은 선장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장님, 어째서 저 빙산은 이 엄청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까?” 했더니 선장은 웃으면서 “저 빙산은 겉보기 하고는 다릅니다. 드러낸 부분은 약 1/10 정도이고 9/10는 물에 잠겨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8%가 드러나 있고 92%는 잠겨있습니다. 즉 빙산은 거의 전부가 바다 물에 잠겨있는 셈이지요. 그리고 바다 밑에는 거대한 해류가 흘러가고 있는데, 이 빙산은 바다 밑의 해류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면 위에 그 어떤 태풍이 불어와도 빙산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빙산은 오직 바다 깊은 곳을 흐르는 해류의 흐름을 따를 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결코 요동하거나 표류하지 않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환경과 처지에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이 바로 “심지가 견고한 자”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는 일편단심 그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2. 그러면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강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평강’, ‘평화’, ‘평안’, ‘화평’ 등은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완전한 평화”란 무엇이겠습니까? 전쟁이 전혀 없이 평화스러울지라도 가난하여 굶주리면 평화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물질이 풍성할지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역시 평화의 가치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돈도 많고 몸도 건강하지만 인간관계, 종족관계에 해묵은 갈등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원한이 남아 있다면 그 역시 평화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재산도 넉넉하고, 몸도 튼튼하고, 모든 인간관계도 원만하지만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다면 그 평화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면 그 결국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평화”란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우리의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곧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평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그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생활이 한결같은 사람’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어린나이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왕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 가운데 왕족과 귀족 출신으로 신체적인 결함이 없고 외모가 반듯하며, 지능 지수가 높아 학습능력이 빠르고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들을 데려다가 바벨론 학문을 가르쳐 왕궁에서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단1:3-4) 이른바 ‘포로 두뇌 집단 활용 정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바벨론 왕은 자기가 먹는 제일 좋은 음식을 그 포로들에게 먹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지정한 궁중 음식을 일체 거절했습니다. 이유는 궁중의 모든 음식은 우상숭배의 제물로 바쳐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비록 포로로 끌려왔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결코 우상숭배로 인하여 자신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1:8)고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벨론의 모든 인재들보다 지혜와 총명이 무려 10배나 뛰어난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왕의 꿈을 해석하는 것을 계기로 바벨론의 총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총리 지위는 느브갓네살 왕에 이어 그 아들 벨사살이 통치할 때에도, 그리고 그 다음 나라 이름이 페르시아로 바뀌고 다리오가 통치할 때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리오 왕 때에 다니엘을 시기하던 바벨론 신하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 악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자를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입니다.’(단6:7)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악법이 시행된다는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둔 다락방에서 전에 항상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단6:10) 다니엘 제거를 위해 악법을 만들었던 자들이 이 사실을 즉시 왕에게 고소했습니다. 왕은 불량한 신하들의 악법 제정의 음모를 모르고 어인(御印)을 찍어버렸기 때문에, 다니엘의 인물이 너무 아깝지만 악법도 법인지라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던져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속에 던져진 다음 날 새벽에 왕이 급히 사자굴로 가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니엘을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사자굴에서 구할 수 있었느냐?’ 그때 다니엘이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므로 저는 평안합니다. 이는 저나 왕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왕은 너무 기뻐서 즉각 다니엘을 끌어내 살펴보니 어디 하나 상한데 없이 멀쩡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6:23)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다리오 왕은 악법을 제정하여 다니엘을 고소했던 자들을 그 가족들과 함께 사자굴속에 던져 사자 밥에 되게 하고, 악법을 폐기하며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습니다.
“(단6:25-27)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이렇게 해서 다니엘은 다리오 왕과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시대에까지 형통했습니다.(단6:28) 이처럼 다니엘은 뜻을 정한 후에 죽을 때까지 그 뜻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참으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었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그리고 법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심지가 견고한 믿음으로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평강에 평강으로 지켜주신 것입니다.

3. 일평생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았던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여기 “자기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완전한 평화”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다니엘처럼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민6:24-27)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참으로 행복하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이 “완전한 평화”입니다. 재물과 건강의 복, 명예와 권력의 복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믿음,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한결같은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완전한 평화”가 없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평화”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는 가정과 교회, 나라 민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완전한 평화”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마치 해바라기가 항상 그 얼굴을 해를 향하고 있듯이,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주 사이판 임마누엘 교회에 가서 많은 은혜를 그곳 교인들과 함께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이 목사님께서 임마누엘 교회를 개척할 당시 많은 어려웠던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은혜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해가는 중 모 장로님 가정이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로님이 교회에 등록하면서 이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이 목사님, 앞으로 장로의 뜻을 잘 맞추어 목회를 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이 목사님은 장로님의 이같은 말에 주저하지 않고 “아니, 장로님, 내가 하나님 한 분의 생각과 뜻을 맞추어 목회하기도 힘든 지경인데 장로님의 뜻까지 맞추어 목회하라구요?”라고 반문했답니다. 그랬더니 금방 깨닫고 생각을 바꾸더랍니다.

교회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담임목사는 교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들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후 그의 관심과 생각 속에는 오직 예수뿐이었습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나는 이제부터 오직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노라”(빌3:8) ‘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뜻을 깨닫고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어서 그 동안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렸노라.’는 삶의 고백입니다. 이어 바울은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6:17)”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십자가의 흔적’을 말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경험했노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23-27에서 ‘십자가의 흔적’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것이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후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매를 맞는 듯한 아픔, 생명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경험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같은 십자가의 흔적, 즉 수많은 아픔과 고통, 삶의 위기를 겪었지만 “심지가 견고한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서울의 한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경찰서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경찰병원의 과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일의 성격상 거의 좌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일을 당하고 그분은 낙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충성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결국 이 분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의 위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 때 그분이 ‘좌천 감사헌금’ 100만원을 들고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면목이 없습니다. 저번에 저는 좌천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이 전에 있던 경찰서 지역에 탈옥수 신창원이 나타났는데, 그 신창원을 잡지 못해서 후임 경찰서장이 파면을 당하고 자신은 보직 변경으로 파면을 면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좌천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도 있고 잔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 부는 바람 속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부는 바람에 흔들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습니까? 아름답게 핀 꽃이 부는 바람에 가시에 찢겨지는 이유를 아십니까? 꽃의 향기를 멀리 멀리 날리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좋은 바이올린은 일반 식물이 자라기 힘든 수목 한계선 지점에서 온갖 비바람, 눈보라를 맞으며 자란 나무에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우황은 병든 소에서 뽑아내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형편 처지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심지가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원망 불평하다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가 견고한 믿음을 간직하므로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자”가 되시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평화”,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는” 복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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