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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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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본문 : 요 4:19~26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수가 마을의 우물 곁에서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주고받은 대화의 일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3a)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라” 여기 “이 때”가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사순절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라’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 “영과 진리”라는 말이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개역 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우리는 지금도 일상대화에서도 습관적으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 “엔 퓨누마티 카이 알레세이아(έν πνεύματί και άληθεία)”를 번역한 것인데 “영과 진리”가 정확한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 말을 ”영적으로 참되게“ 라고 번역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많다고 합니다.
사랑도 많이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권위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공신력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도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절 뒷부분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더 많지 않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기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아. 내가 찾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하실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은 이 문제의 답을 같이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사람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예배가 그 초점이 사람에게 맞춰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그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행여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분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 분은 처음에는 주일이 되면 백악관 가까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부터는 목사님을 초청해서 백악관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일에 대한 비난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예배는 교회에 나와서 성도들과 함께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대통령이 되더니 사람 변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대통령은 그 일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저 한 번 짧게 변명을 했습니다.

예배드리는 장소를 변경한 이유가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실질적인 문제로, 경호원들이 경호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자기 때문에 무장을 한 경호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부터 마음에 걸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정말 중요한 이유인데 신앙양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예배에 참석하면 목사님도 대통령인 자기에게 신경을 쓰고, 사람들도 자기에게 신경을 쓰고, 예배의 초점이 분산되는 것 같아서, 자기 때문에 예배가 방해를 받는 것 같아서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데 때로는 자기 때문에 그 원칙이 깨지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기 때문에 방침을 바꿨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목사님 한 분을 백악관 예배에 모셔 왔는데 그 목사님이 대통령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예배를 인도했다고 합니다.
그 예배가 자기에는 더할 수 없이 은혜가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대통령은 예배가 무엇인지 잘 아는 참된 신앙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그 용어는 잘못되었다’ ‘그 말은 이렇게 고쳐야 한다’ 이런 의견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감리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방침은 충실하게 따르는 편입니다.
‘헌금은 봉헌이라고 해야 한다,’ ‘성가대는 ‘찬양대’로 해야 한다,‘ ‘축복이란 말과 복이라는 말을 구별해서 써야 한다,’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 밖의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문제가 있더라도 이미 굳어진 말들은 그대로 써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어현상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1989년에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이 개정되어 공표되었는데 그 개정안은 이미 굳어진 말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큰 흐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관용(慣用)을 인정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 본다‘는 안 된다, ’예배 드린다‘고 해야 한다.’입니다.
‘예배 본다’는 말은 예배의 본질을 잘못 알게 하기 쉬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철저하게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드립니까?
하나님께 드립니다.
무엇을 드립니까? 
우리의 최선을 다한 정성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저 설교가 내 귓맛에 얼마나 맞는가?’ ‘내 마음에 얼마나 드는가?’ 이렇게 ‘나’를 기준으로 하지 마세요.
‘저 설교가 과연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인가?’
이렇게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찬양대의 찬양을 들으면서 ‘이 찬양이 나에게 얼마나 감흥을 주는가?’ 이것을 기준으로  하지 마세요.
‘이 찬양이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이 되는가?’ 이것을 기준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이면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줍니다.
‘아멘’하게 만듭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라는 짧은 설교를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예외로 내 마음에는 안 들지만, 내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해 볼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금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고 여겨지면 그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설교보다 사람의 마음에 드는 설교가 박수를 받고, 설교자들에게 그런 설교를 요구하고, 설교자들이 그런 설교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 강단의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앞부분을 보세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에는 우상숭배의 요소와 이방신들에게 드리는 예배의 요소가 섞여 있었습니다.
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천지를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신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이런 것들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을 대강 아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예배드린다면 여러분도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예배드린다면 여러분도 아덴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설교하면서

아덴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a-23) 라고 하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예배는 드려야하겠는데 누구에게 예배드려야 할 지 몰라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만들어 놓고 예배드렸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흉이 되지 않습니다.
알아야할 것, 아는 척 하는 것을 실제로는 모르고 있는 것은 큰 흉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하고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아덴 사람들보다 더 무지한 일을 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둘째, 장소보다 본질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그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때는 그리심 산에도 성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심 산 예배와 예루살렘 예배가 날카로운 대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고 다른 교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말하기 주저됩니다만 역사에 기록된 일이고 잘 알려진 일이어서 예화로 사용합니다.
해방 직후에 장로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기에 다시 한 번 크게 나뉘었습니다.
그 때 한쪽은 종로5가에 있는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모였고, 한쪽은 종로 2가에 있는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모였습니다.
지금은 한쪽을 통합측, 한쪽을 합동측이라고 부릅니다만 그때는 한쪽을 연동파, 한쪽을 승동파라고 하면서 거칠게 대립했습니다.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심 산 예배, 예루살렘 예배, 어느 쪽의 예배가 옳은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부터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앞에 있는 분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라아과 상종하는 법이 없는데 이 분은 사마리아 여인인 자기에게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하는 이야기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지금까지 전혀 듣지 못하던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아, 이 분 선지자로구나!’ 알았습니다(19절).
이 분이 메시야라는 것은 아직 몰랐습니다.
‘이 분은 선지자이다. 이 분은 내가 제일 궁금하게 여기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하고서 던진 질문이 예배의 장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디에서 드리는 예배가 맞습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다섯이 있었던 여인,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라고 할 수 없는 떳떳하지 못한 여인, 그래서 물을 길러오는 것도 남들을 피해 한낮에 와야 하는 여인인데 이렇게 예배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배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예배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디가 맞는다고 하셨습니까?
‘그파’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까?  ‘예파’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까?
아무 파의 손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다.’ 하셨습니다.

21절을 보세요.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만일에 근처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또는 제사장이 있다가 이 말을 들었다면 큰 일 날 소리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의 예배, 참된 예배는 장소나 시간 같은 외형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고 영적인 자세와 진심으로 드리는 내면적인 예배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스바냐서 2장 1절은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 3장 11절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뒤 그는 시장, 탄광, 빈민촌,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몸담고 있던 영국 성공회, 국교회, 요즘 가톨릭과 통합설이 나오고 있는 교회, 격식을 중요하게 여겨 고교회(高敎會)라는 말을 듣고 있던 교회의 전통과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감리교회입니다.

지금 새 학기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학생들에게, 새 학기에 공부할 때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성전의 십자가 밑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 신학에서 건물 중심의 교회 예배에 대해 재해석을 한 사람은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Vonhoeffer 1906-1945) 목사님입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이런 생각을 ‘기독교의 비종교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독재자 히틀러의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가 1943년 4월 5일 체포되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1945년 4월 9일 교수형을 당할 때까지 2년 동안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군대 영창에도 있었고, 독일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감옥에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곳이 본회퍼 목사님에게 있어서는 예배장소였습니다.
한동안은 부켄발트(Buckenwald)라는 곳의 수용소에 갇혀 있었는데 이 수용소에는 유럽 여러 나라의 전쟁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그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이 때 본회퍼 목사님은 죄수이면서도 국제교회의 목사 같았습니다.
그 예배에 참석했던 페인 베스트(Payne Best)라는 분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본회퍼는 매우 겸손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항상 보잘 것 없는 일에 있어서도 기쁘고  행복스러워 보였고 살아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깊은 감사의 분위기를 갖게 하는 것 같았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그에게 진실하고 항상 그와 같이 있는 사람은 별로 만나지 못하였다

본회퍼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쉔베르크의 바바리아 마을에 있는 수용소에 이감되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1944년 4월 8일에 같이 갇힌 사람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설교는 이사야서 53장 5절의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 예배가 채 끝나기 전에 본회퍼 목사님은 끌려 나가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끌려 나가면서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삶의 시작입니다.’ 이었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일하는 피셔 휠슈트롱이라는 나이 많은 의사가 자기 방의 창문을 통해서 본회퍼 목사님이 사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피셔 휠슈트롱 의사는 뒷날,
본회퍼 목사는 죄수옷을 입은 채 꿇어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와 열심과 확신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50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고 증언했습니다.

교수대 앞에서 본회퍼 목사님의 모든 옷이 다 벗겨졌습니다.
발가벗겨진 몸으로 교수대 밑에 무릎을 꿇고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대로 올라갔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교회에서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감옥에서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수대 밑에서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그 자신이 충실했습니다.
감옥에서 드린 예배, 교수대 밑에서 벌거벗겨진 몸으로 드린 예배가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주일에 자기가 적을 둔 교회의 성전에 출석해서 드리는 예배,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경건의 기본입니다.
주일 오후에는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의 명단이 작성됩니다.
그 명단에는 이름 옆에 결석사유가 적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그 명단이 최근 들어 가장 두툼했습니다.
결석사유는 대부분 공통된 것이었습니다.
한 글자였는데, 제가 결석자 명단 첫 장에 크게 써놓았는데 여기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월요일 새벽기도회에 그 명단을 가지고 단에 올라갑니다.
합심기도 시간에 강대상에 무릎을 꿇고 그 명단을 보면서 기도를 합니다.
결석사유를 보며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마지막으로 그 명단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혹시 이 가운데 주일성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어제 안 나온 분이 있다면 주일성수의 중요성을 그의 마음에 새겨 주옵소서.’ 기도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깨 대해 어떤 자세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거나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 경건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형식을 본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형식이 본질을 가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형식이 본질보다 앞서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장소와 시간보다 본질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예배를 드리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셋째, 정성을 다 해야 합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우리의 모든 본성을 하나님께 순복시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통해 무디어졌던 우리의 양심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두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의 목적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모든 내적인 병의 근원이 되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 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이 말에 대해서 긴 설명을 준비했습니다.
‘영이란 무엇인가?’  설명하고, 그 다음에 ‘진리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설교원고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그것을 다 지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드린 말씀, ‘영과 진리의 예배는 정성을 다 한 예배입니다.’ 이 한 줄로 요약했습니다.
여러분,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그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그릇을 마련해야 합니다.
국을 접시에 담아서는 먹을 수 없습니다.
음식은 거기에 맞는 그릇에 담아서 먹어야 맛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성이라는 그릇을 마련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성경 주석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전 인격적 예배’라는 말을 썼습니다.
‘전 인격적 예배’는 ‘정성을 다한 예배’라는 말과 같은 뜻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달 한 번씩 평화교회에 가서 탈북자들을 위한 예배를 드립니다.
그 교회에는 정해진 반주자가 없습니다.  그 기관 직원의 부인인 여집사님 한 분이 반주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인사이동이 있었는지 얼마 전부터는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서 간 우리 교회 유희준 전도사님이 기타로 묵도송, 찬송 반주, 기도송을 연주합니다.
지난달에는 탈북자 소년 하나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반주를 하는데 꼭 북한 혁명가요 반주하는 식입니다.
피아노를 치는 자세부터 그렇습니다.
이 소년이 악보는 볼 줄 압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찬송가 반주를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악보 보고 피아노 칠 줄 안다고 예배 반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소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평화교회 예배 실무는 김동기 목사님이 담당하고 있어서 같이 가시는데 김 목사님이 반주를 하실 수 있어서 제가 예배 중간에 김 목사님에게 반주를 부탁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 깨달은 것이 ‘예배를 드리는데 영으로 하는 기타 반주가 영으로 하지 않는 피아노 반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목양 체임버가 그 예배에 가서 특별 연주를 했습니다.
‘고향의 봄’을 연주할 때  탈북자 거의 전부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지요.
목양 체임버 피아노 반주자, 우리 교회 시온 찬양대 반주자가 그 예배 반주 전체를 맡았습니다.
예배가 사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예배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 반주도 영으로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정성을 다 해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며 마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사순절이 시작된 지금은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 장소보다 본질먹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예배. 정성을 다 한 예배, 이와 같은 예배를 드려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가 되도록 하는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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