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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려놓음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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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나는 누구인가?

유대회당에 설교를 참 잘하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랍비의 설교를 듣고 어린 신자가 말했습니다. "랍비님의 설교는 우리만 듣기 너무 아깝습니다. 책으로 출판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랍비 왈 "책은 내가 죽은 다음에나 내야지요." 어린 신자가 말했습니다. "랍비님,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좋은 책 한 권을 쓰는 것은 대학 하나를 세운 것만큼 영향력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부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베스트 셀러를 통해 생명의 양식을 얻고자 합니다. 이 시간은 「베스트셀러가 주는 양식」그 첫 번째 시간 2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통해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아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 주님만 사랑해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 그 사랑 위에 서리 」

참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까요?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내려놓으라 말씀하십니까? 왜 내려놓으라 말씀하십니까?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내려놓은 다음, 날 보고 어찌 살라는 겁니까? 그것 붙들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말입니다.

II. 여리고의 삭개오

오늘 본문에 보면 얻을 만큼 얻고, 가질 만큼 가졌던 한 중년의 시점에서 자신이 쫓아 왔던 것들, 오랜세월 쌓아왔던 것들을 예수 앞에 내려놓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한 중년 신사의 고백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을 움켜쥐기 위해, 얻기 위해, 쌓기 위해 달려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양심도 인격도 버리고 달려왔습니다.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오늘 본문에서 "여리고"라는 지명은 대단히 중요한 장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낙원이란 뜻을 지닌 당시 상당히 큰 도시였습니다. 땅은 비옥하여 농사는 잘 되었고, 종려나무숲이 울창하고 당시 향유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교통의 요충지로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고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던 도시가 여리고였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부유의 도시 한복판에서 뭔가 의미심장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까? 첫 구절부터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단락에서는 예수께서 여리고 입구에서 한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리고 도시를 다 지날 때까지는 아무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막 여리고 고을을 빠져나가려는 시점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간단하고도 평범한 문장 같지만 단순한 문장이 아닙니다. 우리같은 범인이 지나간다고 한들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지금 지나고 계신다. 누군가에게 대단한 기회가 될 수 있지요.

여리고 정치 지도자가 예수님을 만날 것인지, 회당의 종교지도자들이 아니면 급박한 문제가 있는 가정 그 누군가 예수를 모실만한데 아무도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리고 마을을 그냥 지나가셨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될 뻔했습니까?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 막바지를 빠져나가려던 찰라에 돌연 등장하는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2절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라는 자가 있는데 라고 기록하지 않고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면 삭개오라는 이름속에 어떤 의미가 있음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순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속에는 이 땅에서 순결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는 부모의 커다란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이 본문의 암시입니다.

가문이 원래 부자였는데 그가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 아마 "부자요 세리장"이라고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부자고을 세리장이라는 직업이 그가 부자로 살아가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무제도는 오늘과는 퍽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선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되는 일정한 금액이 있습니다. 그 다음 얼마를 걷느냐 하는 것은 세무 징수원의 자유입니다. 할당된 금액을 로마 정부에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이 백안시했던 부류가 창기와 세리 그리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구제불능의 사람가운데 세리가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더더구나 부유한 도시 여리고 성의 세리장, 그는 민족의 반역자요 가난한 동족을 착취하는 흡혈귀로 취급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 - 그는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믿음도 인격도 팔아먹고 유대공동체와 나라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돈을 모아 자기 콤플렉스를 메꿔 보려했습니다. 그는 오직 돈과 명예만을 쫓아 달려온 인생이었습니다. 그것을 얻고 그것을 쌓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돈을 모으고 명예를 얻었습니다. 돈을 얻고 세상적인 직위를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움켜쥐면 행복을 움켜쥘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삭개오는 돈과 행복이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의 영혼의 공백, 심령의 허기, 삶의 공허, 그것은 돈으로 메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생각하게된 것이지요. 이게 인생이 아니구나. 이만큼 가진데는 이유가 있을게야. 예수를 만나봐야지.

III. 내려 놓지 못하게 하는 것들

본문은 3절로 이어져 갑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보고자 하되" 이 말은 호기심이 아닙니다. 유명인사를 보고자 하는 군중심리도 아닙니다. 헬라어 문법으로 보면 "보고자 하되"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다는 얘기이지요. 그리워했다는 뜻입니다.

왜요? 삭개오는 가난해서 예수님 만나 부를 구해야 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워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 몸에 병이 있어서 예수님 만나 병 고침을 받아야지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그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려놓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포기하고 싶어 달려왔습니다. 인생의 본질을 찾고싶어 달려나왔습니다.

막상 달려나와 보니 주님이 두 팔 벌리고 기다리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히게 됩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렇게도 간절히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달려왔건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키가 작고 - 내 안에 있는 원인입니다. 마음의 키가 작고, 내 믿음의 키가 작고, 내 능력의 키가 모자라서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많아서 - 나는 몸부림을 해 보았으나 주위 환경이 너무 복잡해서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 때로는 내 속에 있는 요인 때문에,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에 인생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예수님 만나고 싶어 달려나왔지만 언제나 키는 작고 사람은 많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예수님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믿음도 모자라고 순종도 모자라고 기도도 모자랍니다. 키가 작아서 예수를 보지 못합니다. 직장이 나를 붙듭니다. 주위 사람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주위 환경 때문에 소중한 결단의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내려놓음의 신비를 배우기까지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적인 야망, 명예 그리고 나 자신을 내려놓으면 내가 없어지는 줄 알기에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키가 작은 것입니다.

내려놓자니 주위 사람들이 내 앞을 가로 막고 나섭니다. 때로는 가족이 걸립니다. 때로는 내 주변에 형성된 사람관계 - 맨 파워가 나를 물고 늘어집니다. 사람이 많아 예수를 볼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요.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깨끗이 던질 수 없다면, 내 환경을 하나님의 손에 깨끗이 내려놓을 수 없다면 "내려놓음"의 신비는 맛볼 수 없습니다.

IV. 뽕나무에 올라가라

이때 삭개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포기하지 아니했다"하는 것이 4절의 기록입니다.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뽕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 지금도 여리고가 끝나는 남쪽 지점 끝에 오래된 돌 무화과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바로 이 나무가 2000년전 삭개오가 올라갔던 그 나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 뽕나무는 한국에서 누에고치를 먹이는 뽕나무가 아닙니다. 중동지방의 돌무화과 나무를 말합니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나무 한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 큰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하여 나뭇가지에 사람이 앉으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무는 집을 짓는 목재로도 쓰이고 애굽에서는 미라를 보관하는 나무로도 쓰이는데 이 나무로 만든 관은 3000년이 지나도 양호하다고 합니다.

이 커다란 나무위로 키가 작고,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이 끼고, 운동량은 모자라 약간 배가 나온 난쟁이 삭개오. 이 마을 한 유명인사가 버둥대며 기어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일은 자기 체면을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 명성, 이것을 내려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창피나 부끄러움을 내려놓았습니다. 집어던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의 손가락질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예수만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수고와 댓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의 열정과 적극성이 없어 신앙의 정상을 경험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삭개오 같은 이런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내려놓음의 신앙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신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얻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라면 내려놓음은 신앙의 완성입니다.

예수는 이런 삭개오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5절과 6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5절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어지는 6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예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 '무화과나무 잎사귀 사이로라도 뵐 수만 있다면' 한 가지 기대로 나무 위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문득 나무 아래 이르신 예수께서 위를 쳐다 보십니다. 그분의 눈빛 하나에 삭개오는 온 몸이 고압선에 감전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께서 내 이름을 아신다. 예수님이 나를 아신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신다. 저 분은 내 고독을 알고 계신다. 나의 외로움을 알고 계신다. 나의 갈등과 문제를 알고 계신다. 내 번뇌를 알고 계신다. 예수께서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고 계시는 구나.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알고 계시는 구나. 예수께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있는 내 중심을 보고 계시는구나. 예수께서 내가 새롭게 살고자하는 내 열망과 기대와 꿈을 알고 계시는구나.

그뿐이 아닙니다. 내 마을 사람들, 내 고장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고 조롱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알아주신다. 내 동족, 유대인 모두 나를 벌레처럼 대했는데 예수님은 직접 내 집에 오신단다.

삭개오는 금방이라도 나무에서 떨어질 것처럼 급히 내려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V. 내려 놓을 수 있는 힘

그러나 당신이 신앙의 절정을 향해 나아갈 때 사탄은 보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예수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할 때 사탄은 끊임없이 나를 물고 늘어집니다. 오늘도 사탄의 병정노릇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이 있지요. 사탄에 붙들린 하수인들이 나의 가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수군거림으로 들려옵니다.

7절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주님과 함께 삭개오는 자기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수군거리며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예수께서 저 끔찍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다니, 로마의 앞잡이, 세금의 착취자. 저 집으로 예수님이 가지 못하시도록 막아야 한다"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비난하는 소리까지 쏟아냅니다. "예수님도 부자를 좋아 하시나봐? 예수님은 우리편인줄 알았는데 부자 편이시구만?"

예수님은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하셨습니다. 틀림없이 두 사람은 길을 가며 아름다운 얘기를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주님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주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실 때 놀라서 나무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 주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이 시간 삭개오를 향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삭개오 인생의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 움켜쥐는 인생에서 내려놓는 인생으로 바뀌어 집니다.
내려놓음! 그것은 내 힘 내 신앙 내 결단으로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힘을 주셔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내려놓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내 인생의 야망을 내려놓는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은 물론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얻은 그 큰 기쁨이 없이는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사랑이 너무 크고 너무 귀해서 감격하며 울어본 사람이 아니면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얻은 그 사건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내려놓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VI. 내려 놓음

예수님과 나눈 그 능력의 대화는 이런 결과를 낳습니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자기 집에 온 일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성경에 수많은 위인들이 있었지만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길을 발견하고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런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 만난 감격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내려놓음이 가능했을까요?

삭개오 - 그는 예수 모신 감격 때문에 재산의 전부를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땅에서 회개의 값을 가장 많이 지불한 사람 가운데 한사람 이 삭개오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바울 - 그도 예수를 얻고 온갖 명예, 부귀권세, 세상의 지식과 철학 -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내려놓았습니다.

베스트셀러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입니다. 이런 그가 세상이 부르는 많은 자리를 내려놓고 몽골에 선교사로 갑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유학생활과 몽골 선교사역을 통해 자신이 배운 내려놓는 삶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놓은 자신을 어떻게 채워 가셨는지를 생생히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삶이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움켜쥐고 더 많이 쌓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지요. 어느날 하나님이 내게 오셔서 그것을 내려놓으라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내려놓는 것은 곧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려놓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 일 때, 그리고 이론적으로 토의를 할 때는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사건이 되어야 할 때 내려놓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압니다. 내려놓으면 그것이 진짜 내것이 된다는 사실을. 내려놓을 때 더 큰 것으로 하나님이 되돌려 주신다는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여기서 신앙의 위인과 범인이 갈라집니다. 여기서 이용규 선교사는 "제가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합니다.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해 갑니다. 인생의 중심자리를 버리고 가장 자리 변두리로 나아갑니다.

당신은 무엇을 내려놓았습니까? 라고 묻는 독자들에게 저자는 대답합니다.

첫째 내려놓음이란 자신이 쓸 수 있는 그 힘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가지면, 사회적 지위를 얻게되면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위해 쓰는 것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 -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그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지식과 경험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으면 고집쟁이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셋째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며 내 주변에 쌓인 인간관계를 즉 맨 파워를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산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해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행복과 평안과 쉼을 알아가는 것이 내려놓는 삶입니다.


넷째는 나 자신을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빗금쳐 놓은 영역이 있습니까? 이것만은 움켜쥐고 싶은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 집에 황금벽돌을 주시고 싶어하는데 당신은 정작 흔해빠진 시멘트 벽돌을 붙들고 있습니까? 그것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려놓음이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신비를 배워가는 것이 내려놓는 삶입니다.

남태평양의 섬들에서는 이런 재미있는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는다고 합니다. 나무에 줄로 묶어 놓은 여러 개의 야자열매에 작은 구멍을 내고 땅콩을 잔뜩 넣어 두고 멀리 숨어서 잠시 기다리면 원숭이들이 땅콩 냄새를 맡고 하나 둘 몰려옵니다. 주위를 살피다가 야자열매 구멍에 손을 쑥 집어넣고는 땅콩을 한 줌 콱 쥡니다. 그때 사람이 줄을 들고 나타나서는 원숭이를 잡는 것인데, 원숭이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펄쩍 뛰기만 할 뿐 도망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야자열매에서 손이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콩을 놓아 버리면 손을 뺄 수 있는데, 땅콩을 내려놓아야 자기가 산다는 것을 이 원숭이들은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려놓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원숭이들은 한 줌의 땅콩과 그들의 자유와 생명을 맞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감추인 보화」 비유에 보면 그 보화를 얻기 위해 재산을 다 팔았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내려놓는 삶입니다.

오직 물욕 하나에 매여 살아가던 삭개오. 그것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미움을 사고 살았던, 온갖 천대와 비웃음을 감당해 왔습니다. 이제 예수님 만나 재물욕에서 벗어난 삭개오의 빛나는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요. 예수 앞에 서서 자신의 결심을 당당히 말하는 그의 근사한 태도를 상상해 보십시요.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던 재물을 주님 앞에 내려 놓는 그 빛나는 얼굴을 보십시요.

VII. 내려 놓으면?

마지막 9절과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저주와 증오와 멸시의 대상에서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공동체를 해치며 살아온 그가 공동체의 중심의 자리로 성큼 들어섰습니다. 착취의 손이 봉사와 섬김의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냥 외롭기만 하던 그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동족,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내려놓음의 복입니다. 내려놓으면 이미 하나님이 해결하셨을 텐데. 진작 내려놓는 훈련을 했더라면 자유하는 신앙의 신비를 배웠을 텐데. 하나님 앞에 나를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획하신 그 놀라운 땅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내려놓음! 먹기 힘든 양식이지만 대단히 복된 양식입니다.
내려놓음! 그리스도인의 부요로움 - 자유하는 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맘에 나아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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