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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종적인 승리의 이유 (느 13: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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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포함해서 6주간 동안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삶의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승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은 예배당 안에서의 믿음만이 아니라 예배당을 벗어난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삶의 무대에서 실현되는 믿음입니다.
느헤미야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슬픈 소식을 듣지만 그 가운데 사명을 깨닫고 자신이 스스로 그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것을 마음에 다짐합니다. 갖은 고초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의 완성을 이룬 후에 하나님 앞에 모든 백성이 모여 영적인 부흥을 이루고, 사회개혁과 모든 제도를 다시 정비하며, 믿음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이루어가는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모습을 이루어야 하며, 특별히 믿음의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쫓기고 몰리는 성도들이 아니라 당당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 드립니다.

특별히 오늘은 <느헤미야서>를 살펴보는 마지막 주일로써 최종적인 승리의 이유에 대해서 종합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13장>에 나타난 내용들-주로 <13장>에 기록된 느헤미야의 개혁적인 4가지 사항을 살펴보면서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승리의 원인들을 종합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는 다섯번의 시간을 통해서 시간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믿음 안에서 주의 뜻을 이루며 승리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승리의 요건들을 이제까지 요약해보면 이러합니다.
사명감, 즉 슬픔 속에서도 비탄의 눈물만 흘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찾아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준비성과 분별력-사명수행을 위한 갖은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악한 무리의 계교에 넘어가지 않는 분별력이 바로 승리의 원인이었습니다.
집중력과 추진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짧은 52일간에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한 집중적인 능력, 또 각종 사단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중도에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추구해 나가는 추진력이 결국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의 요건임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지구력과 끝까지 실행하여 완성하는 완결함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가다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성벽의 완성을 이루고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새 역사의 수행을 이루는 것을 우리는 또한 봅니다. 성벽 완성이라는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출발의 시점으로 보아 민족을 규합하고 그것을 계기로 영적인 부흥을 이루며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영적부흥과 사회구조를 다시 든든히 세우는 계기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다함이 없는 수고의 끈을 놓지 않고 당기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기까지 아무런 저항이 없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믿음가운데 백성들과 더불어 마음을 합하여 국운의 상승과 민족의 대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와 같은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서 오늘 마지막 <느헤미야 13장>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3장의 본문 전체가 길어서 맨 마지막 몇 줄을 읽었습니다. 13장 전체의 내용은 4가지 사건이 기록됩니다.

<3절>까지 나오는 모압과 암몬자손을 이스라엘의회에서 분리해내는 과정입니다. 이 모압과 암몬자손은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지자 발람을 뇌물로 매수하여 이스라엘 사람을 저주하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바꾸어 오히려 발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성결성을 위해서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회에서 모압과 암몬자손들을 분리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전의 청결역사입니다. <14절>까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성전의 골방을 맡는 제사장직분의 엘리야십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가장 두 사람의 대표자가 있었는데,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야십이라는 사람이 그 도비야와 내통하여서 성전에 봉헌한 물건, 그리고 성전을 맡아 관리하는 레위사람들에게 줄 곡물, 이와 같은 것을 보관해야 될 방을 그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도비야에게 내줌으로 말미암아 도비야가 자기의 세간을 들이고 마음대로 성전에 있는 것들을 유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 느헤미야는 도비야의 모든 세간을 다 가져다가 내팽개치고 성전을 청결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생활할 것을 지급받지 못하여 견딜 수 없어 그 자리를 떠났던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들이고, 다시 그 곡간을 곡물로 채우고, 그것들을 잘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세워서 레위인들이 각자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다시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22절>까지는 이들이 흐려졌던 안식일 제도를 다시 회복하였고, 마지막 <31절>까지는 이방인과의 통혼의 문제를 바로 잡았던 것입니다.
이방인과의 통혼의 문제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중요하냐면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에서 누차 강조합니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방인들과 절대 결혼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방인들과 결혼하면 너희는 그들이 섬기는 신상을 섬기게 되고, 이방 신상을 섬기게 되면 너희는 나를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너희는 어쩔 수 없는 징계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니 너희가 이와 같은 전철의 방지를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과 가나안에 도착하여 안정하는 과정 속에서도 이방인들과 통혼한 결과,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와 같은 역사가 사사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기중의 하나인 바로 아합왕의 시대까지 이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합왕은 악한 왕비 이사벨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사벨이 섬기던 모든 이방 신상들을 섬기게 되고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배격하고 하나님 앞에 큰 어려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즉 이와 같은 과정들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의 결혼이라는 것은 단순한 남녀의 결혼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방 신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린다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신상을 섬기게 되는 이방인들과의 결혼의 문제를 느헤미야는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가운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영적사역의 승리의 이유들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과정 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보면 어떤 이유에서 바로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승리할 수 있었을까하는 것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일을 이루었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일을 이루는데 기준이 있었는데 사사로운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 개인감정으로 무엇을 처리하고 말하면 불평하고 불만 하는 것이 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개인감정을 가지고 어떤 일을 처리하면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그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해치게 됩니다. 그런 힘이 있거나 없거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어떤 일을 처리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고 나 자신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어떤 일을 진행해야 되는데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의 기준이며 최우선적인 사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악을 척결하려고 하는 단호한 의지를 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것을 보니까 죄악을 척결하려고 했던 것을 봅니다.

오늘 네 가지 사항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모두가 만만한 사항은 아니었던 것 입니다.
기존의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안착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 모든 것을 개혁하여 바꾼다는 것은 많은 저항이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하면 안 되는 것은 인간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많은 그릇된 일을 동시에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되 인간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어떤 경향을 띄게 될까요?

우리는 그 일에 잘못된 것은 수정하려는 애씀이 있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까지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많습니다.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은 교정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척결의 의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한 가지도 쉬운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옳은 일을 몰라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앎에도 불구하고 실행하기에 힘들고 어려움으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능력을 부여받아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열정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끊임없는 의지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권세를 줍니다. 나 자신의 능력과 힘을 가지고 우리는 모든 일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우리의 역량을 넘어설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여기서 누가 대표적으로 이름이 거론됩니까? 엘리야십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엘리야십은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사람으로서 도비야와 내통해서 성전의 한 부분을 도비야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가 왜곡되게 흐르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제사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엘리야의 손자의 아들중의 하나가 산발랏의 사위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처음부터 보셨지만 산발랏이라는 사람은 바로 이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가장 방해하는데 선봉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내통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엘리야십이라는 사람이 중앙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일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을 가지고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한 열정이 없다는 것은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연초에 이렇게 말씀드렸었죠? 자 한번 따라서 합시다.
“올해는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보며, 해보지 못한 일을 하며, 내 능력의 범위와 영역이 아닌 것을 내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지경을 넓히는 일을 합니다.”
올해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못해본 것을 합니다.
나는 한 번도 거기까지 가보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 일을 하고 거기까지 도착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내 영역과 내 범위가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것을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는 내 지경을 넓히는 일을 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은혜를 가지고 영역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우리는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이 최우선이 될 때 우리는 승리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는 목표와 원칙, 기준을 세우고 그것을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속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지속적인 역사를 위해서 예루살렘 성벽 수축하고 끝난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사회개혁을 이루며, 개인의 영적인 개혁을 이루며,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구조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압과 암몬 자손을 분리해내고, 성전을 척결하며, 안식일제도를 다시 정비하며, 이방인과의 통혼을 정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정확한 원칙과 기준이 설정되지 않으면 끝까지 추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삶에 분명한 원칙이 있을 때, 그 원칙을 준수해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조를 이룰 수 있습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바르게 세워져야 하며 바르게 세워진 원칙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수행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구조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기둥과 같다고 말씀드렸고, 그 기둥을 왕복할 때 우리에게 구조가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안타까운 주변 상황과 어려운 현실이 있을 것입니다. 격렬한 방해도 있을 것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잘못을 고치려면 어떠한 어려움과 스스로의 고통도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설정된 목표와 원칙과 기준을 정확히 실행했을 때 바로 느헤미야처럼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약속대로, 정한대로.
모든 사람은 약속대로 정한대로라는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매우 좋아하는데 약속대로 정한대로라는 것이 본인에게 적용될 때에는 상당히 격렬하게 거부하는 것을 봅니다. 약속대로 정한대로라는 것은 남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먼저 그 일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약속대로 정한대로 지키다보면 처음에는 불편하고 어려워도 시간이 지나보면 편안해지고 그것이 결국 나를 돕는 길이 되는 것을 봅니다. 원칙을 준수해 갈 때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같은 내용 노래 부르면 문화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볼 때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사람에 대하여 일관성에 대해서 언제든지 우리는 신뢰하게 됩니다. 저 사람이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습을 보니 일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면 앞으로도 어떻게 할 것이다 하는 것이 보이면 우리는 그 사람이 비록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믿습니다. 그런데 늘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작년이나, 하는 말이 늘 왔다 갔다 하고 일관성이 없으면 무슨 말을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을 신뢰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우리는 목표와 원칙과 기준들이 하나님 앞에 흐트러지지 않고 아주 어려운 지경을 맞아도 그것을 지켜갈 때 결국 신뢰를 얻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칙과 기준들은 날마다 보답적인 수구적 자세가 아니라 새롭게 진보하여 상향 진보적으로 정해져 발전해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시대 속에서 적응하며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정신은 동일하되 그 정신을 가지고 시대 속에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옛것을 퇴보적으로 수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합당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저는 선교활동을 해보면 하나님 앞에 너무나 놀라운 일들이 있는 것 같아요.
모세의 시대가 있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있고, 사무엘의 시대가 있고, 다윗의 시대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은 모세 한사람을 데리고 모든 일을 다 이루지 않았어요. 가나안 직전까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리고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사무엘을 준비하셨고,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의 왕국을 이루신 것을 봅니다. 각각 그 시대의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아름다운 것 같아요.
여러분 아무리 겨울옷이 비싸고, 좋고, 훌륭하고, 아름답고, 귀한 옷이라고 해도 여름 돼서 겨울옷은 입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름옷이 아무리 멋있어도 겨울 되면 그 여름옷 하나입고 다니지 못해요. 여름에는 여름옷이 필요하고 겨울에는 겨울옷이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시대에 맞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로 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모습대로 우리는 변화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대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소용대로 우리가 있어져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요청에 능숙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그렇게 변화되어 대처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일에 변화되어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그 일을 하는 겁니다.

모세는 자기의 시대가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정한 여호수아를 손들어 축복하고 모든 축복을 다 쏟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누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가슴 아픈 부분이 있습니다. 사울이 승전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다윗이 승리함으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블레셋 군사를 쳐부수고 마침내 승전할 때 사람들이 헌화하지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즉 이 말의 뜻은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명이라면 다윗이 죽인사람은 만 명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사울 왕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의 마음은 두 갈래였을 겁니다. 하나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정말 천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저 만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내게 붙여주셔서 저 신하로 말미암아 내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나 같은 작은 그릇에게 큰 그릇을 붙여 주셔서 나를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대로 잘 활용하여 나라의 부강을 이루겠습니다.” 했으면 사울은 그대로 자기의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했을 겁니다. 끝까지 자기의 시대를 잘 이루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울의 마음에는 그만 그런 마음이 들지 못하고 시기심만이 일어났어요.
“만약에 내가 천이고 다윗이 만이면 다윗이 얻은 것은 사람의 민심이요, 남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나를 죽이고 왕의 자리에 가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그 순간부터 그는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천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못 잡아요. 결과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다윗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역사의 비극이고 본인의 비극이며 또한 다윗에게도 비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상황을 은혜의 상황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활용할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에 있는 적은 꼬인 감정 하나를 이기지 못해서 결국 그것으로 나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역사도 망칠 것인가 하는 거죠.

저는 늘 생각하는데 사람마다 잘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 일 가지고 잘하면 되는 겁니다. 저는 제가 잘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잘 못하지만, 그중에서도 선교사는 잘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선교사님을 보면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한국에도 벌써 우리나라에서 파송한 선교사님이 만 삼천가정이나 됩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많은 일들도 있고, 상황과 사건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선교사님에 대해 이러저러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교비 받아서 거기서 잘 쓰고 지내기만 한다.’ 등등......
그러면 그렇게 해드릴 테니 거기 가서 지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여러분 그렇게 다 해드려도 거기서 지내는 것조차 어려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님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저는 선교사 사역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선교사 사역을 훈련시킬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각각의 일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원칙의 준수라는 것은 원칙을 우리를 위하여 사용하면 안 되고, 우리가 원칙가운데 내가 적용되어져 원칙을 통해서 모두를 세우고 하나님의 역사를 세우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 때문에 움직여서는 안 되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칙준수는 다른 사람에게 드려대는 잣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드려대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느헤미야가 여러 가지 승리의 요건이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여건은 오늘 <13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적인 강인함과 수고를 다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겸손함과 순수한 신앙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는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히 강인한 사람입니다. 산발랏이 그렇게 흔들어도, 도비야가 그렇게 비웃어도, 어떤 계략이 있어도 꿈쩍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입니다. 유혹하고 와라, 의논하자, 하는 암살계획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일에 부딪혀도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한 손에는 건축기계를 들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한 사람이고,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릴 때 그 마음을 모았던 사람이고, 어떤 계교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결국 그 일을 이루었던-옆에서 결코 흔들 수 없는 이런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유치할 정도로 순수합니다. 오늘도 그 짧은 성경 가운데 세 번이나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성전 청결을 이루고 <14절>에 ‘하나님 나를 기억하옵소서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행한 나의 선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해놓고 마치 애들이 하는 것처럼 ‘나 잘했죠? 나 잊지 마세요.’ 하는 겁니다.

안식일을 회복한 후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일도 기억하옵소서. 주의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뭔가 해 놓고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사람에게는 전혀 이런 뜻을 안보이던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는 이런 순수한 모습으로 내려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를 해결한 후에 <13절>에 뭐라고 얘기 하냐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정말 아이와 같이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잘 알겠지만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이 방해할 때 뭐라고 얘기하냐면 ‘저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저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저들을 멸망케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애가 어른에게 이르는 것 같아요.
이런 인간적인 수고를 다하고 견고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모습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는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비둘기처럼 순결하되 뱀처럼 지혜로우라.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를 믿으라.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리라.

우리는 이제까지 느헤미야서를 생각해 보면서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어요. 그만큼 강인한 의지 속에 이와 같은 말씀이 적용될 만큼 느헤미야는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을 보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상 받기 위하여 쫓아간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않았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애들 중에 이런 애들 있습니다. ‘나는 상도 싫어요. 그냥 편안하게 살겠습니다.’ 이런 애들 있는데 느헤미야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어요. 하나님 앞에 상 받고 싶어서 조급해 하는 아이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더할 나위 없이 강인한 하나님께는 영적인 든든한 거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순수한 상 받기 위해서 조급해 하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을 압니다.
성경에서 마르다는 열심히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음식을 만들고 있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음식도 안 만들고 그냥 놀고만 있는 것 같아서 뭐라고 한마디 하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마리아가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마르다가 나쁜 사람 같은데 마르다도 좋은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게 되면 그 오빠 나사로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 날 예수님이 늦게 와서 장례를 치른 이후인데 먼저 뛰어간 사람이 마르다였어요. 뭐라고 얘기합니까?
예수님이 좀 일찍 오셨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인데......
이것은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시면 죽은 사람도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마르다보고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마르다가 뭐라고 고백 하냐하면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먼저 뛰어나간 것도 마르다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나중에 나갔습니다. 마르다가 와서 예수님 오셨다 하니까 나중에 뛰어나간 사람이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또 다른 장면에서 누구를 칭찬하셨냐면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예수님을 잘 바라보고 소원하는 그 애틋함을 보시고 세상에는 우리가 열심히 주를 위해 수고하는 것도 필요하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의 은혜를 입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처럼 주님을 바라본다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실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희 집에 딸이 셋 있습니다.

요즘 세간에 들리는 얘기를 들으니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의 조건이 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행복해지기에 굉장히 근접해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유심히 관찰했는데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글쎄 딸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했는데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큰 아이는 나이가 좀 들어서 나은 것 같은데 두 명은 중학생 1학년, 3학년인데 사춘기에 있어서인지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시간이 좀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제가 교육을 잘 못 시켜서 그런가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저에게 문안을 해야 하는데 제가 애들에게 문안을 해야 됩니다. 아침이 되면 아이들이 학교에 갑니다. 새벽에 왔다가보면 아침부터 분주한 일들이 많아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못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아이들을 좀 보려고 급히 가는데 어떨 때는 만나기도 하지만 그러면 마치 왜왔냐는 듯이 전혀 개의치 않고 있어도 없어도 상관이 없다는 듯이 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섭섭하지만 그 마음을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못 만나면 아이들에게 전화를 합니다.
“학교에 잘 갔다 와라.”하고 전화를 하면 못 받을 때가 있잖아요. 전화 했으면 아빠 전화가 찍혔을 거 아닙니까? 그때는 전화가 온 줄 알잖아요. 그런데 전화를 안 합니다. 마음이 상심합니다. 그래서 제가 비법을 터득했는데 전화하면 애들은 다시 전화 안 합니다. 문자를 보내니까 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문자를 터득해서 보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날이니까 학교에 가서 재미있게 잘 지내고 모든 사람하고 기쁘게 지내고 돌아와라.’ 생각 같아서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쓰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썼다가는 어떤 얘기를 들을지 몰라서 차마 그 말은 안 쓰고 보냅니다. 다섯줄 쓸 수 있는데 가급적이면 다 채워서 보내잖아요.
그러면 답장이 옵니다. 뭐라고 오는지 아세요? “네”
딱 한 글자 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인색한지 모릅니다.
‘아빠, 나도 오늘 학교에서 재미있게 지낼 테니까 아빠도 믿음 안에서 주의 일 잘하세요.’하고 말하면 안 되는지 딱 한글자만 보냅니다.
하지만 그것도 황송한 겁니다. 답장 안하는 것보다는 좋습니다.
대부분은 제가 먼저 아이들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제가 대부분 지내면서 아이들이 저에게 문자를 먼저 보내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딱 분리해 보니까 딱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오늘 용돈 주시면 안 되나요?
두 번째는 핸드폰 요금 떨어졌는데 오천 원만 충전해 주세요.
세 번째 학원버스 놓쳤어요.

아이들이 먼저 연락하는 경우에는 결코 제게 좋은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제가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게 주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애들이 먼저 제게 문자라도 보내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제가 그것 안 지우고 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들이 나에게 뭔가를 보냈구나!’ 하고 봅니다
제가 그 생각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 해 드리는 것 없잖아요. 그런데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기도 길게도 못하고 ‘네’ 하는 것처럼 몇 마디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마음에 두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애들이 핸드폰 요금 충전해달라는 것 볼 때 제가 큰 은혜를 받습니다. 요즘은 정액제라서 끊어지면 전화가 안 걸리나봅니다. 그러면 애들은 꼭 오천 원만 해달라는 겁니다. 거의 월말에 끝날 때 가서 하니까 그것도 많이 넣으면 구박받아요. 왜냐하면 오천 원만 해도 충분한데 쓸데없이 많이 넣었다고 그러면 참 민망해요. 그렇다고 제가 오천 원 충전해주려고 회사에 전화해서 나 부모인데 주민등록번호 확인하고 해서 오천 원 충전시켜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를 충전시켜 줄 것 같아요. 오천 원만 충전시켜줄 것 같아요?
제가 이만 원쯤 충전시켜 줘요. 그리고 애한테는 ‘오천 원 충전해 놨어.’ 하고 보냅니다. 왜냐하면 더 많이 했다고 하면 저는 또 구박받으니까요.
또 한 가지는 오천 원 충전해서 다 쓰고 나면 또 어려울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이만 원 충전 합니다. 애는 며칠 안 남았는데 오천 원 충전해놓으면 다 써야 한다고 신나게 전화합니다. 여러분 이유를 아시겠죠?
그 애는 오천 원만 충전해 놓아도 충분하니까.
제가 그럴 때마다 은혜를 많이 받아요.

우리가 정말 신나게 사는 건 우리가 하나님께 조그맣게 기도해도 하나님은 많이 응답해주셔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 모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만 기도하면 하나만 들어주시는 줄 아는데 하나님은 벌써 여러 가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생각해서 더 넘치게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것을 보면서 아이가 부모에게 무엇을 요청해도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 것 보다는 요청하는 것이 나은 것 같아요.
‘쟤가 나를 그래도 아빠라고 인정해서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요청해 주는구나. 언젠가 기다리다 좀 커지면 필요할 때만 요청하지 않고 이제는 아빠의 필요를 알아서 잘 해주겠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의 모습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저 순수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있으면 되겠지.
내가 잘 자라주면 되겠지.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순수함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승리의 요건인 것 같아요.
우리가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의지가 굳으면 얼마나 의지가 굳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이러 저러한 모든 승리의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주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기대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가 이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느헤미야서를 6주 동안 살펴보았는데 이런 문장 마음에 새기시고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꼭 승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웬만큼 잘 하면 여러분이 칭찬받습니다. 그런데 워낙 탁월하게 잘하면 ‘이건 사람이 할 수 없어, 하나님이 도우셨어.’ 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꼭 탁월한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는 법을 배우지 말고 승리하는 법을 배우자.
불행해지는 법을 배우지 말고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자.
슬퍼지는 법을 배우지 말고 기뻐지는 법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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