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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 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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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가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가시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

그 사람의 아들은 지금 귀신이 들려 있었다. 그 귀신은 그 아들을 벙어리 되게 하고, 귀먹게 하였으며,(17, 25) 더럽게 하고,(25) 많은 고통을 주었으며,(18, 20,) 죽이려고 하였다.(22) 이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귀신은 고통을 주었다.(21)

귀신이 인간을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이렇게 온갖 불행과 고통, 저주만 가져다주는 악하고, 더러운 존재이다.

그래도 그 아들이 죽지 않은 것은 생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귀는 인간에게 고통을 줄 수는 있으나, 생사의 권한은 없다.
욥2:6=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이 사람은 귀신들린 자기 아들 때문에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가정의 행복은 사라졌고, 아들의 병을 치료하려고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이제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고, 제자들은 그의 아들을 고치기에 역부족이었다.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더불어 논쟁만 하고 있었다. 14절의 변론은 논쟁이라는 의미이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벙어리 귀신들린 소년의 치유에 실패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격하고, 제자들은 이를 해명하느라고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주님은 산 위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그의 도움이 필요한 제자들에게로 내려오셨다.
제자들이 가장 어려운 시련에 처해 있을 때, 그 시련의 현장으로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가 곤경에 처해져 있을 때도 우리를 찾아와 주신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곤경에 처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다.

주님이 때로 우리를 놔두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주님이 내 옆에 안계시고, 나의 어려움을 돌봐주시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때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가장 결정적일 때 내게 찾아 오시는 것이다.
기독교는 산위의 종교만이 아니라, 산 아래의 종교이기도 하다.

논쟁으로 궁지에 몰려 있는 제자들에게로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사람들은 놀랐다.
주님이 오시자 혼란과 갈등이 그치고, 제자들의 고독과, 서기관들의 공격도 멈추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갈등과 충돌은 예수님이 오시면 멈추는 것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쫒아 달라고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은 이미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받았었다.(막6:7) 또 실제로 그런 능력을 사용하여 많은 귀신을 쫒아내기도 했다.(막6:13) 그러나 지금은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의 말을 들으시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보실 때 언제나 탄식하셨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만나실 때는 크게 기뻐하셨다.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믿음이요, 주님의 슬픔은 우리의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려왔을 때, 갑자기 발작이 더 심해졌다.(20)
마귀는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방해한다.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 만일,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라고 말하였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을 반신반의하는 말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긍정 반, 부정 반이다.

이 말은 예의가 바르고 겸손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겸손 속에는 불신앙이 숨어 있다.
“제자들이 못하는 것을 보니 예수님도 혹시 못하실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는 예수님에 대해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친다더라.” 는 소문정도로만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와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 말은 예수님은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할 수 없는 일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한 말이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소문으로 아는 정도의 소극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이상으로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체험해야 한다.

이 아버지에게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17-18=“...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쫒아 달라고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그는 예수님을 제자들과 똑 같은 인간으로 본 것이다. 그는 지금 “선생”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다. 오늘날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처럼 예수님을 “선생”으로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자기 아들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찾아온 것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소극적인 행위이다.

이런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반쪽 믿음이다. 반쪽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못하는 것은 주님도 못하신다면, 그런 무능한 주님을 믿어 무엇 하겠는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에 “만일” 이라는 가정(假定)의 개념(槪念)은 없는 것이다. 신앙의 세계에 가부(可否)의 중간지대는 없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중간지대는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믿는 자에게” 즉 “의심하지 않는 자”이다.

이 말씀이 물론 믿는 자는 무조건 무제한적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를 전제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인간사의 모든 가능과 불가능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결정되어진다는 말씀이다. 믿음만큼 된다는 말이다.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고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했다.

이어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말했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 말 앞에 “주여”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즉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제야 예수님을 단순한 선생이 아닌 주님으로 믿어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단순한 선생인가? 아니면 주님인가?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믿음이 아직 성숙되지 못한 불완전한 믿음이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뜻이다.

여기의 특별히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이 부르짖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제목이다.
오늘 우리 자신들도 때로는 신앙인 같지만, 또 때로는 불신앙의 모습으로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 때가 많이 있다.

믿음이란 어려운 어떤 철학적인 용어로 설명하기보다 내가 실제로 체험해 보지 않은 믿음은 무의미 한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고 많은 설교를 들어왔고, 또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기도해서 응답해 보는 체험이 없을 때, 그것은 지식이요, 생명이 없는 이론이요, 교리요, 신학일 뿐이다.

지식, 신학, 교리를 가지고서는 구원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한다.

지금은 신앙부재의 시대이다. 오늘 본문 19에 예수님은 이 시대를 가리켜서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신앙은 능력이요, 역사하는 힘이 있지만, 불신앙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다.
엘리야가 믿음이 올라갈 때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과 홀로 싸워서 승리를 하였으나, 믿음이 약해질 때는 이세벨이라는 한 여인이 무서워 광야로 도망을 가서 로뎀 나무 그늘아래 앉아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라고 죽기를 하나님께 구하였다.(왕상19:4)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믿음은 이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자본이다.
고후5:7의 말씀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눈에 보는 것으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어야하고, 이치에 맞지 않은 듯해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만나주시고, 함께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다.

하나님은 믿음을 구원의 채널로 택하였다. 찬송도 믿음으로, 기도도 믿음으로, 말씀 듣는 것도 믿음으로 들어야 하고, 봉사도 믿음으로 해야 한다.
롬14:23에 “믿음으로 쫒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라고 하였다.

꽃이 있는 곳에는 씨가 먼저 그곳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강이 있다면 그 상류에 반드시 원천이 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음에 틀림없다.

믿음이란 삶의 원칙이다. 우리는 믿음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뢰이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믿음은 모든 행동과 인간사회의 기본조건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알 수 없다고 다 불신해 보라.
사회의 모든 구조는 허물어지고, 우리는 도무지 살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지식으로만 알 수 있는 것도 있고, 신앙으로만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물체는 눈으로 보아 알 수 있지만, 철학은 눈으로 알 수 없고, 이성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으로만 알 수 있다. 과학이 그친 곳에, 철학이 멈춘 곳에, 신앙은 시작 되는 것이다.
히11: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다.

즉 “믿음으로 안다”는 말이다. 신앙은 사물의 기원을 밝힐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목적과 의미를 밝힌다. 신앙은 이성의 모순이 아니라, 이성의 왕관이요, 보충이다.
신앙은 강한 힘이다. 신앙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열심 있게 하고, 영웅적이게 한다. 위대한 일치고 신앙 없이 되어 진 것은 하나도 없다.

신앙은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유일한 통로가 신앙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부터 가장 바라시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믿고 구원 얻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은 없다.

불신앙은 참으로 원통한 일이요, 고통이요, 불행이며, 저주이다.

우리에게는 큰 믿음이 필요하다. 작은 강을 건너려면 작은 보트만 있어도 된다. 그러나 파도가 요동치는 큰 바다를 건너가려면 큰 배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넓은 바다와 같다. 잔잔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큰 풍랑이 일어난다. 평안할 때도 있으나, 때로는 환란과 질고와 실패와 슬픔과 죽음도 있다.
풍랑 높은 이 세상의 바다를 건너 저 천국을 향해 가려니 큰 믿음이 필요하다.

인생의 파도가 높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에게는 더 큰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이 세대 자체가 우리에게 큰 믿음을 요구한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믿음이 있으면 큰일을 할 것이고, 믿음이 작으면 작은 일 밖에는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만큼 일하신다.

결론

믿음이 부족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부족한 믿음을 위해 가슴아파하며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험악한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자본이다.
“내가 믿나이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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