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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본보기 (고전 10:1-13, 눅 1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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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새 우리 가족은 독일에 가 있는 아들과 연락할? 때 인터넷 화상을 통해서 합니다. 얼마 전에 서로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반가운 소식이 있다고 해서 뭐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세계적인 학술지인 "Biblica"라는 책에 게재된다는 통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논문 한편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학술지에 게재된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실적이 되며, 본인은 물론 앞으로 한국 구약학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굉장한 초석을 놓는 일이 되기 때문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아들 이야기를 하려는 내용은 사실은 이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한 말이 기특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있던 시각과 자세가 매우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였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동안 자신이 출석하여 섬기는 교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모든 일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나 교회의 처사가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봉사는 하면서도 이런 비뚤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사뭇 유쾌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부분의 잘못을 비로소 깨닫고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이기도 하고, 목사로서 목회의 선배이기도 한 나에게 고해성사하듯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들의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매우 흐뭇했습니다. 이제 철이 든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학위논문이 끝날 즈음되니까 상당히 인격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성숙되어간다고 여겨졌습니다. 대개 학문하는 사람들은 그 학문적인 교만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이 남보다 다소 우월한 조건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교회와 다른 사람을 섬기려하기 보다 교만하게 되고 다른 이들을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가 가진 것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그런데 왜 받지 않은 사람처럼 자랑하느냐?”고 우리를 책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그의 친구로 삼으시려고 사람이 되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자신을 낮추셨는데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랑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하실 때 주님은 나와 동류가 되셨고, 나의 모든 것을 자신으로 것으로 책임지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에 대하여 “내 책임입니다”라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흔히 쉽게 정부나 대통령을 비판하고, 시국에 대하여 마치 굉장한 애국자인양 열을 올리지만 따지면 나만 그것에서 예외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 나를 포한한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또 우리가 교회에서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하여 생각 없이 마구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든 일들에서 나만 예외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우리 모습은 화살을 남에게 돌리므로 내 책임을 면하고 자신만이 의인이 되려고 하는 원죄의 발동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하와가 뱀에게 그 책임을 몽땅 전가하려 했지만 사실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내 탓이요!”라고 자신의 책임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고 했습니다.

2.  오늘 복음서 본문이 포함되어있는 눅13:1-5에 보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사용한 것,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광주사태같은 유혈사태를 야기해서 무고한 피를 흘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그때 숱하게 피 흘린 광주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죄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죄인이어서 당했고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피를 흘리지 않고 살아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예루살렘 사람 18명이 압사 당했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천벌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쓰나미 태풍으로 엄청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당한 것을 보고 단순하게 죄 값이라고 설교했다가 얼마나 호된 비난을 받았습니까? 그들은 죄가 많아서 천벌을 받았고 나는 죄가 없어서 재난당하지 않고 건재하단 말입니까? 

    우리들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예컨대 이웃 중에 어떤 개인이나 가정이 엄청난 어려움을 당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우선 우리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하는 짓을 봐서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도대체 무슨 죄가 많아서 저토록 큰 어려움을 당하는가?” 또 이렇게 궁금해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와서 “네가 당하는 고난을 보니 네가 숨겨둔 죄가 있구나. 그러니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혹한 고문입니까? 그래서 욥은 “내가 오늘도 감당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개그맨들이 쓰는 말 가운데 “너나 잘 하시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왜 하나님께서 벼락을 내리시면서 아무 죄도 없는 고목나무를 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시다가 학생들이 떠들면 어떻게 합니까? 교탁을 탁, 탁 치면서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죄 없는 교탁을 칩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너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망대에 치어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을 개그로 표현하면 “너나 잘 하세요”가 됩니다. 他山之石이란 말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을 보고 자신을 살펴야지 자기는 마치 아무 책임도 죄도 없는 양 비판이나 하고 비난이나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내 탓입니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간절하게 우리에게서 이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훌륭한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이나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열매가 맺히지 않게 되자 주인은 “찍어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기대를 저버렸을 때 얼마나 가혹한 심판이 임하는가를 발해줍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는 주인에게 간청합니다. “금년만 참으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를 맺으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포도원 지기가 “금년만 참으소서”라고 간청해서 겨우 집행유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가 마치 자신은 의인인척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러우며 자신으로서는 얼마나 위선적이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얼마나 부당한 자세입니까? 

오늘 우리는 교회가 옛날부터 늘 해오던 기도 즉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기도를 드리는 자세로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주님의 은혜요, 내가 구원받은 것이 주님의 자비이듯이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데도 주님이 믿음과 지혜를 주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서신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고사를 제시하시면서 우리의 본보기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바꾸면 他山之石을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7절에 우상숭배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서 금식기도하고 있는 동안 산 아래서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하면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어 논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능력으로 자신들을 애굽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너무 일찍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일찍 떠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가르치기 위해서 계명을 주시려고 하시는데 이미 그 백성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더 이상 계명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니 모세는 그 돌 판을 던져서 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을 본보기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삶에서 과연 하나님이 첫 번째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 8절에 간음죄를 거론합니다.

      발람 선지자의 계략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제사에 초대받아가서 이방여인들과의 음행에 놀아나게 되었습니다. 시편 1편의 말씀대로 “악인의 꾀를 따르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다”가 온 이스라엘에 엄청난 고통이 임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23,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그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충격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은 지금도 우리 앞에서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때로는 광명한 천사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새 출발하여 나아가는 우리 진로에 엄청난 장애물을 놓습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될 말, 해서는 안 될 처신을 하게 되면 그로 인하여 우리 공동체가 시험을 받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나보다 먼저 이웃을 배려하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먼저 교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우리 모두 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항상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항상 승리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3) 9절에 “주를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불신앙을 노출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정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신 역사를 인정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것이 우리 신앙과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4) 10절에 “원망”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애굽에서 배불리 먹다 죽는 것이 이 광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작당을 해서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광야 40년이 선고되었습니다. 작당하여 반란한 그들에게 가나안 약속의 땅 입국이 거부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섬기며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오늘 우리들이 바로 저들의 모습을 본보기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불순종하는 것이요, 그 백성을 괴롭히거나 교회 공동체의 진로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백성을 위하여, 이 땅에서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비판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함께 참여하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영광 돌리는 지체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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