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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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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사람 예수의 말은 언제나 새롭고 뭇 사람들의 가치관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람의 뜻을 따라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 2위 되시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그 시대의 탁월한 교사요 미래에 대한 세상 역사의 투시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갖 규범들이 난무하여 사람들이 법질서의 혼재 속에 고통당하고 있을 때 병들어 버린 규범들을 과감히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롭고 건강한 새 생명의 질서와 바른 도덕규범을 가져온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는 당시의 사회 규범이나 사람들의 전통적인 의식구조에 대해 개혁의 차원을 넘어서 차라리 혁명의 선구자로 등장했습니다.
갈릴리 바다 해변을 거니시던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폭탄적인 선언적 명령이었습니다.

Ⅰ. 삶의 새 패러다임(paradigm)을 요구 하는 말입니다.

본문 4장 18절에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20절에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21절에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깁다'의 카타르티죠( )는 고친다는 뜻입니다. 고기 잡는 일을 다시 준비하려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름을 듣고 이들은 즉시 자신들의 배와 깁는 그물을 버려두고 부친을 떠나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고기를 잡다가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고기를 잡기 위하여 그물을 깁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시고 불렀습니다.
고기잡이는 이들의 직업이자 한결 같은 생활의 수단이었습니다. 고기잡이는 이들의 생존세계의 본업이며 이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전통입니다.
이러한 삶의 혁명은

1) 자기 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좇을 것이니라'는 아콜로데이트( )는 현재 시제로서 '멈추지 말고 계속하여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자기 포기의 마음은

(1) 자기 생각을 상대화시킴입니다.
열왕기하 5장 11절에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나아만이 아직도 자기 절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열왕기하 5장 14절에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내 생각은 언제나 잘 못 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절대화 하는 것이 이미 병든 자의 생각입니다.

상대화란 말의 의미는 절대화란 말과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론에 대하여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입장에 따라서 비판하는 자세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것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나 대상에 대해 비판 가능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고집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은 항상 교정 받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2) 자기 자신을 내어버림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예 자기 생각을 무시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는 비참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적인 유익이나 자신의 쾌락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에서 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는 즉시 집어 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화육강세부터 시작되어 많은 고난 끝에 마침내 갈보리 산상에 실제로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데까지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은 자기의 사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순종하는 명분 있는 유일한 사명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보은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그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고난을 요구하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몸된 교회와의 연합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Ⅱ.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이 세상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 새로운 계명의 세계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가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시는 것과 다시 사시는 것이 자신의 순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성자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을 입장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순종하신 것뿐입니다.

여기에서 계명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십자가의 사명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의한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죽으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기 위해서 죽으실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고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빌라도의 사형 선고가 그의 죽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앞당기거나 늦출 수 조차도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이는데 동참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 나지 아니했음이 좋을 뻔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명 완수의 새 계명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감각적인 자유가 아니라 영원히 누릴 궁극적인 자유라는 데서 그 유일한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2) 새 광명의 세계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그 시간부터 이 세상의 온갖 것들로 가리워진 어두움의 종식이 보장됩니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얻어지는 가시적인 광명이 아니라 궁극적인 본래적이고 근원적인 광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우리들의 영혼의 지성소에서 얻어지는 밝음입니다. 이 광명을 입은 사람들은 다시 어두움을 가까이 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이 새 광명이 어두움을 능히 삼켜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은

Ⅲ. 새로운 사명을 명령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4장 19절에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9절에는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 10절에는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는 데로 잡아옵니다. 그러나 사람 낚는 어부는 죽은 사람을 영생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기 잡는 어부와 사람 낚는 신령한 어부의 차이입니다. 복음전파의 과제는 입으로 전하여 듣게 하고 행동으로 그 축복의 증거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고기를 그물로 잡듯이 말씀과 성령이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합니다. 진리의 복음을 듣고 예수께 오면 실제로 죽여주시고 살려주시는 이가 따로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최고의 영예로운 사명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을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데리고 오는 사명입니다.
중생 받은 성도는 오늘의 교회운동의 가치와 받을 영광을 깨닫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대 시대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했던 역사적 인물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북미주 밴쿠버만 앞에 있는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이름난 빅토리아 섬에 소재한 영연방 박물관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역사적인 인물들이 거의 만족스러울 만큼 실물에 가깝게 밀랍(蜜蠟)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많은 인물상들 중에 나폴레옹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란 국방색 군복에 작달막한 키하며 딱 벌어진 어깨와 부리부리한 눈과 허리춤에 길게 찬 칼은 용장의 이미지를 한층 더해 주고 있었습니다. 생동감이 이를 데 없었고 금방이라도 유리관 속에서 뛰쳐나와 나를 따르라고 말할 것 같았습니다.
그의 위용(威容)은 그가 대관식 때 썼던 지금 프랑스 파리 루우블 박물관에 소장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왕관과 1년 12개월의 승리를 상징하는 파리의 12갈래 길 중간에 세워진 개선문이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격전지에서 수많은 부하들을 따르게 했지만 한 시대가 지난 오늘날 그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전쟁의 공포와 비참함 앞에 소름끼치며 전설처럼 사라지는 악몽 속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처럼 금 면류관이 아닌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양발과 양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자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군왕도 주지 못했던 만족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종교의 특색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하늘 보좌를 포기하시고 하나님의 부름에 자발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교회 운동의 깊숙한 곳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온갖 좋은 것으로 준비해 놓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를 따라 복음의 영예로운 행군 대열에서 피곤을 모르고 거침없이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 '인간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할 때

첫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73편 24-28절에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일은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2-24절에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교회를 통한 복음 전파의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받은 결과 그를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회운동은 인간의 본분이자 우리의 존재의의요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37-39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전도자 바울을 도울 때 로마서 16장 4절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교회운동을 위하여 하나님은 이 시간도 우리의 붉은 심장을 뛰게 하시고 맑고 푸르른 호흡을 계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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