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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활노래 (삼하 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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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이웃의 블레셋은 가깝게 사는 것이 매우 불행한 관계였습니다. 영원한 원수로 지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두 나라의 전쟁 기록이 끊이지 않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삼손 장군의 전쟁 기록도 블레셋과의 역사이며 역대 사사들과 임금들은 블레셋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책임이 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를 해서 춤과 노래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기록도 있고 때로는 블레셋이 승리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법궤를 빼앗긴 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블레셋으로부터 가장 큰 위협을 받았던 역사가 사울 통치 말기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사울 왕이 늙어 통치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나라 형편은 쇠퇴하여 갔습니다. 블레셋은 그와 반대로 골리앗이라고 하는 유명한 군 통수권자가 등장하는 바람에 막강한 군대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꼼짝 없이 나라를 빼앗기고 사울왕은 무참하게 사형당해 죽을 것이 뻔하게 내다보였습니다. 블레셋을 섬기며 살아야 되는 국가적 위기가 다가왔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소년 다윗이 전쟁에 출전함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사울 왕과 이스라엘 민족은 극적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국민 여론은 이제 늙어서 국가 통치 능력이 없어진 사울왕은 폐하고 다윗과 같은 젊은이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기대가 아주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왕은 다윗 때문에 자신과 국가가 위기에서 살아난 사실은 잊어버리고 다윗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너무 커지니까 시기가 나서 심한 갈등 속에 질투심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다윗 죽이기에 나섭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에게 악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사람의 영이 성령과 교통이 끊어질 때는 악령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때부터 사탄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울이 그렇게 되었다고 성경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000명의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다윗 죽이기에 나섰고, 심지어는 자기 손으로 다윗을 죽여야 되겠다고 칼을 차고서 사막을 헤매는 기간이 무려 13년이나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누구의 도움으로 살아났느냐 하면 사울왕의 아들이요 사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도록 정해져있는 요나단 왕자 때문에 살아나게 됩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아버지 두 사람을 객관성 있게 살펴보았을 때 아버지가 옳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윗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국민적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 자기 마음을 비우고 다윗을 보호하는데 자기 생명을 바치게 됩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아주 신앙심이 깊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나라의 왕을 자기 손으로 해치우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 신앙 하나를 지키면서 쫓겨 다니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가시면 아둘람 동굴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동굴에서 다윗 지키기에 나선 동료들의 도움으로 거지같이 얻어다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13년 동안 숨어서 살게 됩니다. 최고의 통치자가 나라는 돌보지 않고 마귀의 종이 되어 미친 사람같이 산과 들을 다윗을 찾아 나서니까 가뜩이나 기울어진 나라꼴이 말도 안 되게 아주 형편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나라 형편이 되자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이 때는 이때다 하고 침략하니 하루아침에 참패의 역사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말씀 전 장 사무엘상 31장에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사울의 아들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도 죽으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그날에 함께 죽었더라.” 이렇게 됨으로써 사울 왕은 끝이 나고 이스라엘은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쯤 되었을 때 13년 망명의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다윗은 반대로 살아났습니다. 사울의 전사 소식은 어떤 면에서 다윗에게 가장 반가운 복음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고 임금님으로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도 있습니다. 몰래 야경을 틈타 밥을 얻어먹으면서 산속에 몸을 숨기던 거지가 임금님으로 변하는 그의 인생 최고의 희망적 상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그 기쁨의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소식을 전해주는 병사에게 다윗이 물었습니다. “네가 사울 왕이 죽은 것을 목격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사울 왕이 어떻게 죽었느냐?” “네, 활을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었고 더 이상은 살 수 없음을 알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를 보고 빨리 죽여 달라고 애원함으로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소원대로 빨리 죽였나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머리의 면류관과 팔에 있는 임금의 고리를 벗겨서 여기 가져왔나이다. 받으소서.” 이렇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사실 이 병사는 가만히 생각하면 속셈이 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사울왕가를 처치하고 인정을 받아서 다윗이 왕위에 오를 때 뭔가 상급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렇게 나옵니다. “울며 금식 하니라.” 그 소식에 너무나도 화가 나서 소식을 가져온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니,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하나님의 임금님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다면 네가 빨리 그를 치료하든가 아니면 엎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든가 해야 옳은 일이지 죽여 달랜다고 네가 칼을 들어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왕의 몸에 칼을 대서 빨리 죽였단 말이냐? 이놈을 끌어다가 사형시켜라!” 그래서 그 병사를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슬픈 노래로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며 한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 가르치라 한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원수가 죽었는데 슬픈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며 조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활에 맞아 죽었다고 해서 이 시의 제목을 “활 노래”라고 붙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큰 인물이 죽었을 때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업적과 인품을 찬양하는 글을 써서 만기를 만들어 장례식 때 상여 앞뒤에 들고 갑니다. 지금 다윗이 그런 글을 쓴 것입니다. “아! 슬프다. 그대의 떠남이 내 인생의 종말과 같도다.” 그렇게 써서 들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대도 어느 때는 떠날 것이라 알고 있던 일이건만 어찌 이토록 이 일이 슬프단 말인가?” 한문으로 한시를 써서 들고 가는 사람도 있고 “오늘 아침 천지가 변하였으니 그대가 없음이로다.” 이런 글도 있고 “님이 없는 세상이 내게 무슨 의미란 말이요?” 이런 글도 써가지고 갑니다. 교회의 유망한 젊은 집사님이 별안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제가 장례식에서 조시 하나를 읽었더니 그 시를 붓글씨로 액자를 만들어 영원히 보관하겠다고 하시며 걸어놓으신 걸 봤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관계가 좋았던 사람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원수가 죽었는데 그렇게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다윗은 활 노래를 어떤 마음에서 불렀는가? 자기와의 관계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부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다윗은 사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울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비록 그와 나는 원수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를 택하여 기름 부음을 주셔서 나라의 초대 왕으로 재직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이 세운 자가 길바닥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다니? 이는 이스라엘에서 영광이 떠나간 것이다. 이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여기 성경에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하나님이 선택해서 기름 부어서 이 민족의 대표자로 삼으신 그가 무참하게 이렇게 적군에게 칼을 맞고 쓰러지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지금 다윗은 13년간 자기를 죽이려고 그렇게 발광하던 사람이 죽었다는데 자기와의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과 관계에서 볼 수 있는 영적 관찰이 있기 때문에 “아! 슬프다. 나와는 비록 원수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자가 원수들에게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다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떠나갔도다.”

성경에 보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라. 목말라 하거든 마시우게 하라. 원수의 망함을 기뻐하지 말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게 맡기라.”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소문내지 마라. 이게 무슨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지 마라!” 다윗이 자기만을 생각했다면 빨리 소문내야 합니다. “사울은 죽었다! 미치광이처럼 굴다가 벌 받아서 블레셋에게 활 맞아 죽었다! 역사는 이제 다윗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권위도 속히 회복되고 임금 되는 길도 빨리 진행되고 권세와 부귀와 영화가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죽었다고 소문내지 마라! 아스글론에 말하지 말며 가드에도 고하지 마라. 이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말하지 마라!” 성경은 원수가 쓰러질 때 못 본체 말고 손을 내밀어 붙들라고 합니다. 원수의 망함을 일삼아 선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 쓰러뜨리기 작전에 열심인 사람이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도 쓰러뜨려 보려고 합니다. 나중에 보십시오. 결과가 어떻게 나는지…. 다윗은 사울을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요압 장군이 답답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소서. 내가 사울 왕들을 다 진멸해 버리고 당신을 이 나라 보위에 오르도록 하겠습니다. 왜 말씀하지 아니하십니까? 온 국민의 기대가 그렇습니다.” 요압 장군이 다윗에게 항상 그렇게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나님이 이 많은 백성 가운데 우리 민족의 초대 임금으로 기름 부어 세운 왕이 사울 왕인데 그가 지금 정신없이 군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해서야 되겠느냐?”

우리 삶의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지자(無知者)는 지자(知者)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지식이 있는 사람이 지식이 없는 사람을 지배하고 사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무식하면 종노릇한다.” 그러니까 지자(知者)가 되기 위해서, 무식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서 학문을 연구하고 앞서가려는 것입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지자(知者)보다 능한 자는 용맹자(勇猛者)”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용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 앞에 굴복을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용맹자가 더 능력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용맹자(勇猛者)는 덕인(德人) 앞에 굴복을 당한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용기가 있어 펄펄 뛰어도 덕으로 다스리는 사람 앞에서는 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지식에 덕을 쌓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수양을 많이 해서 덕을 쌓은 사람도 당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복인(福人)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복을 준 자는 누구도 못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약속되어져 있음으로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네 가지가 모두 있는 사람입니다. 시인이요 음악인이요 문인이면서 전쟁에 능한 용기 있는 용맹자요 말과 행위에 덕이 있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 받지 못한 저 블레셋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사울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이 걱정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 소식을 들으면 블레셋 사람들이 노래할 것이다. 춤추는 여인들이 기뻐서 춤출 것이다. 여호와 신이 우리 신 다곤에게 멸망을 당했도다. 여호와의 기름 부은 종 사울이 다곤의 종에게 활 맞아 죽었도다. 다곤이여! 우리 신이여! 오늘은 다곤의 승리의 날이요 여호와 신의 죽음의 날이로다 할 것이 아니냐? 말하지 말라! 슬프다.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다. 너는 어째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이 피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죽여 달라고 말한다고 칼을 들어 그의 심장을 찔렀느냐? 네가 들쳐 엎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피를 닦아주고 간호를 했어야지! 네 속셈은 무엇이냐? 출세하려고 그랬느냐? 이 소식을 나에게 먼저 가져오면 내가 기뻐서 너를 칭찬해줄 줄 알고 이 소식을 가져왔느냐? 이 놈을 죽여라!” 그리고 슬퍼 견딜 수 없어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야만의 족속들에게 당하는 여호와에 대한 모독이 너무 슬퍼서 밥도 먹지 않고 금식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21절에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야! 그 놈의 영감 잘 죽었다. 내가 그 놈의 영감 때문에 13년간 죽을 뻔 했네! 이제는 세상이 내 세상이야!” 이렇게 생각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 슬프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냐?”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며 울지어다. 저가 그래도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그의 통치기간에 너희가 그의 은혜를 입은 것이 많은데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기억한다면 슬퍼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 은혜를 노래 부름이 당연하도다. 이스라엘이여! 슬퍼 노래하라. 친구 요나단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여인의 상함보다 승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라이벌입니다. 국민의 기대는 다윗이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정치 능력은 요나단 왕자가 왕이 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만나서 “네가 왕이 되고 나는 그 다음이로다.” 오늘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 형 요나단이여! 형이 왕위에 오르는 게 순서 아닙니까?” 늘 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라이벌에 있던 사람들과 관계가 참 묘합니다.

세계적인 테너 가수로 유명한 이태리의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가 LA에 와서 공연할 때는 표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부시 대통령도 그날 밤에 표를 사가지고 객석에 앉아서 그 공연을 봤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TV로 방영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TV로 봤는데 세계적인 테너 가수 세 사람이 노래를 하는데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간에는 “내가 더 잘하느냐 네가 더 잘하느냐”라는 라이벌 의식이 굉장히 심합니다. 파바로티가 더 잘하느냐 호세 카레라스가 더 잘하느냐? 한번은 호세 카레라스가 병이 들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파바로티가 문병을 가서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호세여! 네가 죽으면 내 인생도 의미가 없다. 내가 오늘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게 된 것은 너 때문이다. 너를 이겨 보려고 하는 열정이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서게 하였다. 나를 이만큼 키운 것은 너다. 그런데 네가 죽으면 내 노래와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살아라! 제발 다시 일어나서 나보다 우수한 노래를 불러라! 그래야 나도 산다.” 회복되었습니다. “그러자. 우리 다시 노래를 부르자. 나는 너보다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겠다. 너도 나를 능가하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라.” “그러자.” 로스앤젤레스의 밤공기를 진동시키며 노래를 불렀을 때 미국 전체는 그날 밤에 잠을 안자고 그 노래를 들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요나단을 그렇게 생각하며 슬퍼하는 겁니다. “네가 없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네가 나에게 주는 왕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아! 슬프다. 어찌 네가 죽었느냐? 사울 왕이여! 비록 나와는 원수가 되었지만 당신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이 나라의 초대 왕으로 세우신 자가 아니요? 그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자가 길바닥에 원수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피흘려죽다니! 이스라엘의 영광은 떠났도다.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노래하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다윗만큼 많이 받은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을까? 그런데 그럴만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주변에 가장 가깝게 관계했던 몇 사람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다윗의 신앙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울과의 관계! 여호와의 기름 부은 종으로 마지막까지 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칭찬받는 이유입니다. 요나단 왕자와의 관계! 생명을 주고받아도 괜찮은 우정으로 지켰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의 후손을 영원히 왕궁에서 살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다 아는 밧세바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다윗 왕과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누가 나쁘냐고 물어보면 100퍼센트 밧세바를 나쁘다고 합니다. 임금님이 항상 산책하는 곳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장소를 선택해서 임금님을 유혹하려고 목욕함으로 다윗의 시선을 얻어내는데 성공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밧세바가 나쁘다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말합니까? 일평생 밧세바를 원망하는 소리를 한마디도 안합니다. 내가 죄짓고 그도 죄짓게 자기 자신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밧세바의 요청은 절대로 거절을 안 합니다. 본처의 자식들이 수없이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데도 다 무시하고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에게 왕권을 기어코 물려줍니다. 왜? “나는 밧세바를 괴롭게 했기 때문에” 이게 다윗의 인간관계입니다.

그 다음에 다윗 왕을 책망하는 사람은 유일하게 한 사람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나단 선지자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유일하게 성경에 다윗 왕을 책망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어떻게 합니까? 다윗을 죄인이라고 책망하는 하나님의 종인 나단 선지자를 평생 궁중 제사장으로 모시고 그가 말할 때는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어느 한때라도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떠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시편 23편! 아둘람 동굴 속에서 정예부대 3,000명이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죽이려고 했을 때 “내가 비록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이때에도 주님은 나를 보호하신다.” 그래서 그렇게 유명한 시가 된 겁니다. 어느 한 때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마음이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입니다. 다윗을 연구하면 몇 가지가 특징이 있습니다.

다윗은 말년에 이때를 기억하며 또 다른 노래 한편을 부릅니다. 시편 103편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자기 노래를 부르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노래를 부르십니까? 여러분이 부른 노래 속에 삶의 신앙과 철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불렀던 활 노래를 들으시고 이때부터 다윗의 말년까지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찬란한 시기를 주셨습니다. 지난번에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깃발의 의미는 하얀 바탕에 하늘색 색깔로 별 하나를 그린 것인데 다윗의 별입니다. “너는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빛나라!” 그 뜻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활 노래를 우리 자신들도 부르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임재가 여러분 생애에도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다윗의 활 노래 속에 있는 영적 의미를 우리가 잘 깨닫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영적 관찰과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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