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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고, 보고, 만진 말씀 (요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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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치유 이신론'과 허황된 소문>
노틀담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인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 박사가
오늘 미국 청소년들의 신앙 행태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오늘 미국 청소년들의 두드러진 신앙 행태를
'도덕적 치유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신론'(理神論)이란
18세기 계몽주의가 동터오던 시대에 구라파에서 유행하던 신관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매우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믿으려고 했던 신학 사조이지요.
가령 하나님은 시계를 만든 시계 제조업자와 같아서 세상 만사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대로, 척척 질서정연하게 자동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시계처럼 질서 있게 잘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입니다. 
게다가 이와 같은 세상 법칙은 우리의 이성으로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이나 초월적 계시가 필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신론이 도덕적이고 치유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미스 교수에 따르면 '도덕적 치유 이신론'은 크게 다섯 가지의 특징을 보입니다.

첫째, 세상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가르치듯이
인간이 착하게 살고 서로에게 친절하기를 기대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셋째,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좋은 기분을 갖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어떤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실 필요가 없는 한,
인간의 삶에 특별히 간섭할 필요를 느끼시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다섯째, 착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과 상관없이 천국에 간다는 믿음입니다.

요즈음 미국 청소년들이 이처럼 도덕적이고 치유적인 이신론에 깊이 빠져 있다는 분석인데, 
심각한 문제는 교회에 안 다니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청소년들까지도 이런 유행 사조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잘은 몰라도 우리나라의 청소년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비록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부모님 세대와는 매우 다른 신앙관을 갖기 쉽습니다.
'도덕적인 것' + '치유적인 것' +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모두 합해진 이신론적인 신앙을 갖기 쉽다는 말이지요.

또 한 가지 얼마 전에 미국의 유명한 DISCOVERY TV 채널이 예수님과
그 가족들의 시신을 매장한 상자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했다고 합니다.   
『TITANIC』과 『TERMINATOR』등의 영화를 감독한
제임스 케머론(James Cameron)이 이 다큐를 만든 중심 인물이라고 합니다. 
27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납골당의 매장 상자를 집중 분석한 결과
상자 측면의 비문이 예수님과 그의 부인인 막달라 마리아와
이들 부부의 아들인 유다의 무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는 주장이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도
이 묘지에 함께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은 즉각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황당무계한 주장이라고 일축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유다 복음서』가 나와 기독교계를 혼란스럽게 하더니만 이번에는
예수님의 가족 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또 불거져 나와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모두다 믿기 어려운,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예수를 바로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듣고 보고 만진 바 된 성육신의 진리>
앞으로 우리는 꽤 여러 주에 걸쳐서 요한 1서, 2서, 3서를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요한 1서는 '사랑의 편지' 혹은 '진리의 변증서'로 알려진 너무도 아름다운 책입니다.
요한복음과 더불어 사랑의 사도 요한이 썼을 것으로 추측하는 바,
요한 1서는 사랑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 1서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 말씀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적(敵)그리스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이단종파들이 일어나 교인들을 미혹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지속적으로 교회를 위협했던 이단사설이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靈知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인간성, 육체성을 부인했습니다.
이들은 영혼은 무조건 선하고 인간성과 육체성은 무조건 죄악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교리를 부인하면 기독교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런 맥락에서 앞에서 말씀드린 '도덕적 치유적 이신론'이나 예수님과 그 가족들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주장 역시 해괴하기 짝이 없으며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기 때문에 더욱 더 큰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가족들과 더불어 죽어서 묘지에 그냥 묻혔다면 부활은
없었을 것이며, 우리가 믿는 부활 신앙은 모두 거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와 정반대로 예수님의 인간성,
육체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성육신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이 말씀은 요한 1: 1-14절 말씀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저 유명한 '로고스 기독론'에 관한 말씀이지요.
마찬가지로 요일 1: 1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달리 여기에서는 그냥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해서 생명과 말씀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태초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하나 둘 창조하실 때 함께 계신 분이시지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님은 언제나 죽음 있는 곳에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이 선포되는 곳마다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생명이 찾아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생명은 항상 함께 갑니다.
오늘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 생명이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가 손으로 만진 바 된다고 했습니다. 
인체에는 오관(五官)이 있습니다.
입, 코, 귀, 눈, 손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입니다.
미각(입), 후각(코), 청각(귀), 시각(눈), 촉각(손)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생명의 말씀이 되신 예수님과 관련해서,
이 다섯 가지 감각 기관들 중에서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귀로 들은 바요, 즉 청각을 말하고, 눈으로 보고 주목한 바요,
즉 시각을 말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 즉 촉각을 말합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생명의 말씀은
그냥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공중에 떠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그 말씀하시는 바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직접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육체를 가진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즉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성육신', 즉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까닭에 요 1: 14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그 말씀하시는 바를 직접 들을 수 있고, 그 거룩하신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고, 그 몸을 직접 만질 수도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이 세상, 이 역사 속에 오셨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서 2절을 보면 이 생명의 말씀이 역사 속에 나타났는데 그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직접 보았고 체험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요한 일서의 수신자들에게까지 직접 증거하고 선포한다고도 말합니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었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사실을 증거하고 선포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3-4절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생명의 말씀 = 사귐 + 기쁨>
여기에서 저자는 요한 일서의 기록 목적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로, 서로 사귐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듣고, 보고, 만져서 명확하게
증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중요한 목적은 함께 사귀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사귐, FELLOWSHIP, KOINONIA, 참 중요한 말이지요.
'사귐'이라는 말은 교제, 참여, 동반자 의식, 등의 뜻도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와 우리 이웃 사이에 교제와 참여와 동반자 의식을 갖도록 만듭니다.

이와 같이 그 사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 수직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게 됩니다.
이 땅위에 죄인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 우리는 이 성부 성자와 함께 사귀어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과 우리가 드리는 일체의 예배가 사실은 하나님과 사귀는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 온 것도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수평적인 차원의 사귐, 즉 이웃과의 사귐이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간의 사귐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똑같이 사귀는 형제 자매들과도 사귀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들 간의 쌍방교류적 사귐, 즉 삼위일체적 사귐이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요 17: 21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오늘 여러분들이 위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시고,
아래로 우리 이웃 형제 자매들과 사귐으로서 서로 서로 하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기쁨이 차고도 넘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기쁨을 포함합니다.
위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가 있고,
아래로 우리의 이웃과의 다정한 교제가 있게 되면 기쁨이 저절로 찾아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과 긴밀히 사귀십니까?
이웃과의 다정한 교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귐은 언제나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 원인은 분명합니다.
제일 중요한 원인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 이루어질 때,
우리 이웃과의 사귐도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아무리 사람들과 즐겁고 친밀하게 교제한다고 할지라도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친목 단체
못지 않게 얼마든지 재미있고 친밀하게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갖가지 프로그램 때문에, 사람들을 사귀기 위하여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사귐이 먼저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뒷전으로 밀려날 때 우리의 사귐은 건전치 못한 사귐이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인간적인 사귐이 교회 생활을 지배하게 될 때
그 사귐에서 오는 기쁨은 일시적이고 변덕스럽기 마련입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적인 사귐을
토대로 해서 이웃과 사귈 때 우리의 사귐은 영적이고 건전한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배당에 와도 참 기쁨이 없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세요.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과의 사귐은 항상 두 번째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첫 번째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사귐은 건강한 사귐이 될 수 있고, 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GUIDANCE', G하나님과 U당신과 I내가 함께 추는 DANCE춤>
이제 말씀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결단하신 사건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이나 관념이나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육체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오늘도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열심히 사귀십시오.
그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와도 힘써 사귀십시오.
그 예수님을 구세주로서 똑같이 고백하고 한 분 하나님을
똑같이 섬기는 우리 이웃의 형제 자매들과도 힘써 사귀십시오.
그리하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영어로 'GUIDAN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인도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참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GUI'라는 말 뒤에 'DANCE', 즉 '춤춘다'는 말이 나옵니다.
G는 God, 즉 하나님을, U는 YOU, 즉 당신을, I는 나를 각각 의미한다고 할 때, 하나님과
당신과 내가 어울려서 함께 춤을 추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춤을 잘 추지 못하는데,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출 때 양쪽이 다 함께 리드할 수 없습니다.
한 쪽이 다른 쪽의 리드를 받아가며 양보하고 순종하게 될 때
음악에 따라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양쪽이 서로 기선을 잡아 자기가 춤을 주도하려고 할 때 서로 부딪히게 됩니다.
결국 춤이라는 것은 내가 상대방을 충분히 신뢰하면서
그 쪽에 양보하고 순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이제 'GUIDANCE'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G)과 당신(U)과 내(I)가 서로 함께
춤을 추는 것과 같은데, 이 경우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리드해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리드하면 춤은 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부드럽게 따라 하면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춤은 과연 누가 리드하고 있을까요?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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