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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시리즈 1, 겟세마네 (막 14:32-42)

  • 잡초 잡초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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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마가복음 14:32-42

일반적으로 한사람의 전기를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들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과정 그리고 사람들이 쌓은 업적에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것에 비해 그 사람의 죽음은 전체의 10%를 넘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서를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무려 30% 이상을 할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사역에 크라이 막스, 혹은 하이라이트가 된다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부활절 아침까지 6주에 걸쳐 예수님이 성금요일의 전날인 목요일 밤부터 부활의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묵상하므로 사순절에 주의 고난을 생각할 있는 뜻 깊은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랜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고난보다는 행복을 좋아하고, 헌신보다는 축복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여섯 차례나 걸쳐 고난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는 것은 자칫 성도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신앙이 없이는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모두 가짜일 수밖에 없고, 그 영성은 올바르지 않은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알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사랑하는 그 사랑은 오래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칫 감상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는 알아야합니다.  저는 이번 여정에서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시기 위하여 베푸신 독생자의 죽이심을 알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욱 더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기를 소원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이번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함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와 마주한 상태에서 그분과 함께 수난의 길을 떠나므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과 겸손, 자비와 분노, 정의와 연민, 공의와 용서, 그리고 진리와 사랑이 체험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은혜를 체험하므로 냉랭한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그리스도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R. E. March 라는 사람은 “갈보리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며 알아야할 가치 있는 다른 모든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가치가 인생의 가치라고 여겼던 헬레니즘의 문화 속에 살아왔던 사도 바울도, 그의 학문에 대한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기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겟세마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들 합니다.  이는 겟세마네가 없이는 주님의 수난도 그리고 피 흘리심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는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수난을 준비하셨고, 마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마지막 시험대였고, 결단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모습은 이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으로 십자가의 길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동산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이 습관을 쫓아 올라가셨던 곳이다.
먼저 예수님은 감람산이라는 곳에 오르셨습니다.  산전체가 온통 감람나무로 덮여있는 산이라고 하여 감람산이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그곳에 아주 작은 동산하나가 있었습니다.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의미가 담긴 겟세마네라는 이름 한 작은 동산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영화 “The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습관을 쫓아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처절한 죽임이 예고되는 시점에서 주님은 습관을 쫓아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인류를 위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시고,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습관을 거룩한 습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거룩한 습관이 인류의 소망인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습관이라고 하면, 버릇처럼 반복되는 것을 우리는 습관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습관들이 있습니다.  좋은 습관이 있고, 나쁜 습관들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직장인의 필독서 20권 가운데 한권으로 선정된 “백만 불짜리의 습관”이라는 책에 보면, 사람의 성공과 실패의 95%는 습관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한다.  이는 좋은 습관은 성공을 나쁜 습관은 실패를 가져올 확률이 95%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 인격을 낳는다는 말 입니다.  좋은 습관은 결국에는 좋은 인격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물려줄 가장 좋은 유산 가운데 하나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요즈음 사순절 새벽기도 시간에 우리교회에 한주와 한정이 한빛이가 나옵니다.  저는 사실은 목사인 제가 부끄럽게 여겨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릴적부터 하나님께 나가는 좋은 습관은 결코 다른 길로 가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은 거룩한 습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습관이라고 할지라도 습관 그 자체가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습관적으로 하시는 분들은 그 습관 자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습관은 신앙생활의 성공률 95% 이상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습니다.  어릴적에 부모님을 따라 습관처럼 다녔던 자녀들이 세상에 방황했을지라도 다시 신앙생활 하여서 새롭게 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통계가 이를 말해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결심과 의지는 바로 주님의 습관처럼 오르내리시며 기도하던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가지셨던 이 거룩한 습관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순종하여 그 걸음을 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체포되어 고난 받기 불과 24시간 전을 두고 감람산을 찾았던 것은 그 분에게 거룩한 습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순절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는 길입니다. 

2)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고백했다(막14:34).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낙심된 상태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비록 하나님이라고 하실지라도, 보통 인간처럼 허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장면이다.  그분은 격정적으로 몸부림치며 자제력을 상실한 사람처럼 안절부절하며 고민스러워 죽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이클 카드 라는 사람은 “겟세마네게 없었다면, 골고다도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상처에서 피와 물이 흘러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핏방울이 땀방울과 같이 흘렸기에 가능했다” 고 합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십자가에서 육신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의지의 죽음이었다.  그 고통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었기에 골고다에서 육신의 죽음을 감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고통은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핏방울이 땀방울과 같이 흘러내렸다고 했겠습니까.

간혹 사람들은 주님이 실제로 땀을 흘리신 것을 핏방울처럼 보인다든지 혹은 땀방울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핏방울과 같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리스트로 벨 이라는 사람이 쓴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흘리신 핏방울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를 나타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흘리신 핏방울은 사람이 깊은 고민과 견디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으면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한 법의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 당시 주님이 흘리신 것이 땀방울이 아니라, 핏방울임을 알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죽을 만큼이나 큰 고통과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하여 주님을 예언하기를 “간고를 많이 겪은 자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한 것처럼 주님은 괴로움의 밤을 보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끔찍한 상처를 외면한다면, 십자가가 하나의 감정적 상징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가슴에서 살아 고동치는 신앙은 될 수 없습니다.

영리주의자들은 주님의 몸은 허상이므로 그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겟세마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증거해주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을 위해서도 정의를 위해서도 아닌, 주님이 마셔야하는 잔 안에는 온갖 더러운 죄가 쌓여있어, 냄새가 진동을 하는 그 잔을 마셔야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마 이길 수 없는 고통이기에 주님은 “내가 죽게 되었다”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수난으로 사용하는 Passion이라는 뜻은 깊은 고통을 겪다에서 나온, 파스쵸(pascho)라는 것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난으로 쓰는 Passion은 헌신으로도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고난으로 헌신하셨습니다.  이 헌신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의가 들어 올 수 있었으며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3)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이 말씀은 예수님의 수제자라 불리우는 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는 원래 12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항상 주님의 지근거리에서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하며 그 마음을 이해하는 제자였기에 주님은 이 세 사람을 데리고 동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아마 두 번째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주님은 다른 여느 때와 달리 그 마음에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기에 그들을 데리고 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을 데리고 간 주님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을 위하여 부탁하신 적이 없으셨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고 간청하십니다.

먼저는 “나와 함께 있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주님은 공생애 내내 홀로 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홀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하는데 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제자들더러 배를 타고 떠나라 하고 혼자 밤새워 기도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한적한 산으로 올라 기도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습니다.  이날 밤 만큼은 제자들이 있어주기를 바랬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수술 전이나 혹은 죽음 전에 누군가를 옆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시는 예수님은 뼈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고독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으시고 고개를 돌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있어줄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라 곧 깨어 기도하라”였습니다.
지금 후에 장차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아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기도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드린 기도는 본문에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기도하라는 것은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 심히 고통스럽고 죽게 되었으니 나를 도와서 함께 기도하자.  이것이 곧 너희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고 계시니, 내가 죽을 만큼이나 힘드니 나를 위하여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들은 모두 다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고민과 번뇌로 괴로워하시다가 제자들이 어떻게 있는가하고 다가갔더니, 제자들은 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벌떡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예수님이 등을 돌리자 금세 또 잠이 듭니다.
주님은 다시 자신이 기도하던 자리로 돌아와서 이전보다 더 깊은 고민과 괴로움에 슬퍼해야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에서 나온 고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제자에게로 돌아갔더니 제자들은 이전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고 물으시는 모습에서 그 분의 고독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함께 있어주기를 바랬고, 기도해주기를 바랬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기대에, 그 분의 부탁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망, 분노와 슬픔이 깊게 드리워진 밤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님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간혹 교우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를 옮길 때에 애써 태연한척 해 보지만 “나와 함께 머물러”라는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남아 있는 교우를 통해서 위로를 받지만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에 떠나는 성도들을 보면, 정말 바지가랭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는 교우들이 떠날 때에 함께 신앙 생활했던 정 때문에, 또 이제 매 주일이면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남겨진다는 고독 때문에 서운하고 섭섭하고 안타까웠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주님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머물러 깨어 있으라”는 음성이 제 마음 가운데 더 깊이 들어와 마음 가운데 맴돌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필요할 때에는 찾아와 주님의 곁에 있지만, 정작 주님이 필요할 때에는 떠나버리지 않습니까?
주님은 주님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함께 기도하시기를 원하시고 있음을 기억해야할 줄 믿습니다. 
 
4)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어쩌면 겟세마네 동산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그 말씀을 잘 알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제목의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적어도 본문은 그렇게 말합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물론 요한복음에 보면, 제자를 위하여서도 또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심적이고, 가장 힘든 기도는 바로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러한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십자가를 지는 고통의 잔은 마시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는 그 마지막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존 하워드 요더라는 사람이 쓴 “The Politics of Jesus 예수의 정치”라는 책에 보면, 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원대로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성찰한 내용의 글이 나옵니다.
그는 그 글에서 아마 예수님이 자신의 원대로 하였다면 정말 십자가를 지지 않았고 원수들을 다 물리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은 열두 군단 모두 7만2천명을 불러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 만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 사탄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하셨기에 이를 무난하게 극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의 순종이 없었다면, 이 땅에 교회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범 우주적인 하나님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는 유대인에서 탄생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역사는 종지부를 찍어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이러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그토록 괴로워하시며, 통곡하셔도 등을 돌리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가끔은 우리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면 대답부터 합니다.  만일 하지 않을 때에 그들이 가질 불안을 생각하면 일단 대답부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서 있는 시간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또한 세상을 구원하시는 길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의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부르짖음에도 가슴을 찢는 고통을 감내하시며 돌아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주님은 아시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라는 기도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립니다.

우리는 기도의 대부분이 이와 사뭇 다릅니다.  내가 목표를 정하고는 그것에 하나님이 애써 따라오기를 고집하고 악을 쓰며 심지어는 협박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저주하며 돌아섭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떠올려야합니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

결론)
예수님의 고통은 골고다보다 겟세마네가 더더욱 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그렇게 울부짓고 괴로워하며 탄식하시던 예수님이 동산을 내려가시고 난 후에는 의연하게 골고다 길을 오르셨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난보다도 고난이 닥쳐올 때가 더 큰 고통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잘못이나 죄로 인함이 아니라, 저 무도한 우리와 같은 사람의 죄를 홀로 지시기 위하여 다짐하시고 결단하시는 고통은 정말 이겨내기 힘든 것이었는데, 그것을 골고다에서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도 저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습관을 쫓아 기도하며, 주님과 함께 있어 기도하며, 주님의 심한 고통에 함께 동참하며, 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가까이 하므로 십자가로 좀 더 가까이 함께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오늘 사순절에 우리가 묵상해야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뉴욕신풍교회
이종범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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