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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시리즈 2. : 체포 (마 26: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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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마태복음 26:46-56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이 잡히시던 전날부터 부활이 있었던 날까지의 모습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주님이 체포당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며, 이때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4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을 통하여 묵상하겠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과의 만남이 있고, 그 만남을 통하여 관계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다 아름다운 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참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있고, 어떨 때에는 좀 더 진작에 만났으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옆 사람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고 인사하십시다.  좀 진작에 만날걸....
이렇듯 누구를 만나느냐는 우리 인생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날 때에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른체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도 착오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금새 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금새 또 돌아서서 저런 악한 사람을 세상에서 보지 못했다고 막 욕을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 잘 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악하여서 자신을 감춘채 다중적인 모습으로 만남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진정한 친구인지에 대한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어려울 때에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좋은 때에 있어주는 사람들은 친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좋은 친구는 되지 못합니다.

사순절 동안 저는 우리 성도들이 모두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가는 십자가의 길에 여러분들이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동행이 끝나는 부활주일에는 여러분들이 주님과의 좀 더 가까워지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그동안 멀게만 느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이번 사순절 십자가로 가는 길에 함께 하시므로 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소원해봅니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전히 겟세마네 동산에 계십니다.  동산은 습관을 좇아 겟세마네 동산에 올랐지만, 그곳은 여느 때와 달랐습니다.  이전처럼 하나님의 응답도 그리고 가까이 계심도 경험할 수 없는 참으로 적막한 밤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내셨습니다.  그저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들만 흔들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스산함만 더할 뿐, 아무도 없는 밤을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곧 밀려올 무서운 고난의 그림자만이 드리우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참기 힘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어야만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같이 있어주기를 원하였지만, 그것은 단지 주님의 바램 일 뿐, 제자들은 잠에 취해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역 3년을 결산하시며, 한 사람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아쉬움이 더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더 처절함으로 기도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는, 이 잔을 내게 옮겨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결국 그 기도는 하나님의 의해서 묵살되어지고,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주님은 그 다음날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보겠습니다.
1)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14:38).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제자들을 보살필 수 없는 환경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후에 무서운 시험이 닥칠 것을 미리 아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들의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삶에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척할 때에 어떤 청년이 다가와서 시험에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말씀을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 시험에 들지 않겠다고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주님이 주기도문에서도 가르치셨는데,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는 시험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험에 넘어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시험에 드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시험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 오지만 그것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현세에서는 시험은 불가피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시험이 없는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피하려고 하지 마시고 이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 시험이 왜 있느냐?
예수를 믿는 한 사람이 남의 집에 하인으로 있었다.하루는 주인이 하인을 조롱하기를"나는 예수 믿지 않아도 아무 시험도 없이 잘 만 사는데 너는 예수를 믿는데도 왜 늘 어려운 시험을 당하느냐? 그럴 바에야 믿지 않는 게 더 낫겠다"  이때 이 사람은 "주인님 노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가령 말입니다.사냥 중에 사슴 두 마리가 있어 쏘았는데 한 마리는 즉사하고 한 마리는 다리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도망간다면 주인께서는 어느 쪽 사슴을 보고 달려가겠습니까?""그야 죽은 놈은 내 수중에 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산 놈부터 쫓아가 잡아야지""옳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험이 없는 것은 영혼이 죽어 마귀의 것이 되어버렸으므로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는 마귀가 이를 방해하여 자기 수하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니 시험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험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는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한다.

어떤 책을 읽어보니까 “착각의 십자가”가 있고, 복음의 십자가가 있다고 합니다.
시험에도 이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만든 시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는 것은 바로 기도라고 주님은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이라는 큰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시험이라는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대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보다 현재 처한 상황에 집중하게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보다 현재 처한 환경을 더 크게 만들어 하나님을 가립니다.  지금 시험에 들어있는 분들은 한번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 보다 현재 처한 상황이 더 크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할 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것이 점점 회복하기 힘든 길로 치닫게 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은 시험이 내게 오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찾아올 때에 바로 그 시험이 크게 보여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이요, 그 시험에 모든 것을 집중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26:46)
밤새 기도하시고 그 후에 주님이 제자를 깨우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급한 목소리였으나,  결코 무게가 가볍지 않는 목소리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음성에는 결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새 고난의 잔을 마시기를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하시던 모습과 사뭇 다른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당당하고 비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주님이 자기를 잡으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시지 않고 가자고 하셨는가? 에 대하여 궁금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결단과 순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옮기려고 기도해보셨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고 그의 삶을 운명에 맡기신 것처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러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깨우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이와같아야합니다.  기도했습니다.  어떤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위한 우리의 결단이 따라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과의 동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성격이 급하시지는 않으셨을까? 라는 느낌을 문득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그랬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고는 당장 좇을 것을 명했습니다.  뭐 속옷을 챙길 시간도 주시지 않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격이 급한 사람은 항상 손해를 봅니다.  밥값 낼 때에도 그렇습니다.  제가 항상 밥값을 많이 내는 것은 이 성격 때문입니다.  밥을 먹고 느슨하게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첵크 가져오라고 하면, 웨이트레스가 꼭 가져오라는 사람에게 책크를 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책크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없고 해서 결국에는 제가 냅니다.
이렇듯 급한 성격은 항상 손해를 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약속하고 이행을 할 때가 오면 우리의 결단은 가능한 한 빠른 것이 좋습니다.
결단은 지금 당장 행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시험이 오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지도자였던 케네디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아이젠하워 전대통령을 찾아가서 자문을 받게 되었다. 그 때에 아이젠하워는 젊은 신임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임무는 결단하는 것입니다"(Your job to make a decision). 우유부단하거나 우왕좌왕하는 지도자는 국민의 신임을 받지 못한다. 상황을 명확하게 판단하고 속히 결단하여 행동에 옮기는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다. 인생의 기회는 우리가 결단하기까지 언제나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다. 신속하게 결단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포착해서 남을 앞서가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에 신속하게 신앙의 결단을 내려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참으로 성공적인 지도자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결단의 사람을 바라고 있다.

기도할 때에는 이것저것 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막상 그 약속의 순간이 다가온다거나 혹은 그 약속이 내게 큰 불이익이 될 때에는 그 약속을 지키기 보다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약속을 어기기 마련이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모습을 보이시므로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다음에...” 혹은 “나중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Go and Do it"입니다.

3.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눅22:48)
주님이 결심을 한 후에 산을 내려오는데, 산 아래에서 많은 장정들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로마 군병과 대 제사장의 사병들 그리고 예루살렘을 지키는 병사들까지 많은 군인들이 아직도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두운 밤을 헤치며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유난히 눈에 익숙한 한 사람이 그들 중에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열두제자였고, 불과 몇 시간 전에 주님과 함께 만찬을 했던 가롯 유다였습니다.  이 유다가 예수님을 은30전 당시 노예를 파는 값을 받고 예수님을 제사장에게 넘긴 것입니다.
금년 3월 달에 출시 예정인 유다복음이라는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쓴 책에는 유다가 스승을 판 것은 예수님의 무능력이었기 때문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그는 뛰어난 학문과 탁월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야망을 성취해보려는 꿈이 있었는데, 그것을 성취하기에는 주님이 너무 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뭏던 주님의 체포는 제자였던 가롯유다의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배신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는 로마 군병과 제사장 그리고 성전 호위병과 함께 산에 오르다가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께로 다가가서 입맞춤을 합니다.  이는 이미 제사장과 군인들 사이에 주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세웠던 약속이었습니다.
원래 입맞춤은 유대인들의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너희는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문안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입맞춤은 문안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의 평강을 비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입맞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음침한 음모가 있었습니다.  입맞춤이 곧 체포할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요, 입맞춤과 동시에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음모가 꾸며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나를 팔자가 나에게 와서 입술을 내 얼굴에 갖다 댄다고 할 때 우리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도 예수님을 로마 군병에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 뒤에 숨어 저기 있는 사람이라고 지적만 해도 되는 다가와서 얼굴에 입술을 대고 입맞춤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으면 따귀라도 한 대 올려야 정상입니다.  백보를 양보한다고 해도 “의리 없는 놈” 이라고 한마디 해주어야했습니다.  분해서 견딜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다른 말씀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 한마디에 가롯 유다는 결국에는 자살로 이끕니다.  역사가들은 가롯 유다가 나중에는 정신병에 걸려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신병이 들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주제로 한 많은 영화들이 한결같이 가롯 유다가 자살하는 장면에 예수님의 이 음성이 들리게 하고 괴로워하는 유다의 장면을 많이 담습니다.
그런데 그 배신이 유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체포되자 마태복음 26:56에 보니까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은 홀로 남겨두고 다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모두다 숨어버렸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나뭇가지에 어떤 제자들은 되도록 멀리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홀로 남으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던 그래서 체포되기 전 까지만 해도 만용을 나타내던 베드로도, 그리고 예수님께 가장 사랑받았던 요한도, 또한 주님의 좌와 우를 책임지겠다던 야고보도 주님을 배신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세상에는 배신만큼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더군다나 자신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배신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은 그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제자들을 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도 주님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입맞춤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을 다 할 수 없을 때 주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으로, 주님의 곁에 누군가 꼭 서 있어야 할 그 시간에 우리의 충성스럽지 못함으로, 십자가까지 따르며 주님과 함께 해야 할 그 때에 신앙이 뜨거웠다 찼다 변하기 잘하는 변덕스러움으로, 어렵고 위험한 때에는 주님의 사람이라고 나타낼 용기가 부족함 때문 등으로 우리는 주님을 배신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상황이었노라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께 배신의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입술을 내밀면서도, 내 모습을 바꾸려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이라고 변명으로 일관하며 쉬지 않고 주님을 부인하거나, 주님을 세속적인 정욕으로 바꾸는 배반자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주님은 우리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결론)
예수님을 죽이려던 제사장들은 홀로 있는 예수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넘겨 줄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중 하나, 곧 그를 배신할 한 제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끔찍하고 있지 말아야 할 일이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발생한 것입니다.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의 길은 이 제자들의 배반으로 시작됩니다.
어떤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잠을 자고, 한 제자는 그를 배반하며,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넘겨지고, 포기되고, 버림받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와 함께 짐 지워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를 보호하던 손을 놓아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갖도록 하라. 죄인들의 손이 원하는 것을 예수에게 하도록 하라. 적들이 그를 붙잡게 하라.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때리도록 내버려두라.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은 아무도 그를 위해 더 이상 개입하지 않고, 그를 조롱과 공권력에 넘겨 세상이 원하는 것을 그에게 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아무도 그의 편에 더 이상 서지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를 세상에 넘겨줍니다.
이렇게 주님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이 홀로 체포되셨습니다.

저는 이번 한 주 우리의 삶에도 주님을 배신하라는 시험이 찾아올 때가 있을 줄 압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에 때로는 용기가 없어, 믿음이 없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망각하므로 주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하는 모습을 되도록 멀리하려는 배반을 하라는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뉴욕신풍교회
이종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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