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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기, 오해, 매도의 벽을 넘어 (막 3: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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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 존재했던 폭군 5명만 뽑으라면 누구를 뽑겠습니까? 다니엘 마이어슨은 그의 책
[폭군들]에서 네로와 러시아를 40년간 지배한 미치광이 차르 이반 4세, 거리의 부랑자에서 최고의 선동가로 올라선 히틀러,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했다가 비겁한 겁쟁이로 전락한 스타린, 과대 망상증 환자 후세인을 뽑았습니다. 이 중 가장 악랄한 폭군을 뽑는다면 누구를 뽑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네로라고 말하라 것입니다. 네로는 16살에 황제가 되어 처음에는 정치를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자 폭군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왕을 만들어 준 모후를 난도질하여 죽이고 연극무대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연기하였습니다. 동생을 죽이고 신하의 아내를 간통하고 아내를 누명을 씌워서 증기 찜으로 죽였습니다. 자신의 아들 왕자를 바닷물 속에 차 넣어 죽여 버렸습니다.

66년에는 오늘의 올림픽 같은 국제경기대회를 로마에서 열어 자신이 네 개의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억지로 하프 연주와 비극 연기를 올림픽 종목에 넣어 자기가 금메달을 받았고 수레경기에 참가했다가 그의 수레가 굴러 넘어졌으나 다른 선수들이 경기를 멈추고 황제의 수레를 일으켜 앞세운 후에 뒤따랐기 때문에 역시 일등을 했습니다.네로는 자기 자랑에 도취된 사람이었습니다. 똑똑한 왕비 폼페어가 경기대회가 황제 개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용감하게 충고하자 임신한 왕비를 발로 차 죽여버렸답니다. 아내의 목을 잘라 정부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또한 이를 후회하여 아내와 닮은 미소년을 거세시켜 결혼까지 한 희대의 폭군입니다. 로마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자신의 스승 세네카도 죽였고 부하 200여명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로마 시내를 불지르고 그것을 보며 아름답다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 미치광이였습니다. 로마의 대화재로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자 당황한 네로는 범인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뒤집어 씌워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콜로세움(원형 경기장)에서 처형하였습니다. 로마 시내 전체 면적의 1/3에 해당하는 건평 24만여 평의 초호화 궁전, 황금 궁전을 건축하면서 기독교인을 상상을 초월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처형하였고 어떤 사람은 굶주린 사자를 풀어놓아 잡아먹게 하였고 어떤 사람은 머리에 불을 붙여 촛불 대신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말씀을 읽은 마가복음은 그 때 핍박받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때 신앙인들은 박해와 순교 속에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신앙 고백을 하는 교회와 신자들을 지켜 주실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이런 박해를 받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 잡혀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들을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인 것을 부인하고 황제와 로마의 만신전에 있었던 여러 신들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숱한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대가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았습니다.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타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교회를 떠났지만 속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도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산으로 숨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넷째 부류의 사람들은 담대하게 순교를 각오하며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계속해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 가르치며 격려하며 주님께 헌신하며 모든 환란과 시험을 담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마가복음을 주어졌습니다. 종으로 오셔서 고난받으셨지만 부활하셔서 메시아가 되심을 입증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2차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며 메시아적 사명을 완수했는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인기, 오해, 매도의 벽을 넘어가면서 구속 사역을 성취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인기를 넘어(20)/ 섬김으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헤롯당까지 합세해서 적대 세력으로 등장하자 잠시 갈릴리에서 물러갔습니다.(3:7-12) 12제자를 세우고 다음 사역 준비셨습니다. 그리고 2차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일으키자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을 방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가는 곳마다 인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주면 얼마나 우쭐해지겠습니까? 지지도만 올라가도 마치 대통령이 된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수들이 인기가 올라가면 얼마나 대우가 달라집니까? 이렇게 인기가 올라가면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대표적인 특징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인기가 올라가면 그 때부터는 스스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비서를 두게 됩니다. 모든 부분에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이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지배권 속에 묶어 두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러 하는 것입니다. 회사가 인기가 없어 어려울 때는 겸손했던 사람이 회사가 인기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올라가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 담을 넘지 못하면 큰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이 담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합니까? 오늘 성경은 그 상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식사할 겨를도 없습니까? 종으로 섬기느냐 그렇습니다. 아픈 사람 고쳐 주시고 귀신들린 사람 났게 해주시고 고통 받는 사람 위로해 주고 억울한 사람 한을 풀어 주시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종처럼 수발 들기 위해 뛰어 다녔기 때문에 식사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왕처럼 했다면 이미 임명된 제자들에게 다 맡겨 버리고 여유 있게 식사하며 존경만 받으면 될 것입니다. 주인이 되어 종들을 부리면 됩니다. 조직으로 움직이면 됩니다. 자신은 존경받은 자리에만 얼굴 마담으로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종으로 오셔서 희생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섬기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종노릇하시는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전율이 흐르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우리 시대는 서로 왕이 되기 위한 싸움들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종이 되셨고 우리에게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서로 왕이 되기 위하여 권력다툼을 할 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로처럼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네로같은 영웅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종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 오해를 넘어(21, 31-35)/ 하나님의 뜻을 성취함으로

이렇게 종으로서 예수님께서 바쁘게 사명을 이루고 있을 때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왔습니다. 친속들은(호이 파르 아우투) “그 곁에서 난 가족”으로 31절을 보아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 가르키는 말일 것입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붙들어 왔습니다. 붙잡으러 온 것입니다. 표현이 심상치 않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30세가 넘은 성인입니다.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정식 제자들이 12명이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며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붙잡기 위해 나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미쳤다는 말은 “정신이 불안한 상태, 미친 상태 정신 나갔다.”는 말입니다. 음식을 잡수실 시간도 없이 열심히 일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속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협력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나쁜 소문이 있으면 그것을 변호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미쳤다고 그들이 믿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주격이 없이 3인칭 복수로 쓰여있습니다. 주격 없이 쓰이는 3인칭 복수는 대개 사람들 사이에 막연히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소개할 때 쓰이는 어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미쳤다”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친족들도 그렇게 단정해 버린 것입니다. 사실 확인도 없이 소문만 듣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번역에서는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가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붙들어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막 3:21)”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소문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습니다. 여론 역시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이며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는 그의 책 [여론 조작]이란 책에서 미국의 예를 들어 그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뉴스라는 것은 사실 보도라고 말하지만 결국 편집권을 통해 여과 장치를 통과해 독자에게 가는 것입니다. 일정한 분량 안에서 그 많은 사건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여론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여과장치를 다섯가지로 지적합니다. ①언론의 규모, 소유권, 수익성 지향 ②사업 허가서로서 광고 ③뉴스의 정보원 ④플랙(프로그램에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자)과 외압 ⑤통제 메커니즘으로서의 반공주의 등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론 조작은 권력을 잡고자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도구입니다. 한 때 바벨론 포로 귀한 이후 대제사장은 정치 종교의 모든 권한을 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침공으로 정치적 권력을 잃어 버렸고 종교적 권력만 로마 황제의 묵인 하에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젊은이가 나타나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언행이 선전 선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파멸시키고 자기들의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을 동원하여 악선전을 하였습니다.

후에 보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악선전을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참람죄를 뒤집어 씌워 군중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못박도록 충동질한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군병들에게 돈을 주어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 해 갔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게도 하였습니다. 여론 조작을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백성들로부터 자신들이 지지를 받기 위해, 종교적 권력을 계속적으로 누리며 자신들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여론 조작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들의 계략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경험보다 조작된 여론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여론이란 것은 계속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추종하게 되어있습니다. 계속 보게 되면 미운 사람도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언론들이 여론을 조작할 때 계속 한 사람의 좋은 점만 부각시키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나쁘게 조작하려면 계속 그 사람의 나쁜 점만 부각시켜 버립니다. 마리아가 진정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히 듣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이미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요2:1-5). 이 은혜를 받은 자신을 만세에 복있는 여인이라고 말하는 마리아의 찬양을(눅 1:46-56) 보면 마리아가 이 사실로 얼마나 기뻐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미 가나 혼인 잔치에 예수님과 같이 참여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여론 앞에 진실이 힘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형제들은 직접 들은 일이 없으니 예수님의 메시아됨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3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형제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 그리고 누이들”은 한 동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5)”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 딸들은 어머니 마리아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때입니다.

형제들은 영적으로 무지해서 그랬다 치더라도 마리아는 왜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데리러 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을까요? 어쩌면 육신의 아들이 그런 좋지 않는 소문까지 들으며 사역을 하는 것을 싫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보다는 자신의 육신의 아들에 비중을 더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에 비중을 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도 막아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들, 딸을 데리고 예수님을 붙들러 간 것입니다.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짧은 인식의 한계로 보면 이해할 수 없으니 미친 일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의 감독 베스도에게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습니다.(행26:24)

예수님은 이 오해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즉각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하려다가 이런 오해받으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아픕니까? 그래서 이런 오해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거칠어지고 그 말을 전해준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분노의 반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자주하는 실수입니다.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늦게 집에 갔는데 아내가 “교회 아이들 유학 보내는 일 소개해 주지 말라”고 말을 했습니다. 왜 좋은 일 하면서 오해를 받느냐며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사람들이 몰라서, 오해해서 하는 이야기이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하면서 욕을 얻어먹는 것 당연하지 않느냐? 예수님도 그렇지 않느냐? 좋은 일 하면서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생각하면 왜 목회를 하느냐? 차라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든지 사업을 하면서 살지? 좋은 일 하면서도 좋지 않은 소리 들으려고 목사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개의치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계속적으로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말라고 강요를 하였습니다.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조금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참 우리는 좋은 일로 말을 해도 잘 감정 통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을 정확하게 통제하시는 분이십니다. 감정의 충동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망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즉각적인 반응은 감정 충돌이 생길 것을 잘 아셨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머님과 형제들에게 열을 올리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어머님이 잘 못 들었고 동생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열을 내어 설명한다면 얼마나 가족 망신이고 예수님 스스로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일이겠습니까? 사역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을 아신 것입니다. 감정을 푸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해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과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 오해의 장본인인 바리새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밝혀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이 일이 다 끝난 후 마리아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가족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가족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 3: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 뜻을 모르는 사람은 내 어머니나 형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누구인가를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요6:29).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일, 구속사역을 성취하시러 오신 분인 것입니다. 자신의 이 땅에 왜 오셨고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해가 문제가 아닙니다. 육신적인 관계가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오해의 말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이 일만은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많은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오해가 있다하여도 숨 멈추는 순간까지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오해를 푸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오해를 푼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3. 매도를 넘어(22-30)/ 사탄을 제어하는 권세로

사람들이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매도입니다. 정치인들이 정적을 제거할 때 흔히 써먹는 방법입니다. 매도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가장 쉬운 기준이 도덕성입니다. 부정축제했다고 하면 충분히 제거시킬 수 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인들이 써먹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사상성입니다. 이데올로기입니다.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올무에 걸어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김일정 김정일이 써먹은 방법입니다. 김정일이 자신과 반대세력을 숙청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은 자신의 통치철학에 반대하는 반동분자입니다. 미제의 압잡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반발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똑같이 반동분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분법적 사고 틀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준은 친근성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을 통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남인가?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정치하는 사람들을 이 틀로 바라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기준점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한쪽에서는 개헌과 반개헌의 틀로 바꾸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쪽에서는 이미 좋은 틀이 있는데 왜 그 틀로 지지자를 빼앗기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탈당만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문현과 반노무현 전전을 무너뜨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민주와 반민주라는 틀이 유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적 무능과 유능의 틀로 전선을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밀리는 것 같으니까 도덕적 자질론으로 기준점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혁과 반개혁의 틀로 안되니까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지역감정의 틀로 다시 짜 보려고 합니다. 모두들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점을 만들어 여론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틀로 적과 동지를 구별해 버리기 때문에 쉽게 지지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획일적 편가르기는 다양성을 차단해 버립니다. 쉽게 사람을 정죄해 버리게 합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방법은 공산주의 자라를 딱지를 붙이는 것입니다. 인혁당 사건에서 보듯이 유신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반공을 붙이면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탁하는 자들은 무조건 적이되고 신탁하는 하는 자들은 무조건 아군이 되는 것입니다. 반민주는 무조건 적이 되고 민주는 무조건 동지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최고 지식인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군중심리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안식일의 틀로 묶어 보았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무슨 틀로 묶는가 보십시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2차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자 예수님의 행동과 말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습니다. 어쩌면 이들을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평생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 그룹입니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로 산헤드린에서 파송한 공식적인 조사단일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판정을 하고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바알세불을 지폈다.”라고 말합니다.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을 말합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단의 대행자라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전선을 하나님과 사단이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근거는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가버나움에서 귀신들린 자를 낫게 해 준 일이 있는데,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권세의 근거를 오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으로 예수님을 완전히 매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능력을 부인할 수 없으니까 예수님은 정상인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힌 자라고 매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단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 매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매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대처합니까?
아주 논리적으로 답변을 합니다. 너희들이 나를 사단이라고 말한다면 사단이 어떻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23).
26절을 보십시오. 만약 사단이 분쟁하면 스스로 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나라 비유이고 둘째는 집 비유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지배 하에서 헤롯 왕가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한 때 유다 독립 운동인 마카비 반란을 주도한 하스몬 왕가의 통치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마카비(유다)는 유다의 독립 투사입니다. 그의 아들들은 대제사장에 올라 정치과 종교 권력을 잡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이들이 대제사장 직을 겸임하는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하스몬 왕가를 지지했습니다. 계속해서 마카비 가문의 대제사장 직 겸직을 바리새인들이 반대하자 하스몬 왕가의 유대 통치자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바리새인 6,000명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도 반란이 계속되자 주모자 800명을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800명이 메달린 앞에서 그 가족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결국 아스몬 왕조의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치열한 권력 쟁탈전을 벌이다가 로마 폼페이가 내분을 중재한다며 팔레스틴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이두매 출신의 헤롯이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고 팔레스틴을 통치해 버렸습니다. 서기관들은 당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로 이 분열에 가담한 사람들입니다. 피부로 느낀 것들입니다. 분열된 나라의 운명을 잘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역사 의식이 없어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쉬운 집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합니다. 가족 공동체마저도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매일 매일 부부가 싸운다면 그 가정이 얼마나 서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을 무엇을 말씀하고 자 합니까? 사단과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23-27).

예수님은 누구시라는 말씀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강한 자 즉 사단을 결박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인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망, 죄, 귀신들림, 질병등으로 사람을 자신의 노예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은 그들의 집에 들어가 거주하며 사람들을 도구화해 버립니다. 그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님이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하여 소개한 후 예수님은 예수님을 매도하고 있는 그들의 본질적인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짓고 있는 죄가 성령 훼방 죄라고 경고하십니다.(28-30) 그들은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 사역을 거역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사역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비난하고 거부하는 행위를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말씀합니다. 서기관들 의도적으로 성령을 모독함으로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회개를 전제로 하는데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은 끝내 회개에 이를 수 없음으로(요일5:16) 죄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과 공모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능력을 파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네로는 로마의 대화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로마 화재의 진범으로 매도하여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무리 예수님을 매도하려하였지만 매도당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부활하심으로 악한 사단의 세력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네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말살시킬 것같았지만 오히려 그가 파멸되었고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승리의 깃발을 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매도하려는 세력에 무릎은 꿇지 않았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셔 우리를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고, 우리를 죄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기 앞에서 교만하여 섬김의 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해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매도 앞에서 나약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역을 이루어 갔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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