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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사 51:18~20, 롬 1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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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필립스가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권총으로 자살하자 유럽 전역에서 모방자살이 유행처럼 번져나간 현상을 의미합니다. 유명인이 자살한 뒤에 연쇄적인 모방 자살이 일어납니다. 자살 이유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죽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죽거나 자살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살이란 자발적 또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생계형 자살이 많았는데 이제는 생계형 자살로 점점 확산되어 갑니다.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극단적인 선택이 많아집니다. 오래전에는 자살할 때 농약이나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강에 투신자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의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살도 유행이 있나봅니다.

  우리사회에서 자살 도미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20-30대의 자살이 이전보다 부쩍 많아졌습니다. 전체 자살률이 10년 전보다 2.3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하루에 30명 이상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에만 하더라도 13,000명 이상이 자살하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를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자살을 방지하는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마치 멀리 떠날 것처럼 아끼던 물건을 남에게 줍니다. 늘 불안하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침착해집니다. 잠을 자지 않거나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잡니다. 식사량이 갑자기 줍니다. 어떤 일에 지나치게 슬퍼하고 집착하거나 분노합니다. 평소에 하던 일에 갑자기 흥미가 줄었다거나 일을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용모에 관심이 없어지거나 자기 관리를 하지 않습니다.

  자살을 암시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은 차라리 없어져야 사람들이 편할 거야”, “죽어버릴 거야”,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내가 없어도 넌 잘 살거야. 난 널 믿어”. “아무도 날 몰라줘”, “내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없을거야” 등의 말을 한답니다. 자살은 남은 사람들의 고통거리입니다. 가족과 지인의 관심이 자살을 방지하는 최우선의 방법입니다.

  자살은 세상에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 때문에 시작됩니다. 죽어도 몰라줄 것이라는 자기포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 같은 사람 없어도 돼”라는 극단적인 자기 비하 때문에 나타납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사야가 예루살렘의 처참한 상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채찍을 맞습니다. 그런데 채찍을 맞고 고통당하지만 누구 하나 애처로워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고통당하고, 죽음을 당하고, 벌을 받지만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 주신 말씀이 우리 시대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죄로 황폐하고 그 대가로 고통과 죽음을 당하고, 중한 형벌을 받지만 누구 하나 애처로워하지 않습니다. 죄로 대가로 받은 벌에 대하여 지극히 당연하다고 합니다. 슬퍼할 자 없고, 위로할 자 없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깨우치고 하나님의 품에서 위로 받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를 위하여 슬퍼하고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이사야 51:19에는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닥쳤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누가 너를 위로하랴”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극심한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위로자가 되시지만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난 것이 더 절망적 소식입니다.

  자신이 범죄로 멸망을 자초했으니 아무도 위로할 수가 없고, 하나님도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누가 너를 슬퍼하랴”, “누가 너를 위로하랴”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버려진 사람은 가장 슬픈 사람입니다. 아무리 아프고 고난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고통입니다.

  “토끼를 잡으려면 귀를 잡아야 하고,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아야 쉽게 잡을 수 있다고 하듯이 사람을 잡으려면 마음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잡을 수 없는 처절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잡기에는 너무 죄가 깊고 너무 늦은 예루살렘입니다.

  마태복음 5:4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울면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누가 너를 위로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울어도 위로하지 않습니다.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울다 지치게 된 이스라엘입니다. 버려져 보육시설에 맡겨진 아기들을 보면 울다 지쳐 잠이 듭니다. 아기 마음에 우는 것도 포기합니다. 누구도 자기를 안 봐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유아의 심리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이지만 자포자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아기들의 마음은 참 슬픈 일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는 위로받을 수 없으며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는 백성에게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3에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1:4에는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라고 합니다. 위로하심은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본능을 접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셨다는 것은 무서운 저주입니다.

  베드로전서 2:20에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합니다. 매를 맞아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이 매를 맞으면 동정하지만 죄 때문이라면 누구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 됐다고 조롱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포기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사람에게 포기 당하면 그 보다 더 큰 슬픔이 없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아직 기대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질투한다는 것은 아직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포기하면 분노도, 질투도, 싸움도 없어집니다.

  우리에게는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캔 블랜차드와 필 하지스가 함께 쓴 ‘예수는 어떻게 12제자를 위대한 리더로 키웠는가’라는 최근에 출판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우리를 진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붙잡아줄 수 있다고 합니다. 진실을 말해 줄 사람이 없다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옆에서 “시원하시겠습니다. 각하”나 연발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습니다”만 말하는 사람은 아부쟁이입니다. 이런 사람만 곁에 있으면 아주 쉽게 망합니다.

  부부는 이런 진실을 말해줄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부부 외에 누구도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부부는 언제나 솔직하게 진실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마음에 있는 고통을 진실 되게 들어주어야 하고, 내 속에 있는 말을 진실 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은 잘못하면 남의 편 됩니다. 남편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편네는 잘못하면 여러 편이 됩니다. 여편네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 슬퍼하고 진정 위로할 사람은 남편과 아내입니다. 그런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줄 때의 사랑만큼 온전할 때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관심을 기울이는 작업입니다. 최근에는 ‘골드 미스’와 ‘올드 미스’를 구분합디다. 여자가 나이 들도록 결혼하지 않지만 제법 돈이 있고 재력이 있으면 ‘골드 미스’라고 그래요. 그것도 없이 나이 먹은 여자를 ‘올드 미스’라고 합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골드 보이’, ‘올드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골드가 마음을 사고, 위로를 살 수 있을까요? 현대인들의 관심과 기대가 서글프기도 합니다.

  우리 곁에 진정코 슬퍼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죽으면 진정 슬퍼해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됩니까? 그런 사람을 꼭 만드세요. 그런 사람을 가급적이면 많이 만드세요. 이것도 의미 있는 인생의 한 방편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말 같지 않은 말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안 죽을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랍니다. 그러면 누구는 죽어도 괜찮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귀합니다. 반면에 “그 사람 잘 죽었다”는 말은 최대의 욕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도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윤장호 하사는 참 괜찮은 젊은이였습니다. 오래전 미국에 가서 공부도 잘 했고, 성품도 좋고, 부모에게 좋은 아들이었고, 예수도 잘 믿는 청년이었고, 또 참 잘 생겼습디다. 그런 병사가 외국에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되어 세상을 떠나니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안타까워하고 슬퍼합니다. 그의 죽음은 참 장한 죽음입니다. 참 좋은 죽음입니다. 그의 죽음으로 그 부대가 경계심을 새롭게 하여 다른 병사를 죽지 않게 만들어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슬퍼하는 죽음은 의인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이래야 합니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은 죽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에게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합니다.

  이사야 51:20에는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고 합니다. 도시가 황폐하고 자녀들이 그물에 걸려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가득합니다.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와 견책이 가득합니다. 위로하기를 좋아하는 하나님이 위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분노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용서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견책이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분노가 끝까지 찬 것입니다.

  이래저래 얻어맞고 터지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다가 하나님께 몰매 맞고 돌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탕자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타서 탕진하였습니다. 돈을 의지하다 돈을 잃었습니다. 친구 좋아하다 친구를 잃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돼지처럼 쥐엄 열매를 먹었습니다. 완전히 나락에 떨어져 지옥문까지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견책하셔서 다시 깨닫게 하시고 아버지의 집에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부드런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다”. 탕자가 되어 보는 것도 때로는 유익합니다. 밑창까지 떨어져 채찍에 맞고 회복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꼭 맞아야 정신 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맞고 정신 차릴래?” “안 맞고 정신 차릴래?” 하나님은 계속 하나님의 사람들을 견책하십니다. 우리는 맞기 전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대가로 큰 고기 배속에 들어가 사흘을 살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대가로 눈이 멀고 말에서 떨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대가로 구전에 의하면 닭이 울 때마다 울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보세요. 예수님을 팔고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빌라도에게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극악무도한 말입니까? 자기들만 피 값을 받으면 되지 왜 후손들에게도 돌립니까? 이런 조상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 대가로 1948년 독립할 때까지 국토 없는 민족으로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독립한 후에도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메시야를 죽인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2천년동안 자손 대대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죽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견책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스크루지 현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뻔했다가 다시 한 번 삶의 기회를 얻게 되면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목사님들도 보면 죽을 뻔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목회도 잘하고 열정이 있어요. 죽으면 안 되지만 죽을 뻔한 경험은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징벌이나 매도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8에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견책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없고 견책이 없으면 이미 잊으신 것입니다. 고개 돌리신 것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마태복음 17:17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보여주고, 함께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참겠습니까? 하나님의 답답한 심정을 말씀합니다.

  구약에는 ‘주의 날’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하욤 아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을 의미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지 않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심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견책이 지금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지구를 보세요. 여기저기서 기상 이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뜻한 겨울이 계속됩니다. 추운 여름이 옵니다. 사막에 눈이 옵니다. 만년설이 녹고 빙하가 녹습니다. 쓰나미로 죽습니다. 기근으로 죽습니다. 태풍으로 죽습니다. 화산폭발로 죽습니다. 지진으로 죽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견책을 느끼지 못합니까?

  7세기의 영성가 존 클리마쿠스는 주후 640년경에 동방교회의 고전인 ‘영적 상승의 사다리’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애통을 ‘영혼 안에 있는 황금 채찍’이라 불렀습니다. 애통은 채찍입니다. 우리에게 그 애통이 없으면 하나님의 채찍을 맞습니다.

결론

  영국의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대표시인 ‘인빅투스’(Invictus)라는 시가 있습니다. 라틴어로 ‘정복불능’이란 뜻입니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에는 “상관치 않으리라, 천국 문이 아무리 좁고 심판 명부에 온갖 형벌이 적혀 있다 해도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나니”라고 합니다. 인본주의 사고에 자기중심적 사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교만으로 가득 찬 인간의 허풍을 봅니다. 심판 날의 형벌이 초등학교에서 숙제 안 해서 맞는 회초리정도로 생각하는가 봅니다. 심판의 형벌은 영원한 불 못입니다. 헤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고통을 말합니다.

  스캇 펙은 ‘끝나지 않은 여행’에서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다. 사람들은 지옥에서 곧바로 걸어 나올 수 있다. 이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견책을 외면하고 지옥을 향하여 걸어가다가 하나님의 영원한 견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누구나 다 가지고 갑니다. 자신의 죄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견책을 깨닫고 죄를 벗고 가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견책을 외면하고 죄를 가지고 가는 것이 낫겠습니까?

  하나님이 슬퍼하심은 아직도 사랑이 남아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견책하심은 아직도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처럼 황폐한 이 나라와 우리 마음 밭이 하나님의 채찍 가운데 깨어지고 돌이켜서 새 예루살렘과 같은 새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채찍으로 다시 지어지고 다듬어져서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위로하시는 새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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