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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빗나간 신앙 바로 세우기 (요 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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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를 대로 메마른 사막 한복판에 물을 긷는 펌프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펌프 손잡이에는 깡통이 하나 매달려 있었고 그 속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편지의 목적은 메마른 사막 한복판을 헤맬 그 누군가를 위해 시원한 물을 계속 공급하여 주기 위한 방법을 적어놓은 중요한 편지였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이 펌프는 1932년 6월 현재 물을 낼 수 있는 완전품입니다. 지하의 물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용하려면 바짝 말라 있는 펌프를 먼저 적셔야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펌프를 가동 할 수 있을 만큼의 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펌프 곁에 흰 돌을 들추면 물이 들어 있는 병이 있을 것입니다. 물이 증발하지 않도록 마개를 잘해 두었습니다. 그 물은 겨우 이 펌프를 적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물을 붓고 펌프질을 해야만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 말을 믿고 이대로만 하면 당신이 필요한 만큼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했던 것과 같이 다시 병에 물을 채워 잘 봉한 뒤 처음 놓였던 바위 밑에 넣고 편지와 깡통도 다시 손잡이에 달아 놓으십시오.<추신>만일 목마르다고 병의 물을 먼저 마셔버리면 더 이상 펌프는 사용 할 수 없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죽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홀로 사막 가운데서 이 편지를 읽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우선 한 병의 물이 눈앞에 있고 그것을 마시면 나는 충분합니다. 더구나 그 편지의 내용대로 펌프가 작동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 한 병의 물을 잘못 부어버리면 당장 내가 목말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믿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때로는 확실한 보증도 없습니다. 믿을 만한 증거가 늘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마치 이야기처럼 이 편지에 씌어진 것을 믿어야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이리 저리 계산해보고 당장에 나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택해서 믿으려하거나 복잡한 또 다른 생각으로 믿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때로 값비싼 대가를 요구합니다. 물 없는 사막을 걸어 걸어서 목말라 허덕일 때에 한 병의 물을 손에 얻었다면 그 물은 생명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 병의 물을 그대로 마시면 안 된다는 경고가 마음에 잘 들어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한 병뿐인 생명수 같은 물을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한 병뿐인 물을 펌프에 부어 넣음으로 콸콸 쏟아져 나오는 생수를 얻게 되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목적성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야 됩니다. 신앙 안에서 동상이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곳에 각기 다른 꿍꿍이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목적만은 같아야 하는데 그 목적이 잘못되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 주일 마다 기도합니다. 봉사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도 있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늘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도 있는가하면 주님을 섭섭하게, 심지어는 노엽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 안의 모습들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 귀신을 쫓으려는 사람들, 개인적인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만원이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또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뜻으로 주님을 좇았다면 얼마나 고귀한 일이겠습니까 마는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그 목적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초막절 절기를 맞아 예수님께서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이르러 담대히 교훈을 베푸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정식 랍비교육을 받지 않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 의혹과 조롱의 눈길을 보내며 귀신 들린 자로 매도하기까지 합니다. 요7:20에 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목적이 달랐던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다양한 무리가 모여 있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 빗나간 신앙을 바로 세우는 말씀으로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절을 보게 되면 당시 예수님은 언제나 유대인들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던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11절에 보면 기회다 싶어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잡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교회 안에, 혹은 성도들에게서 무엇이든지 습관적으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문제없는 곳이 없습니다. 당연히 사람이 모인 곳에는 문제가 따라 다니기 마련입니다. 제도 중에도 문제없는 제도가 없습니다. 문제 있는 제도 아래서 문제 있는 인생들이 모인 곳이 세상이요, 그들이 구원받은 장소가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제도적인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행정적인 문제가 흡족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내 마음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그것도 사실은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안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 일수도 있거든요.

따라서 우리가 굳이 문제없는 곳을 찾는다면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것이 문제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바른 신앙 없이 교회에 나오면 냄새나는 구석만보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보일 리가 만무합니다. 성경이 어디가 틀렸나만 살피는 사람도 있고 교회만 오면 목사의 설교에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만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셍키비치(Henrick Senkiebich)]라는 사람은 성경이 얼마나 은혜로운 책인가 하고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어디가 틀렸나하고 찾아내기 위해 열심히 성경을 읽은 사람입니다. 찾아내서 반드시 밝혀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반복해서 읽다가 틀린 데는커녕 그만 완벽하고 은혜로운 성경에 그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감동을 글로 썼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쿼바디스]입니다. 다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의도적으로 예수님과 성경과 하나님을 물고 늘어지는 나쁜 습성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불신하고, 신앙을 죽이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살기(殺氣)를 없애야합니다. 그 마음속 불평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둘째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수군거리며 논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모이기만하면 수군거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강한 자의 편에 서기 쉽습니다. 군중의 여론이란 때로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흥미와 호기심에서 객관성을 잃고“와!”하고 밀려 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군중은 토론하기를 좋아합니다. 본문에서도 보듯이“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아니다 나뿐 사람이다.”혹은“현혹케 하는 사람이다, 아니다”하고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언제나 흥미 위주로 와글와글 수군거리며 토론하는 것이 군중들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떠들기만 할 뿐 결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위험한 것은 신앙이 군중 심리적이 되면 아주 위험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란 토론의 대상입니까? 고백의 대상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고백의 대상입니다.

즉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들어보십시오. 17절입니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단지 배우고 동경하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호기심이나 탐구심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알리라”즉 행하려고 하면 알게 된다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문제입니다. 수군거리고 토론하고 하는 것으로 중심 없이 이리저리 헤매지 말고 생사의 결딴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맡기고 생명을 걸고 성경을 읽어야 하고 순종해야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문제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힘든 부분이 십일조의 문제 일 것입니다. 사실 수입을 다 써도 모자라는데 십분의 일을 바치라니 참 곤란합니다. 그래서 이 십일조 때문에 교회 안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고 교회에 나오더라도 제대로 십일조 생활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또 교회 나오는 분들 중에도 십의 0.5조 정도로 십일조의 형식을 갖추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십일조라는 것은 해 보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어떤 분이 이런 간증을 합니다. 신앙생활 20년이 넘도록 십일조를 내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자기와 같이 믿었던 한 친구는 믿는 날부터 꼬박꼬박 정확한 십일조를 바쳤답니다. 20년 후에 가만히 보니까 십일조를 20년 동안 바쳤다고 못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처럼 바치지 않았다고 그것이 20년 동안 적금이 되어서 잘 사는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십일조를 이행하지 못한 자기의 신앙만 손해를 봤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교회 다녀야 될 줄 알면서도 50이 넘도록 나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50이 넘어서야 교회에 나왔습니다. 젊었을 때 교회에 나가는 것이 좋은 일인 줄은 알았지만 일주일 내내 일을 해도 모자라 주일 날 하루 쉬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고 여기며 이제야 교회에 와보니 자기가 손해났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씩 당당하게 쉬고도 저만큼 사는데 자기는 놀지도 않고 일했는데도 결국은 같은 수준에 와 있으니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 일한 만큼은 손해라는 것입니다. 늦게나마 똑똑하게 계산 한 것이죠. 여러분“행하려 하면 알게 되리라”는 말씀이 이래서 진리입니다. 신앙은 수군거림도 아니요, 논쟁도 아니요. 순종하고 믿는 것입니다. 먼저 믿고 행하게 되면 깨달아 지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농담 중에<뿌려지는 크리스천(Sprinkling Christian)>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유아세례를 받을 때 물을 뿌리고, 결혼식 때 신랑 신부에게 쌀을 뿌리고, 죽고 난 다음에 하관식 때 흙을 한 줌씩을 뿌리는 이 세 번외에는 교회와 등지고 사는 사람들을 뿌려지는 교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보다 더 심하여 유럽에는<네 바퀴 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네 바퀴만 타고 교회에 오는 신자라는 뜻입니다. 유아세례를 받기 위해 어머니가 이끄는<네 바퀴 유모차>를 타고 오고,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네 바퀴 자가용>을 타고 오고, 죽어서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네 바퀴 영구차>에 실려 목사 앞에 오니 일생에 겨우 세 번 교회에 나오는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런 사람이 없을 줄로 압니다만 이런 정신과 이런 자세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면 역시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빗나간 신앙에 매달려 매사에 꼬투리나 잡고 말로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수군거려 잡으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또 같은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예수님을 찾습니까? 무슨 목적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적이 빗나간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마음과 온전한 뜻으로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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