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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좋은 친구입니까?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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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좋은 친구입니까?
막2:1-12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일 북한 동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금식헌금을 정성껏 모았습니다. 약 300만원 조금 못 되게 헌금이 되었습니다. 전염병과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는 북한동포를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랑과 정성을 기억하시고 더욱 좋으신 것으로 채워주시며 더욱 풍성한 사랑의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정성껏 드리신 헌금은 북한동포 5400명의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귀한 물질로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드리신 헌금은 북한 선교단체인 굿 미션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빈 S. 샤르마의 “나를 찾아가는 여행” 이란 책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친구는 우리의 인생에 유머와 매력, 그리고 아름다움을 더해주지.  친구와 함께 배꼽을 잡고 웃는 웃음만큼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 것도 별로 없네. 친구는 자네가 독선에 빠져 있을 때 겸손하게 만들어주며,  지나치게 심각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미소를 짓게 만들지.  삶이 자네를 속이고 상황이 악화될 때, 좋은 친구는 자네를 도와주는 존재라네.” 

저는 친구들을 참 좋아합니다.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폭넓은 친구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할 때도 거의 단 둘이 만난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늘 친구들과 함께 만났던 것 같습니다. 때론 그것이 제 아내에게는 불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친구가 많은 것보다는 좋은 친구인 것이 더 귀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친구들이 내게 좋은 친구들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반면에 저는 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좋은 친구이니?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과연 좋은 친구인가? 친구들을 좋아하는데 그 친구들은 나를 좋은 친구로 여겨줄까? 이것이 더욱 제 가슴속에 깊이 들려오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친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17:17입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4)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친구들을 향해 사랑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가고 있는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하고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의 모습이 더욱 크게 느껴져 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져있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자기를 더 사랑했지 친구를 사랑하기보다는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제가 좋은 친구가 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좋은 친구가 되기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제가 좋은 친구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다짐해 보았습니다. 

제가 어린 아이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드릴 때마다 빼지 않고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가 복된 만남의 축복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좋은 친구도 만나게 하시고 좋은 스승도 만나게 하시고 좋은 환경도 만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이 아이가 가는 길에 돕는 자들이 많아지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제부터 저는 그 기도를 하면서 또한 덧붙이기를 원하는 기도가 생겼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아이가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너는 누군가의 좋은 친구가 되라고 축복하며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몸을 가눌 수 도 없는 상태입니다. 뇌출열로 그는 그만 몸이 마비되는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그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의 기쁨을 누리며 저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것은 바로 그의 친구들이었습니다.
4명의 친구들은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는 절망 속에 죽어가는 그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많은 고통 받는 자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날도 가버나움이란 마을을 다시 방문하시게 되었는데 4명의 친구들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고통 속에 있는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마침내 문 앞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두절미하고 친구들이 환자를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이 고쳐주셨다.
이렇게 짧게 기록할 수 도 있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비롯한 복음서들은 이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일들이 쉽게 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 그 과정은 복잡하고 어려울 수 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삶에 거침없이 부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때로 그 사랑과 은혜의 과정이 쉽지 않고 때로 복잡하고 어려울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보고를 여시고 그냥 한꺼번에 부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경우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꼭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어려운 과정들을 통해 우리의 노력과 믿음을 시험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색하시거나 복을 주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에게 복잡한 과정을 주시고 어렵게 일을 만드시는 이유는 우리를 시험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열정과 사랑을 확인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더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4명의 친구들은 쉽게 물러설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다음에 오지 할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시간과 여유가 없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는 친구는 시간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시만 늦어도 그는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곧 4명의 친구들은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의 집은 지붕을 조금 힘쓰면 거둬낼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친구들은 환자의 침상도 지붕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집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누군가 지붕을 뜯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장이 뚤리더니 하늘이 보였고 줄에 달려 침상이 내려오는데 거기 사경을 헤메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선포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선포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의 선포는 곧 생명의 역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생의 질고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선포하시면 그들의 모든 질고의 문제는 해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아이를 향해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 말씀하시는 대로 무화가 나무가 뿌리채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중풍병자를 향해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중풍병자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조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에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그 말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모든 묶인 자들을 향해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묶인 것들이 풀려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함께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기록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음, 사랑(다같이)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분이십니다. 자기 목숨을 버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분이십니다. 모든 묶인 자들을 풀어 자유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눅4:18-19에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 모든 인생 문제의 길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로 와야만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만을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 인생의 궁극적인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자이십니다.

중풍병자의 문제를 우리는 육신의 문제로 바라 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혼을 바라보았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저주와 죽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의 문제를 주님은 바로보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중풍병자를 향해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혼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겪는 질병과 가난과 절망과 고난의 문제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깊이 관심 갖어야 할 것은 죄 된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의 길과 방법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자 되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또한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묶인 자들을 풀어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께로 불쌍한 영혼들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만나 구원의 기쁨과 감격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좋은 친구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주고 고통 받는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로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십시오. 예수님께로 친구들을 인도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좋은 친구입니다.

두 번째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메시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지붕위에서 달아 내리는 친구들을 보셨습니다.
외모를 모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은 능히 중풍병자를 일으키신다는 믿음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은 분명합니다. 예수께로 가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이 친구의 살 길은 예수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침상채로 환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어떤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4명의 친구들은 사람들의 장애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 주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믿음은 장애를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벽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벽을 넘어가든지 돌아가든지 안 되면 부수고 가면됩니다. 장애는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지 절망하고 포기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쳐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지나가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게 하는 장애가 그에게는 많이 있었습니다.
첫째 장애는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이고 둘째 장애는 거지라는 사회적 장애이고 셋째장애는 많은 군중들이 가로막고 있는 물리적 장애였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그 장애를 넘어섭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입니다. 주님은 나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실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분명하니까 바디메오는 장애가 많음에도 소리쳐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장애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믿음만 분명하다면 어떤 장애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분명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장애를 넘어서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친구는 분명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게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메시지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4명의 친구들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들이 사랑하는 마음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그들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시간을 헌신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비난까지도 친구를 살리는 일을 위해서는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붕을 뜯을 때에도 어떤 댓가라도 지불하리라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했고 기꺼이 손해 볼 생각도 하게 했습니다.

좋은 친구는 사랑을 행하는 친구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사랑을 넘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랑이 좋은 친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물질을 내고 때로는 오해와 비난까지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으로 고통을 당한 친구를 사랑하는 친구들의 사랑은 친구의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시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과 행동으로 좋은 친구가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의 기회들을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당신은 좋은 친구입니까?”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좋은 친구가 되십시오. 여러분이 누군가 나의 좋은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2007년 우리교회가 하고 있는 1511운동의 마지막 성공은 전도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친구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으로 이 운동은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친구가 되어 꼭 해야 할 것, 그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전도 하십시오. 보혜사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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