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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의 모범자 (행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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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력서를 봅니다. 이력서를 보면 학력, 경력, 출신, 고향, 가문을 알 수 있어서 개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소개되는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식대로 소개를 했습니다. 이 소개가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고넬료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환경으로 보면 안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 기사를 쓰고 있는 저자 누가의 의도는 아주 특색이 있습니다. 왜 사도들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다가 고넬료의 스토리가 나오느냐, 고넬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고자 하는 그 의도를 읽어야 됩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로마사람입니다. 그리고 직업군인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 흔히 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이것은 고넬료에게 있어서 특출한 예입니다. 

  환경을 넘어서는 믿음

  고넬료가 신앙생활을 하던 이 시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핍박이 심했던 네로황제의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는 네로황제의 환난이 지나가고 도미시안 황제의 환난이 계속되는 시점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크리스찬들을 무참히 죽이는,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핍박자로 등장하는 네로황제 때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했다 라는 것을 전제하고 보아야 합니다.

  요즘 시한부 종말론에서 많이 떠들고 있는 ‘666이론’이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데 이 이야기가 로마의 네로황제와 직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학자들이 요한계시록 13장을 해석하면서 ‘짐승’은 사람이나 국가로 말합니다. 사람을 말할 때도 짐승이라 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국가와 그 통치자들을 짐승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이 짐승은 성경해석학자들이 거의 이의가 없이 네로와 로마의 권력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용’은 마귀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짐승에게 용이 권세를 주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귀가 네로에게 권세를 주는 것입니다. 네로가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힙니다. “또 다른 짐승이 나타나니 그도 앞의 짐승과 같이 행하더라” 여기서 ‘또 다른 짐승’은 네로가 죽고 난 다음에 등장한 로마의 황제, 도미시안이라고 적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666을 해석하면서 신용카드, 컴퓨터, 바코드다 라는 소리를 합니다. 컴퓨터라는 알파벳을 로마표기로 해보면 666이 나온다 라는 계산도 있는데 이것은 다 엉터리 이야기입니다. 666은 신용카드도 아니고 바코드도 아닙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6’자가 들어가는 차도 안탑니다. 6자가 재앙의 수다 해 가지고 6자를 기피합니다. 666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게 “짐승에게 표를 받은 자다”라는 이 말은 짐승을 섬겼다는 말인데 그 짐승은 로마황제입니다.

  로마시대에 로마사람으로서 로마의 영토 안에 살려면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전에 가서 황제 앞에 제사를 지내야 됩니다. 황제 앞에 경배한 사람에게는 표를 줍니다. 그 표가 없이는 시장의 상거래를 못합니다. 즉 의식주 생활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 표를 받은 사람의 수가 666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을 섬긴 사람들이 666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저주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볼 때는 정확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보아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이 왜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쓰느냐? 이것은 그 당시에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도 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한 짐승이 나타났으니” 이것을 “네로가 나타나서 교회를 핍박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사도 요한은 성경기록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짐승이 나타났으니” 이러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지 다 압니다. 그러나 네로나 로마사람들은 저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눈치를 못 채는 것입니다.

  네로라는 글자를 로마표기로 환산하면 666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666은 짐승의 수요 그 짐승을 숭배한 사람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요한계시록의 용어가 어렵다는 것은 그 당시에 핍박자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이 은유적으로 비유해서 교회와 사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성경을 표기하게 한 성령의 지혜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가이샤라에 와서 유대총독의 관저에 와서 경호하는 군인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로마의 군인이면 당연히 황제를 숭배해야 되는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은 알 수 있는데 그런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우리가 고넬료 스토리를 보아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

  고넬료의 믿음은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신앙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자기만 하나님을 경외한 게 아니고 “그의 온 집이 여호와를 경외했다”라고 소개를 합니다. 성도들이 이력서를 영적으로 제출할 때는 고넬료처럼 이런 이력이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온 집이 하나님을 섬기는 집이다’ 얼마나 귀한 이력입니까? 그 자식뿐 아니고 그의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이 집을 이 시대에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가리켜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된 사람이다”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와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으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 구제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로마사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는 로마군인이지만 지금 유대땅에 와서 살고 있는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총독을 섬기는 백부장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속국 식민지 백성들을 구제하고 있다는 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들려왔습니다.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시몬의 집에 들러서 베드로라 하는 자를 만나라 그리고 그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고넬료가 계시를 받는 이 장면을 보면 그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고넬료가 기도한다고 하는 이 영성을 우리가 두 가지로 주목을 해야 됩니다.

  그는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그 당시 식민지 환경에서는 대단한 권력자입니다. 그가 세상적으로는 권력의 사람이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사는 중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영적인 갈망이 있기 때문에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문제입니다. 내 안에 영적인 갈망, 은혜를 사모하는 열정,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나아가는 이 열정은 남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입니다. 이 열정을 가진 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항상 영적인 은혜를 갈망하는 중심, 그것을 가지고 그는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간 것입니다. 혼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독부 안에서는 기도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신우회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 응답은 무거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이 사실 앞에서 오늘 고넬료가 보여주는 두 가지 전후의 영성과 연결성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중심에는 항상 여호와를 향한 영적인 갈구, 영적인 열정이 식지 않도록 늘 우리의 영성을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되고 기도하는 결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기도 중에 들리는 게 아니라 내가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 들리는 것입니다.

  그는 그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베드로를 청하는 일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래서 고넬료 가정에 놀라운 부흥회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 그는 홀로 베드로를 맞이한 게 아니라 일가와 친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성령이 강림하여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라고 했습니다.

  고넬료의 헌신

  고넬료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가 백부장으로서 혼자 신앙생활을 하고 은혜받고 끝난 삶을 산 게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되는 놀라운 사실을 열어준 역사적인 모델로서 하나님이 고넬료를 쓰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시간적으로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10장까지는 유대주의자들은 전혀 복음에 대한 이해를 못하고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대부분이 이방인 전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주의자로서 고집불통의 사람입니다. 이방인에게 가서 전도한다는 것은 상상을 못합니다. 이방인은 하나님께 버려진 자들이고 저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전도할 대상에서 아예 제외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생각도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9장에서는 사울을 하나님이 항복시켜서 미래에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려고 작업을 착수해 놓고 10장에는 베드로라는 이 고집불통의 편견과 선입견과 그 모든 유대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고넬료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하나님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먼저 하나님이 굴복시켜 놓고 그 다음에 사울을 굴복시켜서 베드로가 이방인전도에 앞장서는 주체자가 되도록 하나님이 만들기 위해서, 훗날에 바울이 이방선교를 하러 갈 때 베드로가 협력하도록 하나님이 예비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 처음에는 안 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보자기를 내려 주었습니다. 그 보자기에 더러운 짐승, 벌레들이 우굴거렸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고 잡아먹으라고 했습니다. “주여, 이 더러운 것을 어떻게 먹습니까?” “아니다. 잡아먹어라.” 그 계시는 유대인들이 벌레처럼 취급하는 이방인들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그곳에 성령의 강렬한 역사가 임함을 보고 그곳에서 세례를 베풂으로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전해져야 한다는 거룩한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고넬료와 베드로가 함께 동원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는 복음증거이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로 까지 가야 됩니다. 성전건축은 축제하고 입당잔치하고 헌당잔치하는 그런 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철저히 방편입니다. 이것은 하드웨어입니다. 교회의 소프트웨어는 구원을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예배당만 짓는 그런 신앙생활만 하면 안됩니다. 예배당은 가능하면 빨리 끝내야 되는 수단적인 사역입니다.

  그러나 영구히 하나님의 교회가 항상 관심을 가지고 이루어가야 할 일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영구적입니다. 계속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성전건축입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여호와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바쳐지는 것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넬료의 이 사역은 이방인 고넬료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방선교의 기원을 이루는 놀라운 일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한 사람의 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을 깨뜨리시는 그 일에 고넬료를 하나님이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이부능선

  어느 대학교 총장님의 특강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의 현상을 진단하면서 “대한민국은 팔부능선을 넘은 민족이다. 나머지 이부능선을 넘기가 대단히 어렵고 쉽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선진국이 되려면 나머지 이부능선을 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팔부능선이 무엇이냐? 경제적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사실 팔부능선에 도달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10위의 무역국가입니다. 이 지구촌에 얼마나 나라가 많습니까? 우리보다 큰 나라, 인구 많은 나라,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전통과 문화가 앞선 나라가 많은데 우리의 경제력이 지금 세계 10위안에 들어간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이부능선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부능선은 사회적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신뢰, 친절, 정직 이런 면에서 우리는 결코 선진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분야에 정의가 실현되려면 아직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부능선을 극복해야 되는데 이것을 안 하면 결코 선진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지금 입고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고 이부능선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직, 부정부패, 권위주의, 온갖 것들이 지금 이부능선에 다 걸려 있습니다.

  이 분은 지금 학자로서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저 마음에 주어지는 그 개념은 오늘 우리 신앙생활이 벌써 팔부능선까지 도달했는데 나머지 이부능선을 못 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이부능선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권위주의가 굉장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부정부패가 여기 저기서 보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여기 저기 붉어져 나옵니다. 교회의 예산이 모자라고 교인들의 경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팔부능선은 호화롭게 가고 있는데 영적으로는 영양실조가 되어 가고 이부능선에서 지금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등산을 해보면 팔부능선까지는 누구나 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이부능선이 힘듭니다. 히말리야의 십사자를 등정한 염홍철씨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40미터 남은 그 정상이 베이스캠프까지 올라오는 그 힘보다도 4백미터 남은 마지막 코스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베이스캠프까지는 모든 등산인들이 다 올라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능선, 이부능선은 아무나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야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넬료는 아무나 못 올라가는 이부능선을 올라간 신앙인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일에 감사하는 것은 팔부능선 신앙입니다. 좋은 일 있는데 누가 감사를 못합니까? 그러나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감사가 우러나오는 그 신앙이 이부능선에 이른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성전건축은 팔부능선 신앙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팔부능선은 아무나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신앙은 그런 팔부능선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환경인데도 믿고 있습니다. 아무나 못하는 것을 해내는 것이 바로 이부능선을 돌파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개념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쓰시고 역사를 이루어간 신앙인들은 모두 이부능선을 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세속적인 개념 하에서도 이런 원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전도자입니다. 그는 모범 전도자입니다. 그를 통해서 이방선교에 문을 열게 하신 하나님, 그를 통해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뻗어가는 대 역사를 이루게 하는 일에 고넬료를 하나님이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지도자들

  제가 오래 전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를 보면서 모택동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모택동이 6․25동란 때 중공군을 보내서 이 나라 전쟁이 얼마나 힘들었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습니까? 우리가 볼 때는 원수입니다. 그러나 모택동이라는 사람을 정치 지도자의 관점으로 보면 배울 게 너무도 많은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왜 모택동이 죽었는데도 등소평 시절에 등소평 사진이 안 걸리고 장쩌민 시절에 장쩌민 사진이 거기에 안 걸리고 모택동 사진이 걸리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뉴스를 볼 때 그것을 보면 아마도 중국역사가 있는 한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 초상화를 대신할 사진은 안 걸릴 것입니다. 그 사람 사진은 영구히 걸리지 싶습니다. 왜 이 사람이 그토록 중국 사람들에게 위대한 지도자냐는 것입니다.

  그는 중국사람들 앞에 의식주를 약속한 희망을 선언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의와 식은 해결했다고 평가를 하는 지도자인데 주(환경)는 그렇게 변화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택동이 중국 사람들 앞에 영웅시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한국동란 때 자기 아들을 파병해서 그 아들이 전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어느 나라 지도자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수십만명의 중국군대를 전쟁터에 보내면서 모택동은 자기 아들도 섞여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안전한데서 복무하도록 하지 않고 일선에 나가 전사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장기집권을 하고 한 평생 정권을 잡은 정상에 있은 사람이지만 그가 죽고 났을 때는 입은 옷 외에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택동이 중국 사람들 앞에 존경받는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청문회를 해도 흠이 없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등소평에게 중국을 맡겼습니다.

  등소평은 블란서에서 공부한 세계화된 인물입니다. 그는 개방과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중국의 심천이라는 도시는 모택동이 전형적으로 개발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이 등소평도 그렇게 권력을 누리고 갔지만 그도 재산하나 남기지 않고 간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장쩌민이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장쩌민은 상해시장이었습니다. 그가 그 때에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고 상해도 위험했던 상황에서 그는 상해를 보호하는 일등공신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계속 개혁과 개방을 추구해 가면서 2008년 올림픽을 유치케 하고 지금 후계자에게 거의 모든 자리를 물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이렇게 자신합니다. 2008년 올림픽을 치르는 것을 계기로 이 지구촌의 최고의 나라로 도약할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이징 거리에는 자전거 홍수이던 거리가 장쩌민이 정권을 잡고 난 이후에 자동차로 물결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쩌민도 자기를 위하여 부를 축적한다는 스캔들은 한번도 뉴스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거대한 중국을 움직이는 지도자들,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부능선을 통과한 지도자들입니다. 불과 10년 안팎의 권력 앞에 그렇게 부패해지는 수많은 지구촌의 지도자들 속에서 이들은 찬란하게 중국역사 속에 존경받고 있는 지도자들입니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그 위대한 사람들처럼 이들은 중국을 움직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택동이 자기 아들을 파병시켜서 전사케 한 일, 그러나 그 결과 재산 하나 없이 살고 간 모택동의 그 위대함 앞에서 중국 사람들은 천안문 광장에 초상화를 걸어놓고도 아무도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부능선을 넘는 신앙인을 요구합니다. 모택동이 중국에 있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지도자라는 그들의 평가를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감히 옆에 따라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부능선을 넘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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