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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일에 힘쓰는 그리스도인 (딛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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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무슨 기차 승차권을 구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기차는 승차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선량한 사람인지, 악한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 사람이 어떤 위인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 21장 27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사람의 자격에 대하여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며,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과 거리가 먼 자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이 먼저이고, 올바른 행실은 그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에 힘써야 하는 이유와 선한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5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구원의 조건 가운데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면 구원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으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선한 일에 힘쓰라는 이 명령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선한 일에 힘쓰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3절에 보면, 우리의 구원 받기 이전의 상태에 대하여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고 진술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어찌 선한 행위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상태를 벗어나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선한 일을 행할 자질을 갖춘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계셨는데, 하루는 목사님 댁을 방문했다가 마루 밑에 버려진 깨어진 놋 요강을 보고 “목사님, 저것 나에게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엿 장수에게 주고 엿이나 바꾸어 먹으려면 모를까, 다 깨진 놋 요강을 달라고 하니까 의아했습니다. “장로님, 그까짓 깨어진 요강을 무엇에 쓰시려고 그럽니까?” “아무 말씀 마시고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가져 가시지요” 얼마쯤 지난 후에, 그 장로님이 목사님 댁을 찾아와서 반짝반짝 빛나는, 놋으로 만든 밥그릇과 국그릇을 내놓았습니다. “장로님, 이게 웬 그릇입니까?”  “목사님, 이 그릇을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은 일전에 제가 달라고 해서 가져간 깨어진 놋 요강을 녹여서 만든 것입니다”

깨어진 놋 요강은 폐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녹여서 그릇을 만들면 거기다 음식을 담아 먹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하지만 죄인이었던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위대한 변화입니다. 놋그릇은 처음에는 광택이 나고 신선한 느낌을 주지만 세월이 지나면 녹이 쓸고 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경험한 변화는 질적이고 근원적이고 영구적인 변화입니다.

나무의 예를 들어 보면,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인 것과 같습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는 원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원 나무와 상관이 없고 참감람나무의 가지로서 살아갑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공중 권세 잡은 자 마귀에게 속해 있었으므로 하나님과 원수였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로 말미암아 마귀에게서 놓여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우리 자신의 신분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선한 일에 힘써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내용은,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6)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무는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열매는 우리의 행실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선한 행실을 보아서 그가 선한 사람인 줄을 알 수 있고, 악한 행실을 보아서 그 사람이 악인인 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행할 선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일러줍니다. 먼저,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명했습니다.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라고 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나라의 법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쓰고 준비하라고 명했습니다.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라고 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우리는 즉흥적으로 마음이 내키면 선한 일을 하는 수준을 벗어나서 매일같이 선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수지침을 배우고 있습니다. 또 한 분은 미용기술을 익히고 있는데, 그것은 농촌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곧 남을 중상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투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훼방과 다툼은 둘 다 입으로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에 파수꾼을 세워서 무익한 말을 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다툼을 피하려면 관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관용하며” 라고 했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 때문에 기분 상하는 일을 자주 만납니다. 그럴 때 “저 사람에게 바쁜 일이 있나보다. 그럴만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면 화를 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너그럽게 봐 주는 것이 관용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고 명했습니다. 온화하고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격언이 있듯이, 내 쪽에서 먼저 부드럽게 대하면 상대방도 부드러운 언행으로 나오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과연, 현대는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타주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흔히,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여고 1학년 학생이 쓴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공부를 자기 자신을 위해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 같습니다.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확실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식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좀 더 많은 사람이 작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이 공부를 하는 값진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패할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채찍질 할 것입니다”

어린 학생이지만 그 생각이 너무나 선량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산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한층 더 밝아질 것입니다. 이는 공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돈 벌어서 남주냐?”고 할 것이 아니라, “돈 벌어서 남 주자”고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이므로 내 마음대로 쓰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 예를 들면 독거노인들, 소년소녀 가장들, 장애인들을 돕고, 제 3 세계에 사는 가난한 아동들과 결연을 맺어 후원비를 보내고, 외국 오지에 가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후원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보화를 천국에 쌓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의의 열매가 가득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에 힘쓸 때 무슨 결과를 얻게 되는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선한 일에 힘쓸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사회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기에 선행에 힘쓸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반대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불선한 일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하신 로마서 2장 2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별 수 없네요.” 라고 비방할 빌미를 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언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불신 이웃들은 기독교인들을 자기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기보다는 한 단계 차원을 높여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기독교인을 더 혹독하게 비난합니다. 화를 내면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불신 이웃들이 그만큼 기독교인들에게 높은 기대를 갖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당신들은 우리와 달리 선한 삶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 이웃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저들은 우리를 보면서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와 달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화와 다툼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화해의 분위기를 만들어낼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할 때 믿지 않는 가족이나 동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한 일에 힘쓸 때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경험에 의하면, 예수 믿는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본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신 이웃들 가운데는 예수 믿지 않는 이유를 자기들 집안의 평판이 좋지 않는 기독교인 아무개 때문이라고 핑계 대기를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는 아무개가 어떻기 때문에 믿을 생각이 없다”는 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불신 가족이나 친지로부터 비난을 듣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신앙 외의 일로 비난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중 아무개가 교회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 일가친척에게는 그렇게 무심할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의 말을 액면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심각하게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만일에 그 기독교인이 일가친척에게 후히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 때문에 기독교를 배척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자연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 간에 전체 그리스도인을 대표하고 전체 기독교를 대표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믿지 않는 가족 앞에서 전체 그리스도인을 대표합니다. 직장에서도 믿지 않는 직원, 동료들 앞에서 전체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내 편한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친구, 동료들이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을 열어 말로써 전도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무언의 전도를 하는데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행할지라도 선한 행실은 빛과 같아서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빛은 자신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더라도 빛의 본질상 그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이 자기를 자랑할 목적으로 선행을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독교인의 수가 일천만을 헤아리지만 한국 교회의 초창기에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사를 읽어보면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서, 3.1운동 당시에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되었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는 국민의 2%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당시 기독교인들이 실천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독립 운동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기 힘썼으므로 어디서든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의 정직성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일치하는 삶을 통해서 전도가 이루어져 오늘날과 같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에 힘쓸 때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36년 간 갖은 수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으나 좌익과 우익의 사상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고, 드디어는 남북이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곧 이어서 6.25 한국동란이 발발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실종되었고, 산업과 생활 기반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1953년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4.19와 5.16을 겪었고, 군사독재 시대가 무려 25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광주사태도 독재시대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방금 소개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심성이 피폐해졌고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여기에다 조상 대대로 물려오던 가난을 청산하겠다는 일념으로 온 국민이 경제에 매달려왔습니다. 그 결과,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2006년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6천 달러가 되었습니다.

선진국에 비하면 차이가 나지만, 지금 이 정도도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온 국민이 경제 일변도로 살다보니 사람들이 경제 이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나 깨나 돈벌이에만 힘을 쏟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윤리 도덕이 추락하고 따뜻한 인정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잘 사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각박하고 살벌해졌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키느라 많은 물질을 투자하지만 가정교육은 과거보다 후퇴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적어도 현재 대한민국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과연 한국인들이 현재와 같이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여러 나라를 다녀보아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예의가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 노인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말하기를 “젊은 사람들이 바쁘고 활기를 띠는 건 대한민국도 세계 일류 수준으로 갔지만 노인들의 모습은 선진국들과 다르다”고 했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요즘 노인을 공경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될까요? 아이들, 청소년들은 브랜드 의류가 아니면 입지 않으려 하지만, 노인들의 옷차림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지만, 한국인들의 도덕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인들도 경제일변도로 살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 나갈 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일을 맡을만한 세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가들은 물론 신용할 수 없지만, 경제인들이나 교육가들도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렇다고 미숙한 젊은 학생들에게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가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초창기 우리 선배들의 신앙자세를 본받기만 한다면 이 일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변화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지 않더라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간다면 작은 물줄기가 모여서 큰 강을 이루고 대해를 이루듯이 이 사회와 이 민족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성과를 이루어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꺼번에 같은 마음을 품고 실천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이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새롭게 변하면, 그로 인해 우리 가정이 새롭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새롭게 변하면 우리의 친지들의 가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어 이 변화에 동참하는 가정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뚜렷하게 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변화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지만,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레 일상적인 삶에 변화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새롭게 바뀌게 되는데, 그 변화가 그토록 크고 본질적이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변화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삶 속에서 선한 일에 힘쓰는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선한 일에 힘쓰심으로 어둔 세상을 밝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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