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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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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희 교회를 처음 찾아 나온 성도님들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반갑고 환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새로운 식구들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저는 요즘도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면 매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아마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주변에 스쳐가는 많은 사람을 볼 때도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여전합니다. 우리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힘들고 어려워하는 마음의 소리가 느껴집니다. 사람들 많이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혼자 많은 말을 하는 사람들, 또 사람들에게 매우 공격적인 어조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 매우 고독하거나 마음의 상처가 깊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또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이 어디 우리 주변의 일부가 아니라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 이렇게 마음에 상처도 있고, 쓸쓸함도 있고, 또 힘겨워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의 정이라는 것은 아파하고 어려워하는 사람을 보면 더욱더 감싸주고 위로해주고 보호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성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세상 살다보면 자꾸 마음에 날이 서고 뾰족해지고 또 상황조차 제대로 극복이 안 되니 그것을 다스리지 못해서 마음이 몹시 심란하고 괴로워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 이 시간 앉아계신 분들 중에서 나도 사는 게 참 어려워 뭔가 내 마음 호소도 하고 싶고 그냥 가슴에 답답한 마음 후련히 쏟아놓기라도 했으면 좋겠어하는 마음이 계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저희를 잘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사는 것이 무척 힘겹고 어렵다 하고 생각하시면 바로 주님께서 부르신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어디 여러 가지 삶에 필요한 경제적인 일, 혹은 가정의 일만 그렇습니까? 여러 가지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가장 가까워야 될 관계 같은데 담이 있고, 서로간의 이견이 나오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가장 가까워야 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정말 가장 먼 사람처럼 느껴지고 어떤 때는 가슴에 큰 아픔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 것입니다.
형제와 자매 사이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일터에서 만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도 그렇고 심지어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작은 모임에 까지 인간사에 갈등이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왜 살기도 힘들 때 이런 관계 속에서도 힘들어야 하나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을 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들은 주님 앞에 와서 쉼을 얻겠다고 했으니 그런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오늘 주님 앞에 잘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많은 일들 중에 오늘 특별히 ‘나는 무거운 짐이 있어. 수고하고 애쓰는 것은 나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어.’ 라고 생각하는 삶의 궁핍과 어려움을 느낀 모든 사람들은 이 자리에 합당히 오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주께 오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삶이 외롭고 고적하다고 느낄 때, 마치 광야에 혈혈단신으로 홀로 서있다고 느낄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짓눌려 내 두 다리로 대지 위에 버티고 설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주님은 우리들에게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초췌한 모습이라도 괜찮습니다. 눌려 지친 모습이라도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와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목사의 심정으로 보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 주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가엾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스치는 모습 속에서 고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허덕거리고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와도 두 손에 쥐는 것 없이 축 처진 어깨를 가지고 벨을 누르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정말 애처로운 삶의 모습이 우리 삶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래도 좀 낫게 사는 사람은 가진 것이 많고 이룬 것이 많다기 보다는 마음에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자는 마음,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대부분 많지 않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발에 걸리면 냅다 한 번 내질러보고 허공에 빈주먹이라도 날려보고 싶은 이와 같은 갑갑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런 사람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당시에 유대인에게 이 말씀을 전하실 때는 유대인들은 당시에 지지 않아도 될 율법과 유전의 멍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사,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지키지도 못하는 이와 같은 법들을 강요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지지 못할 율법의 짐을 지고 죄책감과 마음의 갈등과 늘 무거운 심정에 짓눌려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쉼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과 그리고 유전에 대해 무게의 짐을 지고 있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진정한 삶의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그들을 초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하는 우리의 무거운 짐은 무엇입니까?
살아가면서 느끼고 살아가면서 져야 하는 무거운 삶의 짐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무거운 짐이 있고 예수를 믿지 못한 사람도 무거운 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질척거리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 버는 것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까?
돈이 없어서 마음이 불편하십니까?
비교 속에 느끼는 열등감 때문에 늘 마음이 답답하십니까?
자랑하고 빼어나고 싶은데 그런 성취를 이루지 못해서 어렵습니까?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뻐기고 싶은데 그것 하나 이루지 못해서 마음 상하십니까?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은데 그것이 안돼서 괜히 상실감을 느끼십니까?
자녀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인기 때문에, 지금 있는 지위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앞으로의 내 삶은 어떻게 될까 하는 막막한 위기감 때문에 우리들은 마음에 쉼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무게가 되어, 짐이 되어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자유를 상실하게 하고 있다면 그와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무거운 짐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진 모든 분들은 주 예수께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쉬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순간 내 모든 것 훌훌 털고 표표히 가게 될 때 남은 아무 후회 없고 미련 없다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안 돼.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야 돼.’ 그러면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지요.
주님 저는 돈 없어도 돼요. 있으면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습니다. 자신 있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인기 없어도 괜찮아요. 저 혼자도 주님과 더불어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면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 나는 이건 꼭 있어야 돼요.’ 발목을 꼭 잡고 있는 것 이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얽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집착입니다.
집착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순간, 평안이 깨지고 평안이 깨지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노예가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집착에 사로잡히게 되면 평안이 깨지고 자유가 상실되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집착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무거운 짐 가운데 어깨 눌리고 삶이 눌려 질질 끌려 다니게 됩니다.

작년에 제가 기도하면서 받은 가장 큰 은혜는 <수용>이라는 단어를 깊이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이 있어도, 내 어떤 계획이 있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인도해 주시는 바를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함,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리고 내 삶의 상황을 내가 변화시키지는 못해도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소화하여 그 가운데 기쁨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수용이라는 것은 제 마음에 많은 평안을 주었고 우리 성도님께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를 맞으면서 제 마음속에 받은 큰 은혜는 <흔들림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는 많은 흔들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한 목표는 흔들리지 말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올해 표어로 정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한 번 더 참고, 한 번 더 애쓰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들 될 때 까지 우리는 흔들림 없이 마음을 지키고 삶의 습관을 지키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목표를 흔들리지 않고 더 참고 애쓰는 삶을 이루어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우리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도 일차적인 문제는 제 내면의 문제입니다. 또 제 계획과는 달리 시간표 일정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과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러한 흔들림 지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뿌리 내리고 내 모습 그대로 상향 진보적으로 앞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심을 확신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평안을 유지하고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푸릇푸릇한 삶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오늘 성경 본문을 보니 주님은 누구든지 다 주께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별하지 않습니다. 내 상태도, 내 여건도, 자격도 문제가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주께 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 사랑하고 마음에 드는 것도 내 마음에 어떤 분명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당신이 사랑할 만큼 그 자리에 있으면, 당신이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되면, 적어도 내가 싫어하지 않고 혐오할 만한 사람이 되지 않는 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상태, 어떤 여건, 어떤 심정이라도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왜죠?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해야 될 이유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간 존중의 사상-인간의 존엄성을 마음속에 확연히 새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 싫어해도 내가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어 해도 하나님이 그가 이 세상에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호흡하게 하셨다면 내가 어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 스스로 실망되고 나아갈 가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다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 자주 드리는데 아마 세상 끝날 때 까지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 두 다리로 걸어서 오신 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눈 떠서 이 목사가 구별되는 분들은 축복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목사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아, 그렇구나!’ 라고 깨달을 수 있는 분들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몸이 아파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사물을 구별할 수 없는 시력이 약한 분들이 있고, 무엇인가 분별할 수 없는 사고가 정말 제대로 장착되지 못해서 큰 어려움 가운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봅니다. 병원에 가서 느끼는 것인데 우리가 아픈 분들을 보면 간절히 기도하지만 속으로 우리는 또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사명을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내가 무엇인가 해야 될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곤고한 무거운 짐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자유롭게 되면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우리가 추구하던 모든 작은 욕심으로부터 해결이 됩니다.

제가 ‘촛불로 부터의 자유’라고 말씀드렸지요? 이만한 공간에 불이 나갔어요. 밤에 깜깜해졌어요. 사람이 촛불하나를 켰어요. 촛불 밑에 다 모여듭니다. 뭔가 좀 보고 뭔가 좀 구별하고 거기에 빛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웅성웅성 촛불 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확 하고 헤어집니다. 어느 순간 이지요? 갑자기 불이 들어왔을 때. 촛불이 필요 없어요. 훅 하고 불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필요 없으니까. 이제 촛불과 같은 빛은 필요 없어요.
우리가 이제까지 누리고자 원했던 그 많은 마음의 소욕들, 누리기 원했던 소용들, 그와 같은 것들이 생각하고 나면 한낱 촛불의 자유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큰 광대한 빛이 들어올 때 그 촛불은 우리들에게 소용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누리던 모든 것들, 학식, 지식, 문벌, 그가 누렸던 모든 권세, 이와 같은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고상한 도의 지식을 알고 나니 모두가 다 배설물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고상하게 여겼던 과거의 모든 것들이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아름답고 고상한 도의 지식을 깨닫고 나니 이제는 배설물처럼 여겨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성도님들, 또 오늘 초청받아서 처음 나오신 모든 형제자매들 우리는 촛불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누리시는 분들 되셔야 합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의 율법선생들은 인간이 감당해야 될 하나님 나라의 멍에라고 가르쳤습니다. 멍에를 지는 수고를 해야 천국의 안식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즐겁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개념은 팔레스타인의 농경문화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에게 쟁기를 매달고 밭을 가는데 어미 소가 쟁기를 메고 가면 새끼소가 그 뒤에 쟁기를 같이 매달고 밭을 갑니다. 어미 소가 끌고 가다보면 새끼소는 그냥 건성으로 따라가도 밭이 다 갈아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반복되다보면 새끼소도 익숙해지고 어느덧 힘이 자라서 어미 소가 되어서 그 밭을 경작하는 소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벼운 짐을 지고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으로 저절로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종교적 증세가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종교적 증세가 아닙니다.
우리도 모르게 너무도 기쁘고 감사해서 믿음 가지고 살다보면 어느 덧 우리가 그 믿음을 누리고 있는 은혜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갈등의 과정을 거치나 마지막 순간에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피울 수 있는 아름다운 향기로운 꽃과 같은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제로 징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너무 기쁘고 감사한 선물로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정말 주님의 멍에를 지고 가면 참 기쁘고 감사한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믿음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저는 목사로서 참 기쁜 것이 있어요. 우리 성도들 보면 처음 오신 분 나중에 오신 분 다 압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표를 붙여서 알아요. 그리고 꽃을 가지고 있어서 알고 다음 주에는 또 어떻게 아는지 아십니까?
벌써 얼굴표정에 다 쓰여 있어요.

어떤 사람은 ‘제가 다른 사람에게 초청을 받아서 왔지 내가 뭐 오고 싶어서 왔습니까?’ 라고 생각하는 듯 저에게 아주 확실한 사인을 보내세요. 저 다음에 안 나옵니다. 하고 확실하게 보이시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예배시간에 주보를 열심히 봐요. 뭐가 있다고 주보를 봅니까? 주보 열심히 보는 사람도 있고, 그냥 눈 감고 있는 사람도 있고, 팔짱끼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 다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다음에 안 와요. 이러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 분이 계속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얼굴도 굳어 있다가 ‘나를 설득시킬 생각은 마세요.’ 하는 것처럼 얼굴이 굳어있는데 조금씩 표정이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갈 때 목사 인사 안하는 이쪽입구로만 나갑니다. 그러다가 차차 목사 있는 입구로 나가고 어떤 사람은 저쪽으로 인사하고 나가다가 옆으로 막 피해서 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던 분들이 표정도 밝아지고, 설교도 잘 듣고, 나갈 때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목사님 제가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그 마음에 믿음이 깊이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인데 참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바꿔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 우리도 몰라요. 내 마음이 예수 믿을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내 마음이 그렇게 바뀔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들어 보이죠? 그렇지만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주일날만 가는 것이 아니라, 수요일도 가고, 금요일도 가고, 어떤 사람은 새벽에도 가요. 나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주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음에 교회에 억지로 나오지 마세요. 기쁘면 나오세요. 그런데 다 기뻐하실 것 같아요. 아 내가 너무 마음이 기뻐서 다음에 또 가서 예배도 드리고 목사님 설교도 듣고 또 하나님 앞에 가서 예배드리면 내 마음이 기뻐질까 하는 마음이 드시면 다음에 또 오시면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도 하늘에서 비오고 눈 오면 다 맞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그 머리에 비가 내려도 다시 쪼르륵 올라가지 않습니다. 다 비 맞고 눈 맞습니다. 슬픈 일도 있고 어려움도 있어요.
다른 게 뭐죠? 그 슬픔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 슬픔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마음이 약해서 때로는 거짓말하고 잘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내가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돌이키는 가운데서 조금씩 진보를 이루는 겁니다. 예수님의 멍에 메고 가다보면 가볍고 쉽지만 어느 새 그것이 힘 돼서 큰 자유함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어제 우리 에스라 축구 선교단이 1회전, 2회전은 지난번에 치르고 3회전에 나가서 승리했습니다.
저는 어저께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어제 결혼식 갔다가 축구경기보고, 바로 장례식 갔다 왔어요. 제가 그런 일을 보면서 우리 인생에 참 다양한 면이 있구나! 결혼식에 가서 얼마나 기쁜 가운데 축복해 주었겠어요? 축구 경기에 가서는 열광도 하고, 또 바로 장례식 가서 슬픈 가운데 위로도 해 드리고 우리 삶의 장면이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제 삶을 통해서 늘 보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식이 끝나고 와서 부지런히 축구를 보니까 전반전에 1:0으로 이겼대요. 그래서 아주 기뻤어요. 그런데 후반전에서 축구를 하는데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하다가 우리가 한골을 먹어서 1:1이 되었어요. 제가 조금 조급해지더군요. 목사가 와서 이겨야지 목사가 와서 지면 어떻게 합니다. 그곳의 선수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이 열기를 띄는데 선교단 축구감독이 국가대표선수를 했던 분인데 연세가 드셔서 현직에 안 계시고 우리 축구단을 섬겨서 봉사하십니다. 아주 대단히 멋있게 생기신 분인데 막 열을 내다가 옆에 제가 있는데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이렇게 얘기 하더군요. 제가 얘기 한 거는 아니고 직접화법으로 옮기겠습니다.
“야, 이 새끼야 거기 있으면 어떻게 해.” 흥분하셔서 그러시더니 또 뭐라고 하냐면 “두 새끼가 같이 있어.” 제가 한 말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듣는데 얼마나 재미있고 웃기는지 모든 사람이 다 웃었어요. 그런데 감독 선생님은 흥분돼서 그것도 잘 못 느끼는 거지요. 그렇잖아요. 우리 거룩한 옷을 입었다고 하니까 사실 욕하고 싶어도 욕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남이 해 주니까 얼마나 시원하고 고소합니까? 사실은 그 감독 선생님이 우리보다 더 솔직한 겁니다. 너무 감독선생님이 훌륭해서 다음에 선물하나 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냐면 우리가 한 골을 더 넣어서 우리가 2:1로 이겼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체면유지는 하고 왔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멍에를 메고 조금씩 더 나오다보면 어느 새 말도 다 바뀔 것 같아요. 감독 선생님 조금 더 있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야, 이 성도야 왜 거기 있어? 이 두 성도가 몰려다니네.”
우리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우리가 다 예수를 믿는 문화와 같겠습니까?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의 세상적인 감정과 모든 정서는 그대로 있는 거지요. 그러나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면 조금씩 점점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너희가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우리는 마음에 쉼을 얻어야 해요. 그때 육신의 쉼이 옵니다.
성경에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두 번째는 뭐라고 말씀하시지요? 내 병에서 구원하여 건강할 찌어다.
우리 믿음의 문제가 선결되고 우리 육신의 문제가 후결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쉼을 얻으면 생활가운데에도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함과 신뢰하지 못함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뢰하지 못하면 불편하고 불안해요.

대부분 초보운전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을 자꾸 태워주려고 합니다. 안탄다고 그래도 돌아간다고 하면서 자꾸 타라고 합니다. 그러면 초보운전자가 맞습니다. 사실은 초보운전자들이 타라고 하면 안탄다고 한 것이 아니라 타기 싫었던 것입니다. 언제 들이받을지 상당히 불안해요. 또 옆에 탔는데 사고나 내면 어쩝니까? 그런데 초보운전 끝나고 조금 익숙해지면 잘 안 태워줍니다.
신뢰함과 신뢰하지 못함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우리의 모든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어려운 일 있습니다. 슬픔도 있고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내 주변사람의 잘못으로 내가 큰 위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재앙이 임하는 게 어떻게 임하는지 아십니까? 전도서 보면 새에게 홀연히 재앙의 그물이 덮침같이-우리가 홀연히 재앙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막지 못해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누가 와서 그물을 덮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걸 빠져나옵니까? 그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화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하나님의 역사가 내게 흘러가는 한, 하나님이 기쁨을 내게 주시는 한, 나는 지금은 어려움을 겪지만 곧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실 것이야. 우리 늘 말씀드리지요?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이런 마음의 신뢰를 가지면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신뢰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가서 배워야 될 이유는 그 멍에는 쉽고 가볍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수고하십시오. 충성하십시오, 봉사하십시오, 헌신하십시오,” 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일인 것입니다.
주일 날 교회 오는 시간에 애들 꼭 교회에 보내세요. 그 말은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큰 축복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주일 날 하시는 일 바쁘지만 다 쉬고 주일 날 오셔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세요. 일하지 말고 놀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으시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우리가 주님 앞에 와 보면 정말 세상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이 우리 마음에 흐르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세요.” 짐이 아닙니다.
“기쁨과 평안을 누리세요” 하는 가벼운 짐으로 우리를 즐겁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날 주님의 멍에를 질 때 우리는 세상의 무거웠던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힘과 은혜와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입니다.
모든 문제는 출구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출구는 그리스도 예수 앞에 오는 것입니다.
내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믿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있고, 생활 속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데나 찾아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가을에 밤을 주우려면 밤나무 밑에 가야 합니다. 소나무 밑에 가서 하루 종일 아무리 흩고 다닌다고 해도 밤 한 톨도 주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 받는 곳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고 싶으면 교회에 오세요.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만-어디서나 하나님은 우리를 만날 수 있지만 처음에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이제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시고, 어디든지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이와 같은 삶을 사셔야 합니다.

우리는 꼭 하나님 앞에 나오셔야 합니다.
문제에는 답이 있듯이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도 벗어놓을 출구가 있으니 주님 앞에 나오는 겁니다.
주님 앞에 나오셔서 여러분들이 예배드리고, 주님 앞에 나오셔서 기도하고, 또 그 주님을 마음에 품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시계 안 봐도 아침 먹고 난 후에 배가 고프면 점심때가 된 것을 압니다. 마음이 고적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해질 때, 내가 주님 앞에 가야 되는구나 하고 느끼시면 됩니다. 너무나 일이 안되고 괴롭고 어려울 때, 인간관계로 마음이 아주 쓰라릴 때, 주님 앞에 가면 되는구나 하고 주님의 때를 느끼시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저러한 삶의 일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주님 앞에 나오다보면 우리 삶은 늘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언제나 새로움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큰 특징입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져 낙엽이 되고 바람에 흘려 다니다 어떤 나무 밑에 쓸려가 그곳에 쌓이게 되면 겨울에 비 내리고 눈 내리면서 썩어져 봄에 움돋는 새싹의 새로운 양분이 되어 새싹으로 부활하는 겁니다.
우리 삶에 있었던 모든 일들, 모든 아픔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아픔과 무거운 짐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왔지만, 그 아픔과 무거운 짐 때문에 주님 앞에 나와서 새로운 생명과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새로운 성도들을 보면 너무 너무 마음이 기뻐요.
여러분 새싹이 참 아름답죠? 가을의 단풍도 아름답고, 여름에 화창하고 수려한 수목도 아름답지만. 봄에 조그마한 새싹이 나오는 것 보세요. 대지 위에서 파릇한 새싹이 나오는 것 보면 꽃보다 더 아름다울 때가 있잖아요. 조그만 파릇파릇한 새싹과 같은 잎들-그와 같은 여러분들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는 귀해 보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 한 가지 확실하게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을 확실하게 느낍니다.
예배드릴 때 마음에 불편이 없는 겁니다.
제가 볼 때는 대부분 편안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까 목사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라, 확실하게 시간 내에 끝내서 그런 것 같아요. 저희 교회는 아무리 늦어도 한 시간이면 예배가 끝납니다.
일반적으로 목사가 기분 좋으면 설교를 오래합니다.
목사가 컨디션이 좋은 날은 성도들이 긴장합니다.
우리는 긴장안하고 편안하게 예배드리시는 것 같아요.
하나님 믿으면 편안해 집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우리 성도님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은혜의 초대에 응하셨으니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얻는 귀한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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