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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인의 삶 (롬 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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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까지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2장 첫머리에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씀하시며 기독교인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밥 먹고 산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제사이며 예배이며 우리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제물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문제로 2절부터 8절까지 말씀하셨습니다.

9절부터 13절까지는 교회에서의 사역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9절의 말씀으로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숨긴 다른 목적 없이, 딴 계산 없이, 이해타산 따지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는 바가 이것입니다. 특별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고 순수하게 살아갑니다.

두 번째는 9절의 말미에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선과 악이 있을 뿐 그 중간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 여러분의 몸을 선과 악의 경계선을 넘어서 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애를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들입니다. 늘 내가 말하는 것이 악에 속하는가 선에 속하는지 생각합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 중의 하나가 죄와 악으로부터 충격을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죄지은 사람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면서 아, 죄는 저렇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죄의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죄라는 것이 저렇게 무섭게 사람을 허망하고 추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결과만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과는 죄라는 것이 얼마나 교할한지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가능한 경우의 수를 다 뛰어 넘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여러분의 상상으로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무섭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것은 죄 자체입니다. 죄가 저렇게 무섭고 악이 저렇게 무섭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적극적인 방법은 선을 힘을 써서 행하는 것입니다. 자꾸 선을 행하는 것이 여러분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든 선에 속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누차 여러분에게도 말씀드리지만 사람을 사귀는데도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과 어둠 중에서 어떤 것이 선이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애를 써야 합니다. 가만히 두면 이 세상은 어둠이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두움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세상의 물결은 어두움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힘을 써서 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꾸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저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를 보게 되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을 저주하는데 이것은 또다시 죄입니다. 그 속에 있는 죄를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미워지지 않습니다. 잘못하니까 자꾸 사람이 미워지고 또다시 내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면 다시는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악을 행하지 않게 됩니다. 시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유유상종으로 인생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그렇게 갑니다. 힘을 써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꾀를 부리지 마십시오. 재주를 부리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선을 위한 재주는 없습니다. 선은 진실하기 때문에 재주를 부리지 않습니다. 그냥 깨끗하게 살면 됩니다. 자꾸 머리를 쓰지 마십시오, 머리를 자꾸 쓰다보면 그 속에 어둠이 들어갑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으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선한 편에 서야 합니다. 찬송가 521장과 같이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가 있나니 참과 거짓 사이에서 어디에 설 것인가 결단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진실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나갑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권면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자꾸 보고 예수와 함께 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을 미워하고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결과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 속에 예수가 있으면 악한 일을 미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10절 말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합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이 형제라는 것은 집안 식구 뿐만이 아닙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사랑하십니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교의 도를 제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형제들을 사랑하고 우애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 10절의 우애라는 표현은 필로 스토르고를 쓰고 있습니다. 스토르고는 스토르게에서 나왔는데 스토르게는 가정의 사랑입니다. 필로는 잘 아시다시피 사랑입니다. 10절의 우애는 가족을 사랑하듯이 교우들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나라에 가면 이 땅의 짧은 세월동안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쉬울지도 모릅니다.

또 10절에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서의 큰 문제는 항상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못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형태로든 주장하지 마시라고 부탁합니다. 다시 또 부탁드리는데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저 혹시라도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바르게 하는 것을 보여주면 되지 주장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물론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겠습니다만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있어서는 의견 불일치를 가져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별것 아닌 것, 상대적이고 비본질적인 문제는 그냥 넘어가십시오. 괜찮습니다. 자꾸 잘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겨납니다. 여러분. 존경하지 않으니 문제가 생겨납니다. 존경하면 됩니다. 뭔지는 몰라도 내 생각에 저 분이 틀린 것 같지만 어쩌면 저 분이 더 잘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꾸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겨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참 귀하게 됩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로 11절의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고 말씀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를 섬기는 신앙생활을 할 때에 세 가지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가 부지런이고 두 번째가 게으르지 아니함이고 세 번째는 열심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 가지가 있는데 사랑하게 되면 부지런해집니다. 희한하게 그렇게 게을러터진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부지런해집니다. 두 번째는 게으르지 않습니다. 젊은 아이가 갑자기 부지런해지면 연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가 열심을 품습니다. 정말로 사랑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에 대해서 이 세 가지가 있습니까? 이 열심은 그냥 조금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영혼을 다한 열심입니다. 내 모든 생명을 바쳐서 하는 열심을 말합니다. 처음 예수를 영접하고 감격이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다 있습니다.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고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예수를 믿고 영접했다 하면서도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부지런해지고 게으르지 않고 열심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않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한 번 짚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아직 이것이 남아 있다면 여러분 속에서 예수가 역사를 하십니다. 사랑이 식게 되면 신자의 모습은 딱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우리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2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3~4).. 게으르지는 않은데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 말씀을 듣고 돌아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러분, 에베소 교회가 어떤 결과를 당하게 되었는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너무 욕심내지 마십시오. 열심도 충성도 끝까지 꾸준히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12절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몸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만 무게중심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현실이 혹 따르지 않더라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현재에 있는 환란이나 고난도 우리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시고 나중에 다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소망이 있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비록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므로 지금 이루어 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속에 영접한 사람들은 현실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나중에 이루어 질것을 미리 당겨서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일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12절 마지막에 기도에 항상 힘쓰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받고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 가장 큰 통로는 역시 기도입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한번 해 보십시오. 집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아무데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온 얼굴과 몸에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힘들 때 십자가에서 위로의 빛이 나오게 되면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기도를 하면 건강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13절에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받는 것을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 속에 있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나누어 주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내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일을 너무 좋아하시고 그 일을 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좋아하시는 분이 내 속에 계시면 나누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내 체질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13절의 말미에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기적인 가정과 이타적인 가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내 가정만 절대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함께 행복할 때 행복합니다. 그래서 먼저 부정적인 측면을 말씀드리게 되면 이기적인 가정은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가정은 나중에 가족 간에도 이기주의가 확산되어 나가서 결국은 추하고 초라한 가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정말로 행복한 가정은 이타적인 가정입니다. 이들은 나누어 주고 또 대접하고 또 대접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됩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는 개방된 손이고 열린 마음이고 열려진 문으로서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과 기독교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열린 손이고 펴진 손입니다. 조막손이 아니고 움켜진 손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손이고 기독교의 가정이고 기독교의 주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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