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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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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정의할 때 ‘~하지 아니 하며’ 라는 식으로 부정형으로 정의 하는 것이 8개이고, ‘~하며’ 라고 긍정형으로 정의하는 것이 7개입니다. 사랑엔 ‘예’ 할 것과 ‘아니오’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예.’ 사랑은 온유합니다. ‘예.’ 사랑은 투기합니다. ‘아니오.’ 사랑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아니오.’ 사랑은 교만합니다. ‘아니오.’ 우리는 예와 아니오를 잘 구분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두 예스가 아니라, 사랑이 아닌 것을 버릴 줄 알아야 아름다운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부정형의 첫번째인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입니다. 원 번역으로는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는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대로 이 15개의 사랑의 정의는 다 현재형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기하다의 단어는 ‘젤로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가 오묘합니다. 두 개의 어찌보면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긍정적 의미로 열정적이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나 대상을 향해서 뜨겁게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zeal(지~얼, 열정)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열심당이라는 당파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도 이 당파일 것이라 생각하고 또 AD 70년의 유대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당파입니다. 이 열심당이란 당파를 젤롯이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부정적 의미로 시기하다, 투기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jealousy(젤러시, 시기)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번째 의미를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들처럼 사랑도 갈림길에 있습니다. 열정적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시기하는 사랑은 좋지 못합니다. 바울은 사랑장에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시기로 발전하지 말고 아름다운 열정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열정이다

저는 먼저 이 긍정적 의미인 열정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시기하고 투기하는 이유는 그 안에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34:14)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라 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질투하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질투합니다. 특히 우리 마음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향할 때 그렇습니다.

사랑은 열정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기에 그 사이에 누가 끼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랑하되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다른 우상이나 하나님 아닌 것이 우리 중심을 차지할 때 하나님은 화를 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다른 신이 누구입니까? 루터는 신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네가 너의 심장을 걸어놓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본질적으로 네 하나님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맘몬 곧 물질을 주인이라 불렀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우리 안에 하나님 대신 물질이 들어가 있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참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온통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길 원하십니다. 다른 것이 들어가 있으면 화를 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끔 고난을 허락하시고 우리 앞길을 막으시기도 하시고 병이나 연약함에 빠지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로부터 떠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세상이나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덧없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딴 것이 가득 차 있고, 바람이 나 있는데도 가만 놔둔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기독교가 유일합니다. 우리 동양의 종교는 어떤 법칙을 신봉합니다. 법칙은 그에 따라 살면 되지 법칙이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범신론이나 이신론이라는 종교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신이 우리 인생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마치 시계를 만들어 놓고 태엽을 감아서 내 던져 놓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하나님은 마치 인간과도 같습니다. 질투합니다. 기독교가 살아 있고 힘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으로 서로 이렇게 끈끈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런 하나님의 질긴 사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욥기 7장 18절과 19절입니다.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아침마다 권징하시는 분, 분초마다 시험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않으시는 분 바로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하신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주님의 성전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치의 소굴이 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자 주님이 화가 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그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사랑을 외치시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정말 의외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 여기 열심이라는 단어가 오늘 시기하지 아니하며의 ‘젤로오’의 명사형인 ‘젤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마음의 성전이, 또 우리 교회가 찬송과 예배 소리가 아니라, 세상의 소리와 장사꾼의 소리로 가득할 때 분노하십니다.

저는 ‘시기’에도 좋은 ‘시기’와 좋지 않은 ‘시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시기는 좋은 시기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시기하는 것이지요. 19세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질투를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뜻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그 상대방이 자신만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상대방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가 있으면 마음이 아픈 법입니다.

요즘은 ‘애인’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이런 불륜의 사랑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아내도 사랑하고 다른 여자도 사랑할 수 있는가? 한 여자가 자기 남편도 사랑하고 다른 남자도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은 비정상적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배타적이며 한 사람만을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쾌락입니다. 적당히 즐길 뿐입니다. 자기 마음을 내어 놓지도 않습니다.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이기적 형태라 할 것입니다. 인생을 즐기는 것이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는 버려라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시기와 질투는 저는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이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의 이 시기는 사랑과 열정이 없는 부정적 의미의 ‘시기’입니다. 오히려 차가운 ‘시기’입니다. 차가운 시기가 나오는 이유는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무엇을 사랑하거나,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에서 ‘시기’를 정의하기를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성취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는 사랑의 반대입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시기심이 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무엇만을 사랑합니다. 형제간에 다투고 시기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가진 부모의 인정이 탐이 나기 때문입니다. 친구 간에 시기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지혜나 힘, 또는 물질이나 명예가 탐이 나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1등 할 때 시기심이 나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낙담하게 됩니다. 친구가 상을 받거나 자기보다 더 큰 명예를 얻을 때 배가 아프고 화가 나는 것이 바로 시기입니다.

어떤 수도사가 사막에서 고행하고 금식하며 수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귀가 그 수도사를 넘어뜨리려고 달라붙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로 유혹했습니다. 수도사는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먹을 것으로 유혹했습니다. 역시 수도사는 까딱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물질 등 그 외에 수많은 것을 가지고 유혹했지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마귀는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해 낙심된 상태로 돌아오던 도중 한 늙은 마귀를 만났습니다. “자네! 왜 이렇게 낙심되었나?” 젊은 마귀가 말했습니다. “저 동굴 속에 있는 수도사는 정말 지독하네요. 아무리해도 넘어뜨리지 못하겠어요.” 그때 늙은 마귀가 말했습니다. “내가 좋은 비법을 하나 가르쳐주겠네. 그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해보게” 하고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젊은 마귀가 늙은 마귀의 충고대로 그 수도사에게 돌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도사님! 당신의 친구가 며칠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었답니다.” 그러자 그 수도사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시기심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합니다.

시기의 역사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최초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유도 이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은 하와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창3:5) 것이다. 하와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나 권위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시기하다 타락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형제들인 가인과 아벨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자 가인의 마음에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가인이 자기의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형제 살해를 자행하고 맙니다. 이런 가인의 피를 받아서 그런지 우리 가정 안에서도 형과 아우 사이에 오늘날에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동생은 형을 이기려 하고 형은 자기 권위를 지키려 합니다. 다른 형제가 1등을 하거나 상을 타면 온 가족이 기뻐해야 할 터인데 형제 관계에서 그런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여러분 돌아온 탕자의 비유 또한 그렇습니다. 탕자가 자기 몫의 재산을 받아 집을 나간 후 허랑방탕하게 탕진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탕자를 아버지가 혼을 내기는커녕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다시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성대한 잔치를 엽니다. 이 모습을 밖에 일을 하러 나갔다 돌아오던 큰 아들이 봅니다. 화가 난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불평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9-30) 형은 동생을 향한 원망이 가득합니다. 아버지의 사랑받는 동생에 대한 시기입니다.

우리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시기들입니다. 시기는 무엇보다 자기를 괴롭게 만듭니다. 잠언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14:30) 뼈가 썩는 고통입니다. 18세기 극작가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질투는 화보다 더 경계해야 할 악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진 자만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남을 질투하는 자는 누구나 그 사람의 우월성을 은연중에 인정하는 것과 같다.” 시기하면 무엇보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고 때로는 낙담하게 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이 있는데 정말 시기심 때문에 우리 건강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시기심은 또한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이라는 아름다운 사랑장을 여기에 기록한 이유도 실은 고린도 교인들의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활발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열정이 지나쳐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자랑과 시기로까지 갔습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최고라고 잘난 척을 하였습니다. 아마 이중 최고의 은사로 여겨졌던 것이 방언의 은사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13장 바로 앞에 있는 12장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모하라는 단어가 오늘 말씀의 시기하다는 단어와 동일한 ‘젤로오’입니다. 시기한다면 오히려 더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갖기를 서로 시기하라는 뜻입니다. 시기하고 잘난 체 하는 이면에는 저들 가운데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간파했던 것입니다.

서로 시기하는 공동체는 자기를 자랑하는 공동체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예수님을 자랑해야 하지 자기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시기하는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서로 합력하여 일 해도 힘든데 마음이 합하지 못하여 서로 분열되어 있으면 무슨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시기를 극복하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시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첫째 사랑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랑하면 시기가 사라지지만 친구가 가진 무엇을 사랑하면 시기 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부모는 자식이 잘 될 때 시기나지 않습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복과 성공이 나의 행복과 성공이 일치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는 시기가 없습니다. 아내나 남편이 진급하고 이름이 높아질 때는 마치 자기 일인냥 기쁩니다. 시험 발표를 앞두고는 마치 자기 일인냥 조마조마합니다. 사랑하면 시기가 없어집니다. 제가 교회하면서 느끼게 된 것인데 저는 여러분이 행복하고 성공하는 것이 즐겁고 기쁩니다. 여러분의 감스 아파할 때 동일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기도하는 양을 생각해보면 우리 친척이나 가족들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시기심이 없어집니다.

형제간에나 자매 간에는 참 갈등이 많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없는 형제도 있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도덕 책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의 경우라 할 것입니다. 두 형제가 농사를 지어 가을 추수를 끝냈습니다. 그날 밤 동생은 “형님 댁엔 식구가 많으니까 똑같이 나누어 가질 수 없다”면서 깜깜한 논으로 가서 형님 몰래 많은 양을 형님 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형님도 “동생은 새로 살림을 시작했으니 소용되는 곳이 많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밤중에 논으로 나가 자기의 벼를 동생의 낟가리에 갖다 쌓았다. 날이 밝아 논에 나간 형제는 낟가리의 크기에 조금도 변함이 없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에도 형제가 지난밤처럼 서로 볏단을 옮겼지만 그 이튿날에 보니 낟가리의 크기는 조금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셋째 날 서로 볏단을 날라 주다가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벼 낟가리가 줄어들지 않는 까닭을 알고는 볏단을 내던지고 한참동안 얼싸안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단순히 꾸며낸 옛날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형제의 이름을 아십니까? 이성만, 이순 형제입니다. 이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살던 곳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으로 연산군 때 이들을 기념하는 효제비가 세워졌고, 지금 이곳엔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시기심이 나지 않습니다.

둘째 시기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직분과 역량과 감당할 만큼의 운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길만 달려가면 됩니다. 이것을 절대의식이라 합니다. 그러나 자꾸 옆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비교의식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남이 가진 무엇 때문에 자기가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우린 이러 비교의식 때문에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우리를 자꾸 경쟁 사회로 몰아가고 서로 비교함으로써 행복을 찾으려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사회는 모두가 불행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시기심을 기르는 훈련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비교의식 가운데 패망한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귀환하자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소고치고 춤을 추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하18:7)하고 노래합니다. 이 노래를 들은 사울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비교의식이 들어간 것입니다. 사울 인생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다윗을 향한 질투심에 불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시기심은 뼈를 썩게 합니다. 사울은 결국 심한 정신병에 걸리고 맙니다.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 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며 다윗을 추적합니다.

우리 인생을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찾는 사람은 이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고 결국 다른 사람의 인생에 자신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는 삶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면 만족하십시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여기까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만족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에게 나아가서 예수님이 우리들보다 더 많은 세례를 주고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을 이렇게 대답합니다.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7-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 요한의 역할은 광야에 길을 내는 것까지입니다. 그 길을 밟고 가는 것은 세례 요한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길을 닦다가 내가 이 영광의 길도 밟아야한다는 착각과 시기심 때문에 인생을 불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부름을 받았지 그 영광을 취할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받은 몫에 충실하며 감사할 때 우리는 시기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이런 삶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 몸이요 공동체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몸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머리의 역할을 맡은 자는 위에 있으면서 생각하고 지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반면에 발의 역할을 맡은 자는 아래 어둡고 냄새나는 곳에서 묵묵히 걸어가며 몸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손은 손대로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온전한 몸을 이루고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온 교회가 한 몸이요, 온 우주가 하나님 안에서 한 공동체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교만도 시기도 미움도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불행은 머리가 발의 여할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잘난 체 한다는 것이요, 발은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불만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자세로 살며,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고 충실할 때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기심 없는 인생은 자기를 자유하게 만들면 상대방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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