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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주여 우리를 보내소서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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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수난 당하신 계절 저희들도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오늘 저희들의 기도 제목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을 모아놓고 하신 마지막 분부의 말씀이 오늘 마태복음 본문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예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앞에 놓았습니다. 마지막 인사입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이 말씀이 요한이 전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너희를 보내마. 마태복음은 오늘 그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저희들한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명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또 지키게 하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분부의 말씀.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내가 죽었다고 살았다고 얘기 좀 해주어라. 그리고 힘이 모자라거든 나대신 그대들에게 보낼 성령을 받고 용감하게 지혜 있게 이 일을 해라.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한 가지 놓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입니다.

마태복음서에 보면 조금 더 나아가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성령이 나다. 성령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한 예수그리스도 그분의 분신이다. 성령은 예수님이다. 오늘 저희들이 수난절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이런 분부를 하셨기 때문에 이 분부에 따라서 예수님이 가셨던 수난의 과정을 회상하고 그대로 한걸음씩 걷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왜 수난을 받으셨습니까? 받을 필요가 없는 예수께서 받으신 이유는 우리 죄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이렇게 써있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예수가 하나님이란 분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우리들을 또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 자연을 온 우주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어디서 피 흘려 죽었냐하면 예루살렘 시내에서가 아니고요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우리의 현실적인 삶 밖에서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요. 어디서 죽는 것이 제일 유가족들에게 행복하고 본인에게 행복하냐하면 집에서, 아니면 집과 같은 병원에서  찬송 속에, 기도 속에, 위로 속에, 그렇게 죽을 수 있으면 어차피 죽어야 한다고 하면 행복한 죽음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제자들의 기도 속에 사람들의 축복 속에 죽은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집에서 죽은 게 아닙니다.

병원에서 죽은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센터인 예루살렘을 벗어난 성문밖에 골고다 언덕 갈보리 산에서 예수는 객사했습니다. 죽는 것 중에 또 행복한 죽음은 그냥 명을 다하고 죽으면 솔직히 행복합니다. 명을 다하지 못한테 자살하는 것도 복이 아니지만 타살을 당하면 더군다나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예수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비참한 죽음, 처참한 죽음 그 죽음을 우리가 오늘 송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께서는 이런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그래도 나 같은 처참한 죽음이 여러분을 구원 할 수 있으면 기꺼이 죽음을 맞으마. 그러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으면 기꺼이 내가 죽으마. 사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회상하고 또 그 죽음 속에 동참하려고 하지만 문제는 처참한 죽음 때문이 아니고 그 죽음 이후에 이루어진 부활의 생명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우리가 즐기고 동참하는 것은 수난 때문이 아니고 수난이 잉태한 수난이 산출 해 논 새로운 생명 때문에 오늘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부활이 있기까지 그 부활의 장소는 부활을 낳는 아픔은 잉태의 아픔은 해산의 고통은 여전히 우리한테 존재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3.1운동 기념 주일을 맞았습니다. 3.1운동에 관한 이야기 참 많습니다만 예수님과 똑같은 운명의 순교자들이 우리 땅에도 많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아마 신앙자로 보면 첫 번 순교자 일겁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성문밖에 쫓겨나서 죽으신 분. 3.1 운동 때 이 나라에도 자기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쫓겨나서 집도 병원도 아닌 산간에서 감옥에서 무참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수많은 선열들이 있습니다. 나라마다 그런 사람들 얘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주 비참하지만 용감한 여성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스더 이야기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희들이 에스더 기도일 이었습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이 지배하던 시대에 왕비가 되어 자기 민족을 몰살하려는 국무총리의 모반을 물리치고 자기 종족을 구한 사람입니다. 불란서 사람들 만나면 잔다르크라는 소녀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유관순이라 하는 아주 나이 어린 소녀 이야기를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열아홉 살 된 유관순. 엘리스샤파라는 여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서 시골 학교에 있다가 이화학당으로 전학을 합니다.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3.1운동이 나서 유관순 여사가 당시 소녀로서 파고다 공원에서 있었던 삼일운동 만세에 동참을 합니다. 근데 3.1운동 있고 난 후 열흘 뒤에 3월10에 모든 학교가 폐쇄가 됩니다. 이화학당도 폐쇄가 됩니다. 자기 고향 천안으로 내려갑니다. 너무 격하고 너무 불행하고 힘들어서 나라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천안, 연기군, 청주군, 진천군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3.1운동 거사 모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4월1일 천안의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집회를 열기로 작정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날 천안 시골에 삼천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삼천 명이 모인 가운데 천안 옆에 아우내 장터 옆에 있는 지평리 교회의 장로 대표로 조인원 장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조병옥 박사의 아버님입니다. 유관순이라는 열아홉 살 소녀가 삼천 명 앞에서 연설을 합니다. 그날 이후 일본 경찰에 쫓겨서 모두 다 체포가 됩니다. 유관순 여사도 체포되어서 일심에서 7년, 이심에서 3년, 마지막 서울에 있는 삼심에서 7년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힙니다. 얼마나 완강하게 저항했는지 일본 경찰들이 유관순이 먹는 밥에 쇳가루도 섞고 모래가루도 섞어서 먹여 봐도 끄떡없더라고 합니다.

유관순 말이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을 왜 당신들이 재판 합니까? 하는 항변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10월 10일 칼을 휘둘러서 난도질을 당한 끝에 유관순여사는 죽었습니다. 참살 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교장 푸라이아 월터 여사가 일제 당국에 시신인도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모여서 국제 여론에 호소할 테니 시신을 인도해달라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 압박 때문에 시신 인도를 받았습니다. 이화 학당 기록에 보면 유관순 학생의 시신을 석유 담는 궤짝에 담겨져서 인도를 받았는데 궤짝을 열어보니 몇 토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토막시체로 가득한 시신을 인도 받았습니다. 선생님들이 모이고 선교사들이 모이고 동료학생들이 모였습니다. 관을 앞에 놓고 얼마나 울었던지 시신이 눈물로 젖었습니다.

그 시신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이 됐습니다. 세상마다 나라마다 또 지방마다 공동체마다 이런 아름다운 순교의 이야기. 민족 독립 자유 평화 교회마다 순교자 이야기 다 있습니다. 저희들은 오늘 3.1운동을 경축하면서 3.1운동 자체는 그 자체로서는 성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1운동이 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했으나 그러나 3.1운동이 우리 독립의 얼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엄청난 결과를 빚은 것도 사실입니다.

1919년에는 실패했으나 1945년 우리가 독립하기까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와이에서 중국에서 해외 독립운동이 전개됐고 마지막 얘기를 제가 드리면 카이로라고 하는 이집트 수도에서 1943년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과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모여서 회담을 합니다. 한반도를 독립시킬 것이냐, 신탁통치할 것이냐? 그때 루즈벨트와 처칠이 한 얘기입니다. 조선 사람들은 아직은 독립하기는 좀 시기상조 아니냐는 얘기에 장개석 총통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3.1운동은 총칼 없는 맨 주먹의 궐기인데 역사상 유래 없는 강한 힘을 보여준 것이 조선민족의 3.1운동이다. 장개석 얘기입니다. 2년 후에 포츠담에서 제2차 회담이 열렸습니다. 다시 처칠이 문제를 제기했다고 합니다. 자격이 있겠느냐. 장개석 총통 얘기가 다시 3.1운동은 실패했지만 조선민족의 얼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세 사람이 모여서 그러면 독립을 주자. 단 독립을 주되 그전에 스탈린과 루즈벨트가 합의한 데로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점령해서 해방시키는 방식으로 주자. 단 이런 결의를 바탕으로 하되 포츠담 회담에서는 적당한 시기에 한반도를 통일시키자고 합의를 합니다.

합의할 때 3.1 운동이 보여줬던 엄청난 역사와 힘이 얼이 되고 살이 되어 독립으로 까지 이어집니다. 사건 하나로는 마무리 안됐으나 그 사건 하나는 독립의 뿌리가 되고 피가 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관순 여사의 열전은 기리 기리 두고 우리가 기념하고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인듀코스(in due course). 그 말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아마 유관순 여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렇게 했을 겁니다.

이사야서를 읽어보고 신앙적 고백으로 보면 내가 누구를 보낼까? 유관순 답이 주님 저 어리지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이사야 말씀이 유관순 가슴에 있었을 겁니다. 제가 앞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처럼 내가 그대들을 보낸다. 세례도 베풀고 독립도 선포하고 자유도 선포하고 평화도 선포하고 해라.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하셨을까? 전반부에요,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보낸다. 우리가 보냄 받은 것은 예수님의 보냄 받은 사실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립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보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방식 그대로 하나님이 자기를 보냈기 때문에 예수님 그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어떻게 보냈습니까? 하나님이 예수께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가라. 가서 만백성을 구해라. 만백성이 죄 때문에 악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데 만백성 대신에 죽어라. 그리고 집에서도 죽지 말고 병원에서도 죽지 말고 성 밖에 쫓겨나서 죽어라. 그리고 순교해라. 그리고 흘린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 찢긴 몸을 먹고 마시는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어라.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방식으로 보냄 받고 이 땅에 왔습니다. 똑같은 방식대로 예수께서 우리를 보내시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신앙은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랍니다. 좀 아픈 얘기입니다만 그렇게 고백합니다. 이 민족은 순교한 수많은 애국지사의 헌신을 먹고 삽니다. 그것이 군인이든 사회봉사자든 의병이든 누구든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한 모든 사람들의 헌신을 먹고 우리가 지금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구원과 우리의 구원은 최초의 선교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마시고 살아갑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시면 예수가 흘리신 보혈 속에 부활과 새 생명이 잉태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보내실 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들과 함께 하마. 하나님이 예수에게 약속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십자가에도 함께 있겠고 부활에도 함께 있겠고 승천에도 함께 있겠고 승천한 이후도 함께 있겠다. 내 아들아 염려하지 말라! 그래서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내가 그대들과 늘 함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에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가 죽을 때 함께 하신 하나님 너무 고마워서 그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습니까? 아니지요. 영원하신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함께 달려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어가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끌어안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살려 내셨습니다.

늘 인용하는 속담입니다만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부모가 돌아가시면 좋은 산천에 묻어드리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습니다. 약속한 하나님은 세상 죄를 대신지고 구원 때문에 죽어간 예수그리스도 아들을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토해내셨습니다. 어디 묻혀야 사느냐 하면 하나님의 가슴에 묻혀야 삽니다. 그 말이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우리 어디서 죽어야 합니까? 산천이든 집이든 병원이든 어디든 우리가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가슴에 묻힐 수 있으면 우리는 부활을 보증 받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그리스도의 찢긴 몸, 흘리신 보혈을 만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가슴에 살기로, 예수처럼 똑같이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오늘 저희들이 기념하는 수난절 그리고 3.1절의 의미입니다. 우리 역사도 3.1절에 죽은 모든 사람이 민족의 살아있는 가슴에 묻혔듯이 그래서 우리가 기념하듯이 오늘 예수의 죽음도 하나님의 가슴에 묻혀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애국을 위해서 일하십시다.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일하십시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십시다. 생명을 위해서 일하십시다. 그 원천은 오늘 우리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 하나님이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내가 그대들을 보냅니다. 맘대로 사십시오.

그러나 하나님 가슴에서 사시고 가슴에 묻히고 그곳에서 부활하십시오. 예수의 모범을 따라 오늘 수난절을 생명의 수난절로 지키십시오. 예수님의 분부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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